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기운 내세요.”
조객 중 한 사람이 위로의 말을 건냈지만, 사내는 그저 넋을 잃은 듯 허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벌 2세와는 거리가 있지만, 제법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능으로 젊은 나이에 거대한 기업을 일구어 낸 사내였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삶을 살아오던 사내.
하지만, 그가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던 이들을 잃었다.
그가 늘 사용하던 차량이 폭발한 것이었다. 범인을 찾겠다고 경찰이 나서긴 했지만, 누구의 짓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지면, 이익을 볼 만한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강제로 사들이려던 재벌 그룹도 적지 않았다.
‘이제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복수같은 걸 생각하는 건, 그대로 의욕이 있는 자들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아내와 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 죽어버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이끄는데로 영혼이 빠진 꼭두각시가 되어 끌려다녔을 뿐이었다.
영혼이 빠져 나간 껍데기.
그를 본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는 장례식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는 식음을 전폐한채 집 안에 쳐박혀 있었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서는 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흔든다음, 포기하고 회사로 떠났다.
그가 쓰러지면, 병원으로 옮기도록 가정부에게 지시를 내려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십대 초반에 돈많은 유명인 홀애비면, 이여자 저여자 골라잡을 수 있을텐데 말이지.”
혀를 차면서 수석비서는 회사로 향했다. 실제로 비서실의 여직원들 가운데는 사장을 흠모(?)하는 이들로 넘쳤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더 인기가 올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처음에는 아내와 딸의 죽음에 그가 용의자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법 넘쳤다. 원래 배우자는 첫 번째 용의자가 되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낙담하는 모습을 본 이들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것이 결코 위로가 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제성씨. 들립니까?]
방안의 어둠 속에 넋을 놓고 앉아있던 조제성 사장의 눈 앞에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하얀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처...천사?”
반 투명한 백색의 빛은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에 큰 날개를 한쌍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천사의 모습에 조제성의 눈빛이 살아났다.
[천사와는 좀 다르군요. 전쟁의 처녀, 발키리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당신을 관찰하고 있었지요.]
“절 관찰하셨다고요?”
[아내와 딸을 정말로 만나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그 댓가를 어느정도 치를 수 있는 분인지 알고 싶어서 말이지요.]
“댓가? 아니, 영혼을 팔라면 팔겠습니다. 제 처와 아이를 돌려주세요. 제발.”
[이런, 절 악마와 착각하신 듯 싶군요. 전 여신 프레이아의 종입니다. 제가 온 것은 여신님의 제안이 있어서 온 것이군요.]
“제안? 거래란 말씀입니까?”
[예. 여신님은 당신의 협조가 필요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내와 딸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을 잠시 맡아두고 계십니다.]
“재산이건 뭐건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그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미 제 좌우에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보이고 들리게 해드리지요.]
발키리의 말과 동시에 그의 처와 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를 입은 듯한 모습의 말 그대로 유령이었지만,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메마른 듯 한방울도 흘러나오지 않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환상이라도 상관 없었다.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프레이아님은 이 세계의 여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들의 영혼도 가야할 곳으로 가기 전에 여신님의 힘으로 잠시 붙들어 둔 것에 불과합니다.]
발키리의 말에 조제성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단, 프레이아님의 세계에 부활시키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쪽 세계로 넘어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댓가로 그대의 협조를 원하십니다. 물론 원치 않으실 경우, 그녀들의 영혼은 해방될 것이고, 당신 세계의 천국에서 언젠가 재회하실 수 있을 겁니다.]
“원합니다. 제가 어떤 협조를 하면 되겠습니까?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이라도 협조하겠습니다.”
[여신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협조는 아닙니다. 여신님이 필요한 것은 돈이지요. 당신 세계의 돈이 필요하답니다. 약간만 성의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여기 비밀엄수와 절대협조의 계약서에 사인하시면, 이들은 여신님의 궁전에서 부활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여신님의 궁전에 드나들 수 있는 아티팩트가 주어질 겁니다.]
발키리가 내민 서류에 조제성은 망설임없이 사인했다. 돈이 필요하다는 여신의 이야기는 왠지 황당했지만, 도리어 믿음이 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는 것 중 가치있는 것은 돈이었다. 자신이 들어본 적도 없는 신이 자신에게 구원의 손을 대가없이 뻗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지도 몰랐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운명공동체가 된 셈입니다. 당신의 처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해 주세요.]
“예?”
계약서에는 계약이 파기되지 않는 한, 처자의 안전은 프레이아 여신이 힘닿는 한 책임지고 지켜주기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여신의 궁전에 머무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신의 돈은 이쪽 세계의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서 쓰일 거랍니다. 신들의 전쟁이 지금 벌어지고 있답니다. 안타깝지만 프레이아 여신님은 그 가운데 꽤 열세에 처해 계세요.]
“그렇군요. 조금은 납득이 갑니다. 잠시 식사를 하겠습니다.”
더이상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업을 지키는데는 신중함과 세심함이 필요하지만, 사업을 키우는데는 결단력이 필요했다.
마음을 정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우선하는게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몸이 무겁군.'
며칠 간 식음을 전폐한 탓인지 몸 곳곳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가족이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의 몸 속에서는 되살아난 무언가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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