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새들은 비틀린 폐곡선으로
♬ Amore - Ryuichi Sakamoto
23
대마술십계명大魔術十誡命
The Great Magick Decalogue
제1계, 마는 너를 인도하지 않으매 너 스스로 일어나라.
제2계, 관조하되 바라 간섭하여 소통하여라.
제3계, 삼라만상에 열을 세워 경시하지 말라.
제4계, 마술의 이름을 부당히 빌려 헛 맹세를 발하지 말라.
제5계, 너의 혈육과 스승과 우상을 해할 시 거짓 증참 말라.
제6계, 위로 아래로 너는 숭배의 자유를 갖되 다른 신앙을 모독 말라.
.
.
제10계, 시련에서 너의 마술을 의심과 배반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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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적막이 내려앉는다. 쇠한 조명과 온기 없는 공방은 바깥으로부터 줄어든 일조량에 따라 급히 음영을 드리웠다. 테사는 지금 이 순간 왜 불현듯 데칼로그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마술에 있어 최초와 마지막이 중하듯 십계명 또한 그렇다. 최초 1계와 마지막 10계는 절대 어겨선 아니 될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테사가 생각했다. 웃기지 마. 의심하거나 배반한 적 없어.
마술사는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분위기는 왜 또 그렇게 심각하고.”
“오라힐리 테사.”
구태여 캐묻지 않아도 타인이라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물며 눈앞 타인은 어느새 세계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이다. 마르코는 테사를 잘 알았다. 어떤 면에선 본인보다도 훨씬.
“눈 떠봐.”
“…….”
“눈 뜨고 나 봐.”
화를 내고 있나, 아니 슬퍼하고 있나? 테사는 혼란스러워 마르코를 살폈다. 못 들은 척하는 어깨를 울컥 움켜쥐려다가 마르코가 멈췄다. 대신 제 얼굴을 감싸 쥔 그는 이제 빌 듯이 애원한다. 눈 떠보라고, 테사…….
처절하기까지 한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찌할 바 모르고 테사는 입술만 깨물었다. 군중 한가운데서 잡은 손을 놓쳐버린 애처럼 식은땀이 났다. 마술사는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일시적인 거예요.”
“…….”
“정말이야. 잠깐, 정말 잠깐…….”
사실 테사도 모른다. 생각도 안 하고 있었고, 자각조차 마르코의 물음으로 인해서였다. 말하는 와중에도 테사는 계속해서 <마술사의 눈>을 뜨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배운 것 따위가 아니다. 눈은 정말로 눈이다. 누구도 의식적으로 눈뜨는 방법 같은 걸 따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오라힐리 테사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마술사였다. 그런데 왜…… 뭐지? 테사의 등골이 송연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마르코가 지켜보고 있었다.
“똑바로 말해, 테사. 회피하지 말고. 여기서 더 도망칠 순 없어.”
“다그치지 마! 누구 보고 도망쳤대!”
울컥한 테사가 발작적으로 마르코를 밀쳤다. 평소라면 얼마든지 밀려났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피하는 테사의 팔뚝을 잡아 붙들었다.
“그만 받아들여……!”
벼락같이 테사가 굳는다. 마르코가 큰 소리를 내는 건 진실로 최초였다.
마술사가 함께 겪은 이 수개월뿐만 아니라 마르코 인생을 통틀어서도 드문 일이었다. 수십 년간 담금질한 부동심이 오간 데 없다. 마르코가 다시 제대로 테사를 돌려세웠다. 테사는 이제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마르코는 화내고 있다.
“그래. 너 도망쳤어. 그날 이후 계속 그랬고, 방금도. 내가 그 개 같은 제안을 너한테 건넨 지 오 분이나 지났나? 십 분이나 지났냐고. 그런데 배를 타? 네 인생을 덜컥 떠넘기듯 그렇게 나한테 주겠다고, 그걸 내가!”
“…….”
“……현실을 외면하고, 나 같은 놈을 도피처로 삼아도. 아무 말 안 했구만. 내가 뭘 해. 테사, 내가 뭘 할까. 널 이 진창으로 끌어들인 것도 나고, 다 내 탓인데.”
“…….”
“그런데 그 결과가 또 널 망치는 거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잔인하고 가여운 내 사랑아. 이건 너와 나, 우리한테 너무 가혹하잖아.
무릎이 깨져라 수만 번 밑바닥 치며 두른 갑옷이 바스라진다. 형언 불가한 격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테사는 붉어지는 마르코의 눈가를 본다.
무너진다. 여기 눈앞에서, 한 명의 사람이 무너지고 있었다.
얼굴을 쓸어내려 감춘 마르코가 잠긴 목소리로 뒤 돌았다. 내일 다시 얘기해. 지금은…… 안 되겠다.
그토록 단단하고 컸던 어깨고, 등이다. 테사는 마르코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무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정말로 도망쳤나? 내가 정말로 그를 도피처로 삼았나.
“……그러면 왜 안 돼?”
“…….”
“왜 안 되냐고!”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사나운 감정의 파도였다. 마르코가 가던 발걸음을 돌린다. 건조하고 피로에 찬 얼굴. 테사는 감정적으로, 또 충동적으로 소릴 높였다.
“다 너 때문이잖아, 다 너희들 때문에! 사람 수백을 죽이고 내가 그럼 멀쩡할 줄 알았니? 제정신일 거라고 기대했어?”
“…….”
“그럼 미안해, 실망시켜서 미안하게 됐네! 그런데 너 같은 야만인이, 너희들 같은 야만인들이 뭘 얼마나 대단히 기대하셨는지 몰라도 이쪽은, 이쪽은! 나는, 난…….”
목이 졸린 듯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테사는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난 그냥 보통 사람이라서……!”
아직도 눈 감으면 당시 일이 선명하다. 검푸른 바다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파편에 조각나는 시체들, 물에 찬 폐로 헐떡이며 신과 사랑하는 이름들을 부르짖으며 죽어가던 비명, 또 비명…….
원인? 명분? 조금도 와 닿지 않았다. 죽음은 보다 잔혹하고 보다 본질적인 무엇이었다. 원초적인 공포이기에 인간 깊은 곳을 파괴하고 헤집었다.
다가온 마르코가 손닿는 거리에 있었다. 묵묵히 내려다본다. 그 시선에 또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테사는 울컥해 그 어깨를 밀친다. 때렸다. 감정을 실었다.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네 탓, 네 책임으로 돌리라고? 내가 말했지! 그게 될 것 같냐고, 그게 가능하겠냐고! 안 돼, 못 하겠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그래서 그냥 다 눈감고 그래, 당신만 보기로 했어. 누군가를 죽이는 마술 따위보다 너만 있으면 된다고, 난 너만 있으면 다 필요 없다고!”
한낱 도피처가 아니다. 둥지였다. 새로운 세계로 삼았다.
홀로 서는 것만이 당연했던 마술사의 인생. 이전 세상에서도, 그 어떤 곳에서도 테사는 마르코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마르코만큼 있는 그대로 감싸 안아준 품이 없었다.
온전히 이해받고, 온전히 위로받는다. 어딘가 기댈 수 있고, 의지한다는 게 이리 안락한 줄 테사는 여태 몰랐다. 멀쩡한 정신으로도 매료될 정도인데 하물며 물에 빠진 이에게 내밀어진 단 하나의 동아줄.
저것만 잡으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욕심났을 뿐이다. 죽을 만큼 탐이 나는데 가져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거기에 매몰된 것이 잘못인가? 다 저버려도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그토록 죄가 되는가!
테사의 날선 눈가도 시큰해지기 시작했다. 억울하고 서러워 머릿속이 타들어갔다. 쥔 주먹이 아플 때까지 테사가 마르코를 때렸다. 마르코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있었다.
“그게 왜! 왜, 뭐가 잘못인데! 마음대로 하라며!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너 자신까지 망쳐도 된다고 한 적 없어.”
악쓰는 테사에게서 마르코는 눈을 떼지 않았다. 가까스로 끄집어낸 목소리가 무겁지만, 어조만은 단호했다. 일절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화내도, 울어도 안 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 꼴은 못 봐.”
“…….”
“얼마든지 도피처 삼아도 돼. 도망쳐도 괜찮아. 그런 걸 안 된다고 한 게 아니란 걸 너 알아들었잖아.”
“……아냐, 몰라요. 모르겠다고.”
“그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말해줄까.”
“…….”
“날 망쳐도 넌 망가져선 안 되고, 나를 무너트려도 널 무너트려선 안 돼. 내가 죽어도 넌 못 죽고, 돌아 미쳐도 나 혼자 미치지 같이 안 미쳐. 죽어 지옥에 떨어져도 넌 천국까지 내가 밀어 넣을 거다. 아직도 모르겠어?”
개인의 모든 이기심을 버렸기에 역설적으로 이기심의 산물이 되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해도 좋다. 고르고 골라 이딴 새끼를 사랑하게 됐다고 수만 번 후회해도 옳다. 어차피 마르코는 테사의 후회까지 떠안을 각오로 이 모든 걸 시작했다. 그 각오와 맹세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시작도 없었다.
멍하니 테사가 올려다본다. 마르코는 쥔 주먹을 조심히 풀어주었다. 제 어깨의 아픔보다 눈앞 빨개진 손등이 신경 쓰였다. 테사가 중얼거린다. “진짜 나쁜 새끼…….” 듣는 마르코는 그저 담담했다.
죽어도 지옥에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을 연인. 받아낼 뿐 바라지 않는다. 테사가 쉰 소리로 노려봤다.
“이딴 방식으로 사랑하는 건 죄인들이나 해. 원한 적도 없고, 고맙지도 않아. 혼자 희생하면 좋니? 만족해?”
“만족이라…… 사치스러운 얘길 하는구만.”
혀가 씁쓸했다. 테사와 관련해 이 해적은 욕심을 딱 두 번 부려봤다. 하나는 가지면 반드시 잃게 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임을 알면서도 무시한 것, 또 하나는 견디다 못해 나온 방금 전의 충동적 제안.
그리고 욕심을 못 이기고 뜬 숟갈은 되려 허기를 더 들쑤실 뿐이란 걸 재차 깨달았다. 잡념과 감정을 밀어 가라앉힌 마르코의 낯이 차분하다. 마르코는 치료 도구를 찾아와 테사 무릎 가에 수그렸다.
숙련된 손길이 조각을 빼내고, 소독하고 치료할 동안 아무 얘기도 오가지 않았다. 붕대를 다 감은 마르코가 정리하며 일어난다. 진창이 된 속과 별개로 이성은 어느 때보다도 냉정했다.
“<에고> 문제인 거지요이.”
“……!”
정확히 핵심을 짚어낼 만큼.
테사가 종종 했던 얘기들은 모두 빠짐없이 마르코 기억 속에 있다. 마술의 원리는 몰라도 이들이 세계와 소통하며, <증명>이란 과정을 거친다는 것쯤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저버릴 때 세계도 그들을 저버리므로 본인의 존재를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도 분명한 인과이기에 유추된 결론도 잔인할 정도로 간단했다.
마르코가 테사를 올려다본다. 한쪽 무릎 꿇은 채로 고했다.
“나네. 전부 나 때문이야.”
“마르코, 제발…….”
“널 위해서 감싸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널 흐리게 했어.”
실소밖에 안 나온다.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으나 결국 네 시련이자 가장 큰 걸림돌밖에 되지 못했다.
어떤 선고도 이보다 무자비하며 잔혹하지 않으리라.
마르코는 처음 테사가 그 앞에서 눈을 뜬 순간을 잊지 않았다. 창공에 드리운 어떤 장막보다도 눈부신 별의 물결이 거기 있었다. 그걸 내 손으로 꺼트렸다니…… 이 어찌나 우스운지.
수많은 책들이 논했다. 아무리 총명한 이라도 사랑에 빠지면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어있다고. 너와 내가 살아 손수 그 증명이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마르코가 테사의 두 손을 부여잡는다. 거기에 이마를 대자 더 이상 해적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테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일시적인 거라고 했지. 솔직히 말해줘. 확실해?”
“…….”
“테사.”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거 같아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마술이 내가 배신했다고 인식한 모양인데, 그것만 바로잡으면…… 네, 괜찮아요. 마력도 아예 사라진 게 아니라 일부 남아있고.”
그래. 그걸로 됐다. 일어난 마르코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테사는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걷잡을 새 없이 마르코가 말한다.
“다 바로잡으면 돼. 너도, 네 마술도, 너한테 건넨 최악의 제안도.”
“마르코. 잠깐만.”
담담한 태도로 마르코가 문가에 두었던 해도와 로그를 가져왔다. 한순간 충동은 모두 가셨다. 마르코는 자조했다. 원래, 어차피 이럴 생각으로 왔다. 달라지는 건 없다.
“이게…… 뭐예요?”
“기억해. 모레 새벽 우리가 떠나면, 정박했던 해안가로 갤리선 하나가 밀항할 거다. 다음날 같은 시각. 목적지는 아버지의 고향 섬이고, 철저하게 숨기고 보호 중인 곳이니까.”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해군은 우리가 알아서 따돌릴 테니 신경 안 써도 돼. 거긴 바인브릿지 타운보다 평화로운 곳이니 적응하기도 좋겠지. 아무 문제없이 거기서 몸 회복하고 네 인생을.”
짝! 마르코의 뺨이 돌아갔다. 얼얼한 손바닥을 무시하고 테사가 그 멱살을 낚아채 당겼다. 뜨거워진 속에 숨이 절로 가빠졌다.
“계속 말해봐. 이 개자식아.”
“…….”
“……안 돼. 아니야. 이러지 마요. 배에 타겠다고 했잖아. 바다로 같이 가겠다고. 당신, 아니 됐어 내가 선장과 만나게 해줘요. 당신 같은 사람이랑 무슨 대화를 해. 넌 어차피 다 네 마음대로만 할 텐데!”
“…….”
“마르코…….”
“…….”
“자기야, 나 좀 봐. 나 괜찮아 정말로…….”
이거 아니야. 당신이 아무리 현명해도 지금은 실수다. 이럴 순 없어. 테사는 평소처럼 명료하고 냉정히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갈수록 말끝이 흐리고 갈라졌다.
내일 없는 내일. 분명 우리는 상실을 약속하고 시작했다.
언젠가 맞이할 이별까지 동시에 받아들인 시작이었음을 부정하진 않겠다. 허나 이렇게 빨리, 이런 식의 종말인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테사가 얼굴을 감싸 파묻었다. 왜 이리 된 건지 모르겠다. 침묵하던 마르코가 한쪽 손을 당겨 내렸다.
그리고 테사의 손바닥 깊이, 아주 오랜 키스를 남기고…… 돌아선다. 떠났다. 공방에 남겨진 것은 오직 마술사 혼자였다.
‘놔! 저 자식은 날 배신했어, 배신했다고!’
‘진정해, 솔토. 이미 다 끝났어. 원로회에서 축출로 결정 끝났다고, 네가 이런다고 달라지지 않아! 이봐, 누가 솔토를 방으로 데려가라.’
오래되고 유서 깊은 귀족 가문들이 대개 그러하듯 오라힐리 계보에도 지워진 이름들이 숱하게 많다. 경우는 몹시 다양하나 보통 한 갈래 이유로 통일되었다.
<이 자는 더 이상 마술사가 아님.>
숙부의 파트너도 그랬다. 테사는 그날 그 장면을 기억한다.
오스틴 오라힐리, 숙부 솔토의 동성 파트너. 사우스 런던 출신의 미들 클래스 청년은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제를 몰며 오라힐리 가문에 입적되었다. 거기엔 숙부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고, 그들의 이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는 책과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작만큼 끝도 아름답진 않았다. 오스틴은 심각한 헤로인 중독자였다. 솔토와 만나며 완전히 클린해졌다고 주장했으나 대다수 중독자들처럼 끊이지 않는 도돌이표로 빨려 들어갔다.
어떤 새벽, 런던 동부 모 회원제 클럽에서 드러그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 간 오스틴에게 마술은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 원로들의 아슬아슬하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오스틴이 오라힐리 대저택에서 쫓겨 추방되던 날, 솔토는 오열하며 절규했다.
‘죽는 날까지 널 저주하고 원망할 거다, 오스틴 채드윅!’
울부짖는 숙부는 마치 생채로 가죽이 벗겨진 짐승 같았다. 함께 있던 이모 딤프나가 테사의 눈을 가려주었다.
‘겁낼 필요 없어, 킨. 솔토는 그저 아프고 아주 슬퍼서 저러는 거야.’
‘알아요. 단지…… 숙부가. 오스틴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그러게. 정말로. 나쁘지.’
멀리 시종들에게 부축 받는 제 형제를 딤프나가 응시했다.
‘오스틴은 몰랐던 거지. <우리>가 되면 삶은 개인 한 명만의 몫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삶까지 함께 가는 건데…….’
딤프나는 말했다. 둘이란 관계는 그렇기에 매혹적이지만, 무섭기도 하다고. 모든 순간을 누군가와 공존함에 더는 완전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비극도 희극도 늘 함께하기에 각자의 삶을 지켜낼 의무마저 지닌다.
내가 <우리>가 되는 무게란…… 그러했다.
당시 막연하기만 했던 대화를 테사는 곱씹고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케케묵은 기억인데도 기다렸다는 듯 튀어 나왔다. 오늘날까지 테사는 한때 오스틴 채드윅이었던 오스틴 오라힐리가 더 이상 마술사가 되지 못한 것이 마약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틀렸구나. 테사는 깨닫는다.
마약은 핵심이 아니었다. 오스틴은 스스로를 저버렸기에, 마술을 잃고 또 솔토 숙부를 상실케 된 것이다.
여명이 뜨고 있었다. 두 번째 여명이다. 생각 속에 갇혀 하루를 꼬박 흘려보내고, 다시 하루…… 멍하니 바라보던 마술사가 번뜩 일어났다. 모레 새벽!
“안 돼…….”
흰 수염 해적단이 출항한다는 시간이다. 테사는 무작정 달려 나갔다. 이대로 마르코를 떠나보낼 순 없었다.
야만의 시대. 대 해적 시대라는 잔혹한 낭만 아래 하루에도 수천의 선박들이 바다로 향하고, 인명은 무덤 없이 파도에 삼켜진다. 남는 것은 이름뿐이요, 남겨진 것은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
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공방에서 해안가로 가기 위해선 바인브릿지를 지나야 했다. 토착민들이 최초로 정착할 때 이미 존재했다는 이 금색 다리엔 얽힌 전설이 있다.
신새벽 여명이 다리에 닿아 강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 온 세상은 붉고 푸르러 세계가 닫히고 또 열리리라.
찢긴 발바닥은 딛을 때마다 고통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테사는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몇 번이고 마술을 쓰고자 했지만, 술식과 마력을 끌어 모아도 금세 흩어졌다.
끔찍하리만치 무력하다. 마술 없는 마술사란 그런 존재였다. 멀리 아직 해적기가 보인다는 게 유일한 희망. 하지만 너무도 조용했고, 테사는 그들의 출항이 임박했음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에 막 다다를 무렵, 건너편 끄트머리 너머. 마침내…… 친애하는 해적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테사는 몰아쉰다. 비명지르는 허파가 그녀 또한 한 명의 인간에 불구함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천천히 걸어간 테사가 마르코 앞에 멈춰 선다.
우두커니 선 해적의 등 뒤에는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박을 위한 밧줄도, 내려두었던 짐들도 모두 갑판 위로 올랐다. 오로지 출항 준비를 마친 해적선만이 있었다.
“끝까지 답지 않게 구는구만. 인사를 하러 오다니.”
“당신은 그럼 왜 여기 나와 있는데요?”
“……그러게.”
마르코가 쓴웃음 지었다. 이성을 들이대봤자 무슨 소용일까.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인데. 행동이란 건 늘 말보다 솔직했다.
할 말이 있는데, 분명 그랬는데 그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힌다. 테사가 입술을 달싹인다. 땀으로 젖은 이마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마르코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떼어낸다.
“하지 마.”
“…….”
“다정하지 마. 갈 거잖아. 버리고 갈 거면서 왜 다정하게 굴어?”
“……버려?”
“…….”
“내가 널?”
순간 치미는 것에 마르코의 미간이 이지러진다. 그러나 금세 다시 가다듬는다. 무거운 눈빛만이 남는다. 테사는 정말로, 이게 싫었다.
“……또 참지. 또 그렇지. 어쩔 수 없다고 그딴 얼굴 좀 집어치워! 혼자 체념하고, 혼자서만 어른인 척, 네가 뭐 그렇게 잘났고,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
“작별 인사? 그딴 걸 내가 정말 할 거 같아요?”
하려던 말은 결국 하나다. 테사가 마르코의 옷깃을 움켜쥔다. 익숙한 체온, 익숙한 체향, 익숙한 품. 전부 제 것이었던……. 낯선 감각이 속 깊은 데서 치고 오른다. 목이 메었다.
“……가지 마.”
“…….”
“내가, 나약해서 미안해. 나도 이제 다 알아. 계속 반, 성했어요. 당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힘들다고 내가 나를 놓아버렸어. 날 지키지 못하고…….”
목소리가 계속 끊긴다. 테사는 울고 있었다.
“……테사.”
“같이 하자고 한 주제에…… 기대기만 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당신이 얼마나 힘들, 었을지 너무 늦었지만, 이젠 알아요. 나 알아. 그니, 까 제발…….”
슬픈 운명을 타고난 수요일의 아이.
울고 주저앉아 있기엔 삶이 너무도 모질어서 모친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이었다. 아이처럼 흐느끼며 테사가 두 뺨을 문지른다. 낯선 서글픔을 어찌할 바 몰라 손이 덜덜 떨렸다.
“당신 가족들, 형제, 들…… 다 포기하란 말 아냐.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지만요. 나도, 중요, 중요하잖아. 마르코.”
“…….”
“알려주기라도 해……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나보다 어른인 척, 인생 다 산 척, 온갖 잘난 척은 혼자 다 했잖아.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도 알려줘 봐.
참았던 걸 모두 쏟아내는 울음이다. 정면에서 마르코는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테사가 운다. 흰 뺨이 빨개지도록 온 얼굴이 젖은 채로.
“네가…… 네가 뭐가 미안해.”
나오는 말은 차라리 신음에 가까웠다. 힘들어 하는 걸 볼 때마다 마르코도 종종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차라리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욱여넣고 참기만 하는 모습이 눈에 박히듯 안쓰러워서.
나는 왜 끝까지 너에 관해서는 이다지도 어리석기만 한지.
여기서 얠 안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테사가 너무도 겁에 질려 그를 찾아서…… 떨리는 팔로 마르코가 테사를 껴안았다. 제발 울지 마.
“잘못한 거 없어, 너는. 단지 내가…… 해적이라.”
“…….”
“평생을 빌어도 안 될 죄를 졌구만. 나 같은 새끼가, 감히 너를 욕심내서…….”
비는 건 나여야만 하는데 어쩌자고 네가 빌어. 대체 어쩌자고.
칼로 뱃속을 헤집는 기분이다. 황망하고 죄스러워 신조차 찾지 못하겠다.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테사를 감싸 안은 마르코의 어깨가 떨린다. 이 해적의 무너짐은 언제나 소리가 없었다.
울지 말란 말이 우습다. 누가 누구한테. 테사는 그를 잡아 끌어내렸다.
마지막 키스는 길고 애달팠다. 콧등과 뺨, 턱이 닿을 때마다 서로의 눈물이 느껴졌다. 형편없이 비참했다. 마르코가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탄식했다.
둘만의 세계. 마르코 또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감당 못 할 압력으로 무너지는 세계에서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신이 아닌 이를 숭배한 잘못에 내리는 벌이라면 박수를 보낸다. 이보다 성공적일 수 없었다.
“……매일 밤마다 널 갖는 꿈을 꿨지. 우습게도.”
해적이니까 갖고 싶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가질 수도 있었다. 한 사람 앞에서만큼은 결코 해적일 수만 없던 모순만 아니었더라면.
목소리가 잠겨 갈라진다. 마르코는 테사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내가 널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알아.”
“…….”
“그래도, 오라힐리 테사.”
“…….”
“앞으로의 내 인생은, 오로지 네가 준 순간들로 버티는 삶이고. 난 널 가질 수 없어도…… 넌 그렇게 죽는 날까지 나를 갖게 되겠지.”
영원을 기약하지 못한다면 그와 가장 가깝게라도 손에 쥐어주겠다. 대해가 아무리 애써도 내 육신밖에 삼키지 못할 것이다. 이 눈먼 마음은 모조리 네게 내던졌으니.
그렇게 해적의 맹세. 테사는 숨쉬기가 힘겨웠다. 빌어먹을, 그만 좀 울어. 이 사람을 봐둬야 해. 기억해 원망이라도 하도록 똑똑히 새겨둬야 한다고.
그러나 도무지 멎질 않아서. 뺨에 닿는 정인의 입술을 느끼며 테사가 옷깃을 부여잡았다.
“이딴, 말이 뭘 할 수 있는데……! 정작 당신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다 잊을 거야. 잊어버릴 거라고요…….”
“잊어도 돼. 네 인생의 지나간 발판이 된다면 내게 그만한 축복도 없을 테니.”
듣기 싫다. 테사가 끅끅 울며 고갤 흔들었다. 마르코는 쓰게 웃는다.
“이런 마지막이라…….”
“…….”
“고작 이런 사랑이라, 정말.”
마지막 고백이자 사과는 테사에게만 들렸다.
마르코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뗀다. 테사가 끝끝내 보지 않길 바랐던 해적의 등이었다. 수평선 쪽으로 홀연히 떠나 다신 돌아오지 않는…….
아무나 제발. 부탁할게.
내게서 저 사람을 앗아선 안 된다. 이건 악몽이다. 테사는 생각했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고, 저 모습이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동시에 이 마술사는 또 생각했다. 종장까지 과오를 되풀이할 수 없다. 테사는 무너지려는 무릎에 힘을 준다. 버티고 서서 불렀다.
“마르코!”
“…….”
“난 후회 안 해. 후회까지 해서 잘난 당신한테 명분을 더 얹어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랬으면 해. 나는, 난 정말 잊을 거니까. 당신이 평생 그럴 수 없을 동안, 천천히 잊어서. 다 잊고, 절대 추억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을 거야…….”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바람이 옅다. 그러나 아주 옅을 뿐, 불고 있다. 테사는 천천히 눈을 뜬다. 마술회로가 미약하지만, 비로소 가동한다. 억지로 일깨운 탓에 온몸이 떨려왔다.
경련하는 팔로 테사는 바람을 그러쥐었다. 날을 세워 목 쪽으로 향했다.
“……너 뭐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이게 마지막이니까.”
발개진 눈가는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심호흡과 함께 테사가 그대로 머리카락을 끊어냈다.
“테사!”
“그대로 있어요! 방해, 돼.”
짧아진 머리카락이 젖은 뺨에 들러붙는다.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다. 젊은 마술사는 집중해 바닥난 마력을 샅샅이 긁어모은다.
그래. 세계여, 마술이여, 옳다. 나는 데칼로그를 어겼다. 시련 앞에서 의심했고, 배반했으며 나 자신을 저버렸음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마술사다.
이 내가 마술사인 한, 너는 반드시 나의 염원에 응답해야 함을.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계속 가로지른다. 테사가 다시 눈을 떴다. 원하는 것은 세계에게 요구하는 마술사의 성스러운 제의. 대상은…….
신세계, 단 하나뿐인 내 사람.
다채로운 여명이 온 사위를 적신다. 바다와 해적을 향해 마술사가 손을 내밀었다. 잘려나간 테사의 머리카락이 빛 조각으로 화해 흩날린다.
“당신께…… 나의 일부를 드리니.”
치미는 것들을 삼키고 마술사는 혼신으로 기원했다.
“이 목숨 다 하는 날까지 그대 영광되고 축복되어라.”
그것이 진실로 마지막. 이런 종장에서마저 결국 서로를 향한 고백이었다.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간다. 여린 바람 속에서 두 연인은 한참 마주 바라봤다.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누구도 침범 못 할 그들만의 찰나였다.
시대와 세계가 빚어낸 우연의 교차점에서 맞닥뜨린 인연. 힘들게 만난 만큼 더 버거운 사랑을 했다.
해적과 마술사. 마술사와 해적. 이내 누구랄 것 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선다. 바다로, 육지로. 자꾸만 꺾이려는 무릎과 미어지는 속을 애써 외면하면서.
다시 뒤돌아보는 일은 그 어느 쪽에서도 없었다.
/
해적은 갑판 위로 올랐다. 가까이 파도 소리가 들린다.
기이한 정적이 모비딕 호를 물들이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나지 않았다.
출항 준비가 다 끝난 이른 새벽. 닻을 거두기 직전, 1번대 대장이 돌발적으로 하선했다. 당황한 1번대가 쫓아가려고 했으나 대장들이 저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파악치 못했으나 곧 바인브릿지의 마술사가 나타나며 정리됐다.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란 게 있다. 해적들에겐 필연적으로 친숙한 장면이기도 했다. 육지에서의 헤어짐.
정말 철저한 사내가 아닐 수 없다. 타운에서 정박한 지 수개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던 관계.
물밑으로 쉬쉬하던 소문은 그렇게 끝자락에서 이르러서야 진위를 드러냈다. 침묵하는 크루들 가운데서 마르코가 말했다.
“출항해.”
그래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자 대장 두엇이 거든다. 출항한다! 수개의 세일이 동시에 펄럭이며 떨어졌다. 바람 앞 흰 돛들이 웅장한 날개를 펼친다.
대 흰 수염 해적단, 출항.
새벽을 깨는 거동에 새들이 일제히 비상한다. 마르코는 그들이 그리는 폐곡선을 보다가 돌아섰다. 가까운 친우가 그 뒤를 쫓는다.
“……이럴 필요까지 있나?”
“…….”
“제3자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만. 너 전혀 괜찮지 않잖아. 어제도 내내 얼굴도 안 보더니 이런 식으로 급하게.”
“관둬, 삿치.”
심란한 얼굴로 삿치는 입안 살을 씹었다. 그래. 이젠 늦었다는 걸 안다. 그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안타까워 그렇다. 삿치가 다가가 마르코의 어깨를 세게 한번 쥐었다.
“……조금만 울어라. 네 형제들이 뒤에 있잖아.”
활짝 펼친 돛의 그늘이 드리운다. 그 그림자 위로 더 짙은 눈물이 떨어졌다. 형제의 옆에서 삿치는 조용히 팔짱끼고 기대섰다. 마르코가 신음했다.
“처음으로, 해적인 게 후회됐다.”
“…….”
“배에서 내리고 싶다고…… 그런 생각마저 들었어.”
지났기에 겨우 뱉어볼 수 있는 본심이고, 다 지나버렸기에 어떤 의미도 없었다. 얘기는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선체를 떠미는 파도가 대신해서 우짖는다.
섬이 점점 멀어졌다. 바람의 세기가 거칠어진다. 자력 범위에서 벗어난 해류와 기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르코는 다시 항로를 바라본다. 더없이 일상적인 위대한 항로. 또 신세계. 또다시 이 바다.
해적이 계속 살아갈 현실이었다. 전조 없는 비가 하나둘 빗발쳤다. 그리고 해적은 선택한다. 후회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자고.
모비딕 호. 불사조가 날아오른다.
휘날리는 졸리 로저 더 높이, 바람과 빗속으로. 적들을 두렵게, 아군을 우러러보도록 하는 청염이 그렇게 바다로 사황의 출항을 공표했다.
/
짧아진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를 스친다. 주기도문을 외듯 테사가 읊조렸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였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다친 발이 결국 마술사를 고꾸라지게 한다. 바인브릿지를 다 건넌 테사가 그대로 넘어졌다. 뱃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정적만이 남았다. 떨어진 눈물이 뚝뚝 땅 위로 엉긴다.
처참하다. 테사는 생각했다.
서로를 위한 이별이라니 머리론 이해해도 마음까지 설득될 리 없었다. 그저 더 간절하고 절박하게 빌고 싶기만 했다. 가지 말라고, 당신뿐인 날 두고 가지 말라 애원하고 싶었다. 주변이 끔찍하게 고요하다. 텅 빈 탓에 마술사의 오열은 처절한 크기로 울렸다.
어린애처럼 테사는 소리 내어 흐느꼈다. 이런 게 어딨어. 죽지 않을 거면 죽을 만큼 슬프지도 말아야지.
정말로 모든 게 엉망이었다. 야만의 시대가 젊은 마술사를 할퀴고 난도질낸다. 손끝에서 마술이 떠나는 게 느껴졌다. 억지로 끌어 쓴 반발로 속에서부터 비린 맛이 울컥 치솟았다.
“아 안 돼, 안 돼…… 너까지 날 저버릴 순 없어.”
배반의 값을 치러야한다면 충분히 넘치도록 치렀다. 두 사람 분의 마음을 찢어발기고 얻은 대가가 고작 이거라니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두 발 딛고 살아가야 해. 되도록 멀쩡하고, 온전히 살아가야만 돼.
그게 그 사람에 대한 예의이자 유일한 복수일 것이다. 테사는 젖은 땅을 움켜쥔다. 손톱이 부러지도록 악쓰며 붙들었다.
응답해, 제발! 너밖에 없어. 정말로 너밖에 없다고.
한 발 물러날 데 없다. 독기에 찬 마술사의 분노가 결연하게 세계를 향했다. 이 비극에 잘잘못을 따지자면 마술도 책임이 있었다. 너는 나를 이곳에 데려와, 내 목에 멍에를 채우고, 꿇려 좌절토록 했지.
마술이여, 우린 동등한 피해자이며 가해자일 터.
내 꼴이 비참하다한들 너 혼자 도망치도록 안 둔다. 의심하고 배반했으면 뭐. 테사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그치고 심장을 차게 식혔다.
수백 번, 수천 번 어디 부정해봐.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마술사야. 이 명제는 절대적이다.
얼마든지 목발로 짚고, 얼마든지 무기로 삼아 아득바득 일어나 홀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정녕 나의 일부이자 전체라면 그만 닥치고 나를 따라……!
얌전하던 미풍이 이를 드러냈다. 점점 세기를 더해 사나워진다. 매섭게 일며 마술사 주변에서 우짖었다.
테사가 신음하며 허릴 꺾었다. 완벽한 상실. 바로 이 순간, 마술사는 완전히 마술이 제게서 떠났음을 깨닫는다. 허나 다시 눈을 치켜뜨자…… 곧 모든 것이 바뀌었다.
‘원초의 길. 오로지 본능으로 이르기에 무엇보다 마술적이기도 하지. 다들 비난하지만, 거기엔 쉽게 닿을 수 없는 질시 또한 섞여있음을 명심해라.’
아무도 일러주지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 절명 직전의 위기 또는 기적적인 깨달음. 그것은 바야흐로 추락과 도약 사이 존립할지니.
이런 거였나. 마술사는 허무하게 조소한다. 엉망이 된 몰골과 반대로 청회색 두 눈 안, 시리디 시린 마술회로가 궁극적인 존재감을 뿌렸다.
때 아닌 돌풍과 먼 뱃소리에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오른다. 갇힌 세계 안, 언뜻 자유로우나 정해진 경로를 맴도는 그들.
일순 비틀려도 다시 기억하는 길을 되풀이하며 날아간다.
제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벗어나지 못할 폐곡선으로.
바인브릿지 위 여명이 저문다. 막이 내리고 오른다. 하나의 세계가 부서지고,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가 존중을 담아 인사한다.
마술사는 웃었고, 또 울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 산산이 텅 빈 신세계.
마침내 오라힐리 테사는 7계급 대마술사Arch Mage였다.
[작품후기]
종장 새들은 비틀린 폐곡선으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