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24화 (24/29)

24회

새들은 비틀린 폐곡선으로

19

<마술은 도구가 아니다. 곧 네 존재의 증명이며 너는 그로써 세계와 소통하고 간섭하여 일부이자 혹은 전체가 되리라.>

철저한 교육이었고 이해 못 하는 마술사들도 없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마술사인 이들은 호흡하듯 세계를 통찰했으며, 접촉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밀접했다.

또 그렇기에 존재의 확립은 매우 중요했다. 비단 증명하는 일뿐만 아니라 가까운 만큼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 어린 테사는 궁금했다.

‘스승님, 그럼 만약 에고가 흔들리면 어떻게 되나요?’

‘호, 궁금하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니 불안하네요. 그냥 모를래요.’

‘이미 늦었다. 따라 오거라.’

갈라가르스가 문을 연다. 테사는 위대한 스승의 높은 경지에 감탄하며 뒤따랐다. 그가 이끈 곳은 상아탑 가까이 위치한 <절망의 협곡>. 사시사철 짙은 안개가 드리운 이 협곡은 기괴한 형상의 절벽들로 유명했다.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불허된 장소였다.

호기심 넘치게 둘러보는 어린 마술사에게 스승이 물었다.

‘선악의 기준이 무엇이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가를 자격이 없다고 하셨어요.’

‘옳다. 필멸자의 기준은 무의미하다. 그를 입증하듯 우리 역사엔 위대한 악인들이 존재하지. 간웅도, 패왕도, 독재자도 모두 세계의 인정을 받아 그 이름을 남겼다.’

테사는 스승의 얘기가 다소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불손하지만, 약간 흘려 들으며 뒤틀린 벽으로 손을 뻗었다. 신기했다.

‘그러나 드물게도 테사, 세상엔 근원의 악에 에고를 정복당한 이들이 간혹 나타난다. 이들은 단숨에 미움을 사 버려지지.’

‘버려져요?’

‘그래. 지금 네가 만지는 바로 그들처럼 말이다.’

스승이 심술궂게 웃었다. 테사는 주춤 물러났다. 어린 얼굴이 창백해진다. 듣고 보니 사람 형상 같기도 했다. 마치 절규하는…….

‘……끔찍해.’

‘악한 탐욕이란 추하기 마련. 에고를 굳건히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느냐. 이들은 매순간 마술이 주는 저주에 시달리다가 처참히 죽어간다. 무덤조차 없을 이들에게 죽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건 상아탑의 마지막 배려이자 동정이지.’

협곡을 향한 갈라가르스의 눈빛은 경멸 같기도 했고, 애도 같기도 했다. 테사가 살짝 미간에 힘을 줬다. 가까이 보니 정말 표정들이 보였다. 어떤 죽음도 이만큼 고통스럽진 않겠다.

그 정도가 약간이나마 짐작이 돼 어린 마술사가 몸서리쳤다.

‘이렇게 시달리느니…… 차라리 마술을 놓으면 되잖아요.’

‘마술을 놓아?’

아주 진귀한 소릴 들었다는 듯 스승이 돌아봤다. 마른 손이 테사의 머릴 쓰다듬는다. 이럴 때 네가 아직 아해란 걸 실감하는구나.

‘테사 오라힐리. 너의 신경, 혈맥, 뼈와 근육…… 호흡 한 점까지 마술의 은총이 서려 있다. 놓는다고.’

노회한 눈동자가 제자를 차게 관조했다. 드높은 현자의 눈에서 기묘한 안광이 발한다. 테사는 얼어붙었다. 스승이 실소했다.

‘그 순간 너도 사라질 것이다.’

/

현대인에게 <살인>이란 용서받지 못할 가장 무거운 족쇄다.

오라힐리 테사는 살인자가 되었다. 천여 명을 학살한 무게가 어깰 짓누른다.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이 젊은 마술사의 귓가에 들러붙었다. 망령들이었다. 어머니를 찾고, 또 자식을 찾고, 잃어버린 삶을 찾는…….

안 돼. 그만둬.

후폭풍은 거셌다. 각성의 여파부터 마력 탈진까지 마술사를 호되게 휩쓸었다. 공방으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 채 테사는 눈을 깜빡였다.

천장이 홀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마술사는 스스로 상태를 점검했다. 회로는…… 바닥까지 깨끗이 비었고, 감각은 여전히 소름끼치고, 이명과 잔상이 떠나질 않고. 좋아, 완벽해. 만신창이로군.

두 눈이 느려진다. 테사가 생각했다. 왜 춥지. 너무 시끄러워. “제발, 좀 조용히 해……!” 귀를 틀어막는 손에서도 점점 힘이 빠져서.

마르코, 제발.

다 끝나면 곁에 있어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대로 페이드아웃. 테사는 혼절했다.

/

이토록 오래 한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가능했던가. 곱씹자 아득하기만 해서 세상 많은 곳,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마르코에겐 잘 실감나지 않았다.

나는 꼭 내가 미친 놈 같은데. 다들 이런 걸 하고 산단 말이지.

잠도 안 자고, 휴식 한 번 없는 비행이었다. 내내 마르코의 머릿속은 한 명으로 빼곡했다.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맹목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이보다 더한 게 달리 없었을 뿐.

새벽은 푸르렀다. 청염의 불사조가 사람으로 화했다.

몹시 경이로운 광경이나 목격한 이는 없다. 마르코가 바인브릿지 타운에 도착한 시각은 이른 새벽. 세상 어디서나 동트기 직전은 비슷한 조도를 지닌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평화라고 해적은 단번에 꿰뚫어봤다.

중요하진 않았다. 마르코의 우선순위는 따로 있다. 아주 잠깐 둘러보고 공방 앞에 도달했다. 아슬아슬하게 이틀.

지체 않고 날아왔음에도 사건으로부터 벌써 그만큼이 지났다. 속이 바싹 말랐다.

“……비켜.”

따라서 나오는 말은 자연히 날 설 수밖에. 무거운 어조에 그웬이 움츠렸다.

“안, 안 열려요. 이틀째 아무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해.”

“부수기라도 하실 건가요! 그건 용납 못 해요!”

뺨을 쓸어내리는 마르코의 손길이 다소 신경질적이다. 가까스로 욕설을 억누르느라 그랬다.

그웬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이 해적이 테사와 모종의 관계임을 짐작해도 무슨 의도일지 불확실했다. 폭풍이 지나간 타운은 살얼음판 위. 해군도, 해적도 믿을 수 없다. 오로지 친구를 지킬 각오로 밤새 이 문 앞을 지켰다.

떨림이 확연한 사냥총이 겨눠진다. 마르코가 한숨 쉬었다.

“놀라운 용기구만. 지금 네가 겨누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내 알 바 아니에요! 중요한 건 테사니까!”

“……이봐.”

평소라면 박수쳐줄 의향도 있다. 다만 지금은 좀 많이 틀렸다. 마르코가 총구를 툭 밀었다. 단지 그걸로 총이 나동그라졌다.

“미안하지만, 나도 친절 따윌 베풀 여유가 없어요이. 밤새서 예민해진 모양인데 이만 돌아가.”

“누가 예민!”

“크라이튼 그웬.”

사냥총을 주워 마르코가 내민다. 그웬이 얼떨결에 받아들다가 뒷걸음질 쳤다. 얼핏 피로가 비치는 냉담한 얼굴로 대해적이 내려다봤다.

“객기는 칭찬해주고, 의리는 대신 감사하지. 내가 누군지 알다시피 나도 널 알구만. 마술사의 유일한 친구겠지, 꽃집 아가씨. 하지만 이 문 너머의 관계는…….”

“…….”

“나와 걜 빼면 모두 관계외자거든.”

그러니 비키라고, 마르코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웬은 눈치 없는 편이 아니다. 잠깐 아래를 응시하다가 흐려진 판단력을 인정하고 목례했다. 해적은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멀어지는 소릴 들으며 마르코가 이마를 기댔다. 석조 느낌이 서늘했다. 덕분에 맥박이 조금이나마 진정된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테사.

적막했다. 마르코는 그의 마술사가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괜찮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힘들다고 해도 보다 더 힘들 것임을 짐작했지만…… 불행히도 그 이상인 모양이다.

그걸 인지하자 인내도 바닥난다. 이 공방이 자아를 지닌 존재임을 마르코는 이미 안다. 주인인 마술사의 의지에 따라 살아 숨 쉬는 공방은 무엇보다 주인을 우선했다.

“지금 나보다 걔가 필요한 건 없으니까.”

내가 최선이다. 열어. 마르코가 중얼거렸다. 테사가 뭐라 했든 열라고. 네 주인을 위한다면.

그리고 그 말의 타당성을…… 공방이 인정한다. 마술사의 공방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듣는 대신 판단했다. <아무도>에 이 자가 포함되지 않으리라고.

그건 마술사와 무엇보다 영혼적으로 가까운 공방의 결정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옳을 것이었다. 문이 열린다. 마르코가 안으로 들어선다. 등 뒤로 이윽고 다시 닫혔다.

완전한 소강이 도래한다. 공방은 심연 아래로 자아를 가라앉혔다. 이 다음 문을 넘을 자는 이젠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오라힐리가 첫 여자냐 묻는다면 마르코는 부정하겠다. 신세계에서 태어난 이 해적은 기억이란 단어를 쓸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자란 순간부터 이미 바다였고, 수많은 파도와 섬들을 거쳐 왔다.

망망대해 위 누구보다 자유로운 해적. 얽매이지 않은 관계 속에서 인연들은 무수히 스쳤다. 마르코는 한때 기대했으며, 한때 의심했고, 한때 부정했다. 그럼 이젠 어떠하냐 누군가 묻는다면…….

답한다. 그저 무력하노라.

“아무도! 들이지 말랬잖아.”

던져진 물건보다 며칠 새 야윈 팔이 먼저 보였다.

등 뒤로 유리가 이질적인 파열음을 낸다. 뺨을 제대로 스친 덕에 생채기가 났다가 금세 재생됐다. 마르코는 쓰라림이 머문 자릴 쓸어본다.

“내가 <아무도>는 아니지.”

“……그럼 뭔데? 다 필요 없어. 꺼져요.”

벽에 기대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테사가 노려봤다. 이틀. 불가능함을 머리론 알아도 몸은 이미 한계였다. 마르코를 보자 원인 모를 감정이 속에서부터 들끓었다.

한 걸음, 마르코가 다시 뗀다. 손에 닿는 것들을 테사는 주저 없이 집어던졌다. 서적부터 컵, 와인 병까지. 몇 개는 미처 닿지도 못하고 발치로 굴러 떨어진다. 마르코는 서있기만 했다.

피하지도, 막지도, 물러나지도 않은 채 그냥 그렇게. 달라붙는 머리칼을 테사가 화를 섞어 쓸어 넘겼다. “왜 안 피해?” 마르코는 담담했다.

“말했구만. 다 내 몫이라고.”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밀어내면 빌어서라도 가겠다고도, 했지.”

이 해적의 아무렇지 않음은 늘 테사를 뒤흔든다.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만다. 더 입을 열 수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마술사는 무릎 사이로 고갤 파묻었다. 가까워지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해풍을 몰고 다니는 사내. 친숙한 바람 냄새다. 다가온 마르코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의 무게를 아는 이 해적은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만을 입에 담았다.

재촉도, 서투른 위로도 없다. 그저 테사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여기 있노라고, 확인시키는 최소한의 움직임이었다.

조각된 폐허 같은 공방. 두 개의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참 뒤, 무릎 사이로 테사가 뇌까렸다.

“진짜 그러면 대체 어쩌려고…….”

맥락이 한참 끊긴 다음이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어둑한 조명 아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차다. 얘 설마 계속 이러고 있었나. 속내와 다른 평온한 어조로 마르코가 대답했다.

“각오 없이 아무 말이나 뱉을 만큼 어리지 않은데. 내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는 거요이.”

“나이 많은 게 자랑이에요?”

“안 될 것도 없지. 유치하게 이런 걸로 유세 떨 마음은 없지만…….”

부드럽게 테사의 손을 덮는다. 자연히 재생되는 불사조와 마술사의 육신은 달랐다. 집어던지느라 파편을 쥐었던 손은 벌써 피로 물들었다. 마르코는 조심히 들어 입 맞춘다.

“테사 너보다 먼저 겪고, 먼저 알아서.”

까슬한 입술이 손등과 손가락 틈을 쓸고.

“그만큼 더 받쳐주고, 안아줄 수 있는데.”

무릎을 움켜 쥔 손에서도 천천히 힘이 빠진다. 마르코는 벌어진 손바닥에 입을 묻으며 열기를 담아 속삭였다. 그러니, 내 사랑.

“자랑은 못 해도 이에 감사하지 않을 리가.”

순간 조명이 깜빡이며 들어온다. 빛이 내렸다. 테사는 고갤 들었다. 올곧고 또 관능적인 금색. 흡사 태양 같다. 눈부셔서 마술사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상처를 핥는 혀가 뜨겁다. 내리뜬 자상한 눈매를 다른 손끝으로 매만졌다. 어딜 향해 뻗어도 테사에겐 항상 허락되어 있었다.

“마르코.”

“응.”

“마르코.”

“그래, 내가 늦었지. 미안해.”

비로소 벌어지는 두 팔을 마르코가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찬 몸을 제 무릎 위로 올린다. 단단한 목덜미에 테사가 콧등을 묻었다.

누구도 침범 불가한 품. 이 너른 위로를 한 시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다. 뭍으로 막 건져내진 사람처럼 테사는 힘껏 부여잡았다.

“……왜 이제 와, 왜.”

“그래.”

“일 분이 일 년 같았어.”

너무 아파.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겠어.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다 끝나면 곁에 있겠다면서 왜 약속 안 지켜. 내가 뭘 어떻게 버텼는데.

두서없이 던지는 말들을 마르코가 다 받아낸다. 일일이 답하며 파고드는 등을 받치고, 귀 기울였다. 마치 한계가 없는 사람처럼. 테사의 모든 게 쏟아져도 응당 제 몫이라도 되듯이.

테사는 생각했다. 몰라. 이런 사람을 부정하는 길 따위 나는 모른다.

마르코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가질 수 있는 한계는 전부 너라고 했던가. 당시엔 까마득하기만 했던 말이 이제야 진실로 와 닿는다.

이 애틋함은 무한하며 전부 내게로 향한다. 나른하지만, 또 타오르는 불멸의 해적을 테사는 마주본다. 손을 뻗자 마르코가 뺨을 기댔다.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더 해.”

“……다 했어. 말은.”

“…….”

파도에 거칠어진 손이 마술사의 이마를 쓸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돼 천천히 내리는 키스를 받으며 테사가 속삭였다. 알아요? 비명 소리가 끝없어.

“어떻게든 좋으니, 마르코…… 이거 듣지 않게 해줘.”

“…….”

“아무 생각도 안 나도록.”

마르코의 입술이 귓바퀴를 훑는다. 귓불을 씹으며 진하게 빨았다.

말없이 계속 내려간다. 가지런한 목덜미를 타고 이내 옷깃을 벌렸다. 밀려 쓰러지는 옆으로 테사는 바닥을 짚는 팔을 본다. 잔뜩 핏줄 선…… 농밀한 숨결이 몰아쳤다.

원했듯 그를 제외한 세상이 곧 희미해졌다.

마르코의 잠자리 스타일은 농담으로도 젠틀하다곤 할 수 없다. 잘 다듬은 행동과 이성으로 억눌러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대해적. 뼛속 깊은 본능엔 야만인의 야성이 새겨져 있음을 누구도 부정치 못했다.

테사는 땀에 젖은 그의 금발을 쓸어 넘겼다. 사나운 숨을 몰아쉬며 마르코가 손길을 음미했다.

“……모르겠구만.”

“뭘?”

“왜 안고 있어도 참는 기분인지.”

턱에서 떨어진 땀이 테사의 쇄골 아래로 흘렀다. 마르코는 무심코 엄지로 그걸 문지른다. 갈증이 계속 났다.

석양이 어떻게 지고, 달이 언제 떴는지 모르겠다. 환기 때문에 열어둔 창가에서 흰 커튼이 나부꼈다. 월광엔 마력이 서린단 속설이 있다. 그 아래 엉키며 나눈 교감에도 섞였을지 모를 일이다.

잘 그을린 팔뚝이 테사를 당겨 안았다. 기운 빠진 몸이 힘없이 딸려왔다. 바로 더하면 짜증내겠지. 실소하며 마르코는 살결을 매만졌다.

“그만 만지든가, 담백하게 만지든가. 둘 중 하나라도 해요.”

“다른 거 제안해봐. 그거 빼곤 다 들어줄게.”

“……아 정말! 힘없어. 그, 야한 목소리도 그만해.”

이틀을 잠도 못 자고, 물 한 모금 못 마셨다고 했다. 관계 도중 목마르단 얘기에 몇 번이고 입으로 넘겨줬던 게 마르코는 떠올랐다.

마력 탈진이라 했던가…… 생소한 개념이긴 하나 대강 이해는 된다. 폭풍의 잔재는 아직도 타운에 일부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르코는 생각했다. 효력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아.”

테사가 위로 눈을 들었다. 반딧불처럼 청염이 내렸다. 드러난 어깨 위로 살며시 닿고. 손을 뻗자 손가락 위에서 녹듯이 사라진다.

불사조의 청염이었다. 재생을 돕는 불꽃.

월광과 청염. 그 속의 마술사. 마르코는 옆으로 팔을 괴며 감상했다. 테사가 돌아본다.

“악마의 열매는 자체 발현되는 능력인 줄만 알았는데. 외부에도 영향 주는 게 가능했어요?”

“이미 한 번 봤을 텐데.”

기억을 더듬는 테사. 마르코가 그 콧등을 살짝 퉁긴다. 이조 다쳤을 때, 보조로 계속 썼었잖아.

“각성. 힘이란 늘 위가 있는 법이지요이. 떨어지는데 바닥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 와 닿아 마술사는 물끄러미 해적을 본다. 땅이 아닌 바다 위의 그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바다나. 도약과 추락의 경계선이 희미하겠지.

단단하고 넓은 등이 다시 무게를 실어온다. 탄력적인 어깨로 팔을 두르며 테사가 읊조렸다.

“그래도 만약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진다면…….”

뒷말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흰 허벅지를 뭉근히 주무르던 마르코가 생각했다. 오늘의 연인은 안쓰러울 정도로 솔직하다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평화를 끌어 모아 덮어주고 싶은데.

눈물점을 한 번 문지른다. 입술이 맞닿은 채로 속삭였다. 걱정 마요이.

“그런 황홀한 바닥이라면 억울해서라도 거절 안 해.”

“……내가 무슨 말할지 들리기라도 해요?”

대답 없이 마르코는 턱을 기울인다. 각성 여파로 아직도 감각이 곤두선 상태인 테사가 잘게 몸서리쳤다. 대화는 사라진다.

노도가 다시 일었다. 갇힌 두 팔 안은 불구덩이 같다. 창밖으로 어스름이 몰려올 즈음에서야 끈질긴 정열이 가셨다. 긴 여운이 머무른다. 마르코가 소리 없이 입술을 묻었다. 테사.

그렇게 한 사람이 부르는 이름 속 결점 없는 평화.

자각 못 한 빈곳까지 전부 차오른다. 신이 인간을 결핍케 하기에 운명은 인연을 빚었다. 테사는 타인, 그러나 결코 타인은 아닐 사내를 바라본다.

어쩌면 첫 순간부터 알았을지도 몰라. 이 사람을 만나러 머나먼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 탓마저도 물론 했다. 허나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업보도, 무게도, 비명도, 잔상도, 고민도 전부 마르코로 인해 말소된다.

손가락 끝 경련도 어느덧 멎었다. 수마에 몸을 맡기며 마술사는 생각했다. 정말 당신만 있으면 돼.

지금 이 품보다 더한 가치는 없다. 설령 저울 반대편 위 오른 것이 세계일지라도, 이 명제만은 영원토록 불변하리…….

[작품후기]

“가본 장소”로 한정된 4급 공간이동은 움직이는 배 위 같은 명확한 좌표 없는 곳으론 이동 불가합니다 (거리 제한 있음)

p.s. 테사 프로필 갱신했습니다 작품 설정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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