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새들은 비틀린 폐곡선으로
(*1/3 연참)
20
사황의 동향을 살피는 감시선은 기록용 감시 전보벌레를 필수로 구비한다. 덕분에 커닝엄 해역에서 빚어진 재해는 해군 본부로 한 점 가감 없이 전달되었다. 고위 참모진 사이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불꽃이 튀었다. 수배 여부부터 현상금 금액까지 논쟁은 치열했다.
대참모 츠루는 잘 조경된 분재처럼 원수 앞에 앉아있었다.
걸친 정의 코트가 아니었다면 일견 인자해 보이는 이 여인이 해군의 전설이란 사실은 쉽게 파악키 어려울 것이다. 정적 가운데 따르는 찻소리만이 불협화음처럼 도드라진다. 츠루가 말했다.
“회유 실패에 대한 대가가 예상 범위보다 크군, 센고쿠.”
상냥한 어조지만, 질책에 가깝다. 일전부터 츠루는 해군의 브레인인 자신에게 언질 하나 없이 진행된 일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곤 했다.
건네받은 차가 무척 떫다. 센고쿠가 침음했다. 이 원수 또한 지난 실책을 인정하는 바였다. <불로불사>란 키워드가 가진 힘을 간과했음이다. 역사적으로 이에 눈독들이지 않은 위정자는 없었다. 설령 헛된 소문에 불과하더라도 불씨가 될 가능성 정도는 범주에 넣어두어야 했다.
“변명할 생각 없으니 지난 과오보다는 앞일에 집중해주게.”
“내 앞에서까지 점잔 떨 필요 없어. 이미 당신은 수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 않아?”
“츠루 너는 그 자가 회유될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보나.”
“희박한 건 사실이지.”
대참모가 현명한 눈동자로 보고서들을 훑었다. 사이퍼 폴, 요원 운데킴부터 커닝엄 해역 학살 최초 보고자 제수스 대령까지. 여러 장의 보고서들은 한 사람에 대한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간극이 컸다.
츠루는 소리 내어 가장 가까운 문장을 읽었다.
“<지옥과 악마는 실존한다. 본 요원의 능력으론 절대 파악 불가한 적으로 가능하면 포섭해야 할 것이고 불가할 경우 반드시 척살을 요함.>”
“그 정신 나간 놈의 것이로군.”
“저런, 센고쿠.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 아이도 불쌍한 아이야. 그렇지 않아도 격리 병동에 들어갔다고 하니 그만 잊어.”
요원 운데킴은 극심한 후유증을 호소했다. 사이퍼 폴에서도 첩보에 특화된 요원이 그렇게 망가져 소란을 벌이리라곤 예상 못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원수는 오로성과 긴 독대를 가졌으며 마술사에 대한 정보 등급이 극비로 격상되었다.
못마땅하게 찌푸리는 센고쿠 원수. 츠루가 이어 말했다.
“반면 제수스는 해적에 맞선 자경대 활동의 일종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다지. 맞서 싸운 민간인을 수배해선 안 된다고.”
“그 꽉 막힌 녀석은 내버려둬. 조만간 쿠잔 밑으로 보낼 생각이다.”
“좋은 생각이네. 둘은 제법 잘 맞을 거야…….”
각자 생각에 빠진 침묵이 감돈다. 두 사람은 차를 절반쯤 비워냈다. 먼저 말문을 연 건 다시 츠루였다.
“……센고쿠. 마술사란 아이는 신중한 편이다. 우리 쪽에서 판단을 유보할 동안 어떤 소란도 일으킨 적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
정신이 불완전한 와중에도 운데킴은 기억하는 모든 것을 보고했다. 그에 의하면 마술사는 본인을 해적도, 해군도 아닌 제3의 존재로 정의했다. 증명이라도 하듯 흰 수염 쪽과 친밀하긴 해도 단지 그뿐. 따로 승선해 접촉한 적도 없으며, 위험으로 판단될 만큼 자극적인 행동도 딱히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우연과 우연이 자아낸 이번 사건이 아니었다면 계속 조용히 지냈을 가능성도 무시 못 한다.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는 츠루. 센고쿠의 미간 골이 깊어졌다.
“네 말은…….”
“그래. 난 아직 가능성을 봐. 수배는 섣불러. 위쪽도 골치 아픈데 이 용광로에 불씨를 더할 필요가 있을까.”
대 해적 시대. 세계는 이미 어지럽다. 츠루가 창가 너머 광장, 또 그 너머의 바다를 바라본다. 이 고령의 대참모는 입대 이래 결코 전투를 두려워한 적 없으나 굳이 키울 필요가 없음도 잘 알았다.
마술사. 이 미지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지면 얼마나 더 많은 피가 뿌려질까. 불로불사는 그만큼 마력적인 단어였다. 윗선에 의해 인어 서넛이 암암리 실험됐다는 사실도 츠루는 최근 접해 들었다.
금방 헛됨을 알아 잠잠해지나 싶었으나…… 이젠 또 다르겠지.
마술사가 파악 불가의 힘을 지녔음이 확인됐으니 말이다. 그저 평범한 강자의 입에서 나온 말과 미지의 힘을 지닌 존재에게서 흘러나온 말. 둘의 무게는 엄연히 다를 것이다.
그동안이 호기심에 살짝 건드려본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부터가 본게임. 난전이 예상되는 만큼 참가자는 되도록 적은 편이 낫다.
“정말로, 반갑지 않은 등장이란 말이야…….”
신중한 대참모의 조언은 늘 가치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원수는 작은 중얼거림까지 새겨 듣는다. 고심하는 기색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만약 흰 수염 쪽으로 전향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될 거다. 판도 자체가 뒤흔들릴 위험도 있어.”
“벌써 네 달 아닌가? 흰 수염이 그 섬에 정박한 지도 그쯤 됐지. 그리고 그 아이는 여전히 해적이 아니고.”
“꽤 변호적이군.”
츠루가 미소 짓는다. 괜히 그러겠냐는 뜻이다. 센고쿠는 혀를 찼다. 지금 대참모가 하는 말은 존재를 묻어두고 다시 회유하자는 얘기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듣기도 곤란했다.
이미 위험성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번 수배가 유보되었던 인물. 게다가 이번엔 사건의 규모도 규모다. 군에서 마냥 침묵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수의 고민은 계속해서 길어진다. 그리고 찻잔의 온기가 완전히 식을 무렵 별안간 노크가 울렸다. 들어오는 건 사뭇 긴장된 안색의 수석 참모.
“무슨 일이지? 방해 말라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이 건은 예외로 받아보셔야 할 듯해서.”
살아있는 두 해군 전설의 시선. 안경 위로 원수가 눈썹을 치켜 든다. 젊은 참모는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오로성으로부터 호출이라 보고했다.
/
배고파요. 깨어나 테사가 처음 한 말이었다.
장장 하루에 걸친 긴 잠을 잤다. 불면을 덮은 숙면. 조금이라도 악몽이 끼어들려 하거든 서로의 체온과 숨소리가 밀어 감쌌다. 아주 오래 자고 일어난 기분이라고 테사는 생각했다.
허기는 제법 생경한 감각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반 범주에서 벗어난 마술사들은 신진대사의 일부도 마술이 대신한다. 영양 섭취를 아예 안 할 순 없지만, 보름 정도는 없이도 거뜬했다.
그렇게 오래 됐나? 무의식적으로 테사는 시간을 가늠하다가 관둔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 품으로 마술사는 파고들었다. “나 배고프다니까요.” 잠결에 마르코가 광대뼈 즈음 입술을 습관적으로 문질렀다.
“……그럴 리가. 어제 잔뜩 내껄.”
“아 거기까지! 그만.”
속에서부터 긁어내듯 꽉 잠긴 중저음. 귓가가 달아오른다. 내려찍는 테사의 팔꿈치에 마르코가 느릿느릿 잠이 덜 깬 눈을 떴다. 꽤 아픈데…….
“대우가 심하네. 불사조라도 안 아픈 게 아니구만.”
“일어나자마자 누가 헛소리하래?”
“꿈인 줄 알았지.”
테사가 자세를 틀었다. 누르듯 무게를 실어온다. 탄탄한 가슴 위로 뺨을 기댄 시선이 마르코에게로 쏟아진다. 농담하는 와중에도 마르코는 그 상태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다행히 컨디션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기다란 속눈썹의 움직임이 나긋하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마르코가 뭘 먹고 싶냐 물었다. 낮은 목소리는 다정하고, 느린 맥박은 평온하다. 옅은 홍조가 도는 뺨으로 테사가 키득거렸다.
“있으면 만들어주기라도 하게요? 요리사도 아니면서.”
“음, 아마 너 체스 때도 이 비슷한 뉘앙스였지요이.”
“설마 요리도 할 줄 안다고?”
마르코는 대답 없이 한 팔로 테사의 등을 받쳤다. 가뿐히 들어 눕히고 본인은 일어난다. 근육질의 등이 떨어진 바지를 주워 걸쳤다. 지퍼도 올리지 않은 채 대강 머릴 정리하며 걸어간다.
정말…… 뚫어져라 보던 테사가 눈가를 덮는다. 의술, 무투술, 항해술, 회계, 기초 학문 등등. 마르코란 해적의 삶은 타인이 평생에 걸쳐 이룩하는 하나들로 숱하게 도배되어 있다.
남들보다 할 줄 아는 게 배는 많은 사내. 그런 이가 걷는 삶은 몇 배나 더 치열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지 까마득했다. 이런 생각이 들면 테사는 마르코가 뭐든 능숙한 모습이 영 달갑지만은 않았다.
곧 고소한 냄새가 공방을 적신다. 어깨에 시트를 두르고 테사가 일어났다. 발에 닿는 대리석이 서늘했다.
한 손으로 팬을 젓던 마르코가 힐긋 돌아본다.
“더 누워있지. 왜 나와.”
“당신이 없어서요.”
담백한 투였으나 내용까지 그렇진 않았다. 근처 테이블에 앉아 테사가 턱을 괸다. 오로지 마르코의 곁에만 온기가 도는 듯했다. 마르코는 무언가 생각하다가 이내 능숙한 손길로 불을 줄였다.
완성된 건 우유를 넣은 포리지. 해적은 모르겠지만, 이 마술사의 고향 음식이기도 하다. 그릇을 내려둔 마르코가 테사의 무릎 뒤로 손을 넣었다.
“……이봐요, 해적. 사람을 너무 이리저리 들어 올린다고 생각 안 해요? 힘 자랑이라면 이미 충분하거든?”
“고맙네. 이렇게 가벼운 걸 들고도 어필이 되는구만.”
“이젠 물건 취급이다 이거죠.”
흘겨보는 테사에게 수저가 와 닿는다. 밀어내려 했으나 허기에 지고 만다. 못 이긴 척 받아먹는 입가를 문지르며 마르코가 씩 웃었다. 물건은 무슨. 애를 키워도 이거보단 덜한 정성일 텐데.
제 무릎 위 앉힌 몸이 싸늘했다. 마르코는 시트 안으로 살갗을 쓸었다. 마술사와 달리 활동량이 높은 해적은 기초 체온이 높았다. 금세 차오른 포만감과 타인의 온기. 테사 주변 공기가 노곤해진다.
평소보다 서늘한 공간이지만, 햇살이 빈자릴 메꿨다. 지저귀는 정오의 새소리와 함께 짧은 버드키스가 오갔다. 마르코. 테사는 해적의 두 뺨을 감싸 잡았다.
한없이 좁게 세상이 느껴진다.
나른한 시선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입안을 벌려왔다. 얽히는 혀끝으로 불은 순식간에 옮겨 붙는다. 긴 키스는 서로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금세 뜨거워진 하체를 맞대며 마르코가 테사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다소 거친 움직임에 벗겨진 시트와 그릇들이 부딪쳤다. 아슬아슬하게 탁자 끄트머리에 걸치더니, 추락한다.
챙! 부서진 파열음이 날카로웠지만, 신경 쓸 만큼은 아니었다. 마르코는 그렇게 여겼다. 허나 달랐다.
“……테사.”
바로 눈치 챌 만큼 이상은 확실했다. 맞닿은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금세 얼음장 같아진 두 팔이 마르코의 목 뒤를 두른다. 침묵하던 마르코가 말없이 테사를 안아들었다.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매달린 팔에 힘이 더 실린다. 마르코는 목소릴 더 낮춰 속삭였다. 그래, 나 여기 있구만. 괜찮아. 공방 내 온도가 또 하강한다. 파고드는 등을 다독이며 마르코가 침실로 걸어갔다.
엉망이 된 부엌. 쌀쌀한 바람이 훑고 떠난다. 닫힌 문은 다시 걸어 잠겼다. 마술사의 세상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몸이 추처럼 무겁다. 잠긴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밀어붙이는 사내의 열기와 강렬한 쾌감, 몇 번이고 손아귀를 핥던 혀만이 선명했다. 테사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며칠 째인지 모른다. 원래 시간관념이 부족한 마술사. 테사가 시간에 신경 쓸 때에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뿐이고, 지금은 곁에 있으니 굳이 필요 없었다.
오늘은 해풍에 실린 소금 내가 유독 짙었다. 테사는 창가 가까이를 내다본다. 멀리 분주한 인파. 그리고 보다 먼 곳의 해적기. 창틀을 살짝 움켜 쥔 테사가 고갤 저어 털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는 목소리들 속 익숙한 이름이 섞인다. 흰 수염…….
돌아왔구나. 흰 수염 해적단이.
마술사는 반사적으로 욕실을 돌아봤다. 아직 마르코는 씻고 있었다.
약속한 것처럼 관련해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던 둘. 비정상적임을 알지만, 정상적이고 싶은 마음도 딱히 없었다. 테사가 손을 뻗었다. 창을 닫으려는 의도였다.
“야!”
그리고 그걸 저지하는 친숙한 목소리. 모른 척하려 했으나 재차 외친다. “오라힐리 테사! 너 이거 안 열어?” 차분한 시선과 성난 시선. 위아래로 얽혀든다. 타운 내 마술사의 유일한 친구. 크라이튼 그웬이었다.
무한하나 잘 짜인 법칙과 행렬로 이루어진 정교한 세계. 그 속에서 인간은 항상 변수에 속한다. 거대한 흐름 안 제일 소란스러운 존재들.
다 들여다보이는 뻔한 앞날에도 불구하고 허를 찌르는 솜씨가 어찌나 훌륭한지. 지금 그웬의 반응 역시 그랬다. 테사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한 종류여서.
“내 말 듣고 있어?”
윽박지르듯 그웬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들이 선 곳은 공방의 문 앞. 넘어가려는 후드를 추스르며 테사가 그 어깰 가만히 밀어냈다.
“그래. 들었어. 걱정했다고.”
“너 알고 있을 거 아냐. 내가 밤새 여기 지켰던 것도. 그런데 어떻게 한 번을 나와 보질 않고. 괜찮아졌으면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그 정도 매너는 있어야지!”
“……몰랐어. 꽤 정신이 없었거든.”
“네가? 거짓말 하지 마.”
“그웬.”
몰랐던 건 사실이다. 무의식적으로 피했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웬이 왜 이러는지 테사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이러나 싶다가도, 안색이 살짝 초췌할 뿐 장난 섞어 타박하는 눈빛은 거짓 없이 깨끗했다.
“너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
무구하기까지 한 반문. 말문이 막힌다. 등 뒤로 손을 말아 쥔 테사가 화제를 돌렸다.
“밤새 여길 지켰다니. 왜 그랬어.”
“기억 안 나? 너 정말 상태 안 좋았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일이 마무리되고 해군들이 널 찾았는데 믿음이 가야 말이지. 네가 그렇게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그게 좋은 의도일지 어떻게 알아.”
“…….”
“네가 우릴 지켜줬는데 친구로서 그 정도도 못 할까. 안 그래?”
그웬이 활달한 투로 말을 이었다. 타운 사람들 모두 고마워하고 있다며. 조금 떨어진 발치를 가리키기도 했다. 그제야 테사는 공방 근처 놓인 꽃다발들을 발견한다. 많진 않지만, 그닥 적지도 않았다.
“……이게 뭐야.”
“뭐긴 너와 친한 사람들이 갖다 둔 거지. 이렇게 예쁜데 방치하기나 하고. 괜찮아졌으면 좀 나와 보지, 너도 참 너야.”
사건으로부터 엿새. 잠시 주둔했던 해군도 곧장 떠났으며 폭풍의 잔재는 파도에 실려 사라졌다. 긴장된 살얼음이 가시자 타운엔 일상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다시 술집을 찾고, 모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 틈에 마술사 얘기가 섞이는 것도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평소 자주 공방에 드나들던 단골들은 마술사가 좋아하는 꽃의 종류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무슨 의미로 이런 걸 갖다 놔.”
“테사, 무슨 의미긴…… 다들 고마워서.”
“고마워? 정말 그거뿐이라고?”
받아들이기 쉽지만은 않은 논조다. 테사의 말투가 절로 딱딱해진다. 뒤섞인 여러 종류 꽃다발. 인식하자 밀려드는 향의 수위가 지독했다. 테사가 냉소했다.
“팔백 명을 죽였어. 아니, 그보다 많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고맙기만 하다고? 진심이니?”
후드에 가린 표정은 다 드러나지 않았다. 서로에게 다행이었다. 정면에서 지금 마술사의 눈빛을 받았다면 둘 사이 어느 것도 더 이어지진 못했을 터다.
비로소 깨달은 눈치로 그웬이 주억였다. 뭘 얘기하는지 이제 알겠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확실히 넌 강해. 타운 사람들 모두 놀란 것도 사실이야. 몇몇 사람들은 분명, 그래. 두려워하기도 해. 하지만 뭐가 중요해. 그 사람들도 알아 우리가 네게 빚졌다는…….”
“아냐, 틀려.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야. ……내가 죽였잖아. 그웬, 이해가 안 돼? 내가 그 해적들을 다 죽였다고.”
“그래, 알아. 대단한 일이었어 정말. 주제도 모르고 흰 수염 영역에 쳐들어오더니 꼴좋지.”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너.
분명 마주보고 있는데도 각자 다른 공간에 유리돼있다. 전혀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웬의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으나 무엇보다도 테사에게 크게 들렸다. 신음이 새는 걸 테사는 억눌렀다.
비난받길 원함이 아니다. 다만 그웬의 맑은 눈에는 마술사를 향한 최소한의 거부감도 없었다. 정상인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오라힐리 테사와 크라이튼 그웬.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또래 두 사람.
살인에 대한 역치가 서로 완전히 달랐다. 테사가 지금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도 끔찍한 충격을 경험한 이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평생 총포와 살인을 곁에 두고 산 그웬에게 친구의 살인은 경악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강자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은 생길지언정 그뿐.
만약 해군이었다면 얘기가 좀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모거니아 해적. 것도 그들을 해치고자 찾아온 적이었다. 백 번 죽어 옳고, 죽으면 기뻐 축배를 들어야 마땅한.
평범한 이들조차 살인에 무감각한 야만의 시대. 그리고 그곳에 떨어진 유일한 현대인. 테사가 뒷걸음쳤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젊은 마술사는 퍼뜩 깨닫는다. 신세계? 미지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
조금도 즐거워할 일 따위가 아녔다. 마술사가 맞닥뜨린 이것은 단순한 시공간 이동이 아닌 여태껏 정립한 가치관과 삶에 대한 위협이었다.
이질감인지 공포인지 구분 불가하다. 기이했다. 테사는 그웬이 부르는 소릴 뒤로하고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술사를 덮친 혼란만큼 문은 거세고 굳게 닫혔다.
“테사?”
물기도 채 가시지 않은 마르코가 계단을 내려온다. 상태도 좋지 않은 애인이 대체 어딜 갔나 찾던 도중이다. “너 나갔다 왔어요이? 말을 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마르코. 멍하니 보던 테사가 이를 악물었다.
품으로 뛰어드는 마술사. 놀랄 만도 하건만 마르코는 무리 없이 받쳐 들 뿐이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테사의 숨이 가쁘다.
“무슨 일 있었구만.”
“아뇨. 아무것도 아냐.”
씻고 나온 마르코에겐 저와 같은 향이 났다. 테사는 급격히 안정을 되찾았다. 내려다보자 흔들림 없는 눈빛이 거기 있다. 어떤 풍랑에도 휩쓸림 없을.
차가운 흰 손이 해적의 무던한 눈매를 쓸었다. 마르코가 가만히 손길을 허용한다. 테사를 두른 공기가 다시 차분해졌다.
“한 팔로 무겁지도 않나 봐요. 이쪽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날 이렇게 애처럼 들어 올리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딴 놈한테 안겨봤단 소릴 내 품에서 태연하게 하네.”
“질투 같은 것도 할 줄 알아?”
“사랑 같은 것도 하니까.”
테사의 낯에 아주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그 얼굴. 마르코는 되새겼다. 아무도 나 같은 놈이 제 발로 이런 멍에를 짊어지리라 생각지 않겠지. 스스로마저 그랬다. 그럼에도 어쩌겠나.
이 압도적이고 지배적인 교감. 적당한 것으로 표현하려 애써봤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한낱 이 말에 가두기엔 서글퍼도 달리 이것밖에 없다.
“그 단어랑 진짜 안 어울려요.”
“안 어울리는 말을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비양심적인걸.”
“누군데요?”
마르코가 실소했다. 키스해 봐, 테사. 어련히 알게 될 테니.
마다할 이유 없다. 세상 모든 소음이 꺼트려졌다. 다른 건 죄다 무의미해지며 잊힌다.
정말 반칙 같은 이라고 테사는 생각한다. 실체 없는 이 감정은 상대의 존재를 보다 크게 하기도, 작게 하기도 한다던데…… 왜 눈앞 사내는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기만 한지.
이마가 먼저 닿는다. 요동치는 맥박에만 집중하며 테사는 고갤 더 기울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마르코가 손을 뻗는다. 흠뻑 쏟아지는 한 사람. 마치 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