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000년 전에 쓰여졌다는 신약성서에 요한 복음이 있지. 그리고 거기에는 신이 이세상을 ‘언어’로 만들었다고 나와. 또한 신은 ‘언어’그 자체셨다고 나오지. 난 게임을 할 때 종종 생각해. 이 세상이 신의 언어로 만들어졌다면, 게임은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 신이 말씀, 언어 그 자체라면, 신은 일종의 프로그램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영혼 역시 신이 만든 일종의 프로그램이고 말이지. 물론, 난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고, 2000년 전에 쓰여진 성서의 말씀이 완벽한 진실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 못하니, 죄다 헛소리가 되는걸까?”
아스가르드를 본 수한의 한마디.
게임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혼자 하는 게임과 여럿이 하는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에는 혼자 하는 게임이 주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여럿이 함께 하는 게임이 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하는 게임 역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적으로 하는 게임들도 나쁘지 않지만,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게임도 독특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박원기가 즐기는 게임은 운명이라는 게임이었다.
싱글 플레이 게임은 멀티 게임과 달리, 난이도 조종도 가능하고 플레이어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개중에 ‘운명’이라는 게임은 신이 되어 신자들을 모으고 세상을 지배해가는 과정을 그린 게임이었다.
한국에서 개발된 이 ‘운명-디스티니’라는 게임은 ‘문명-시빌리제이션’을 본떠 만든 것이 아니냐는 구설수에 곧잘 오르긴 했지만, 가상현실 게임에서 나름대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박원기가 플레이 하는 캐릭은 미의 여신이었다. 운명이라는 게임에는 신들의 타입이 몇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힘과 권위의 신은 폭력과 잔인함을 통해서 신자를 끌어모으는 특성이 있었다. 정복신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자들을 힘으로 압제할수록 도리어 신앙심이 높아지는 꽤 새디스트적인 타입이었다.
미, 혹은 예술의 신은 사랑받는 신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나 음악, 예술을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심이 높아졌다.
예쁠수록 신자들을 모으기 쉽고, 신앙심이 올라가는 미의 신은 외모를 꾸밀 수 있는 이 게임에선 반칙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었다.
외모의 미세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웹사이트에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외모를 만들 수 있을지, 수치로 표현해 놓은 데이터가 있었다. 수치대로 조종하면, 유명 탤런트나 모델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박원기 역시 미의 남신을 택했지만, 왠지 잘생긴 남자를 플레이하는게 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미의 여신이었다.
미의 여신은 전쟁을 하는데 불이익이 있지만, 평화롭게 포교로 신자들을 확보하는 면이 장점이 있었다.
그 외에 생산계의 신들을 비롯해 다양한 타입의 신들을 선택해서 플레이 할 수 있었다. 생산계의 신들은 특정 직업의 수호자로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능력을 끌어올려주는 특성이 있었다.
문명 레벨은 중세 판타지 수준까지만 올라가기 때문에, 쓸만한 대장장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대장장이 신의 경우엔 제법 인기가 있었다.
다만, 박원기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그다지 탐탁치 않았다.
적을 죽이는데는 망설임이 없지만, 아군이 죽는 것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음 직전까지 몰려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그는 추돌 사고에 휘말렸다. 그리고 앞에 가던 차가, 난방용 등유를 배달하던 차라는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첫 충돌에서 즉사는 면했지만, 등유가 폭발하면서 화염에 휩싸여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그는 심각한 수준의 화상을 입었다. 각막 손상으로 인해서, 눈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고통과 절망, 그 때문에 죽고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것을 붙들어 준 것은 바로 누나의 존재였다.
일시에 부모님을 잃고, 하나 뿐인 동생마저 중환자실에 끔찍한 몰골로 입원하게 된 상황이었다.
자신이 누나의 짐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죽음을 택했겠지만, 누나에게 있어서도 유일한 가족으로 심리적인 위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들을 모두 잃고 홀로 된다는 것의 두려움, 그것을 그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년의 화상치료 후, 퇴원을 하게 되었지만 화상으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아주 약하게 회복된 시력으로는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양손의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들어두신 생명보험으로 당분간 생활에 지장은 없지만, 자립할 수 없는 자신이 누나의 짐이 되는 것은 아닐지 부담스러웠다.
과거엔 퉁명스럽고 곧잘 말다툼을 벌이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그렇게 집에서 지낸지 1년여가 되었을 때, 뇌파와 연동하는 단말기가 세상에 등장했다.
조금은 복잡하게 생긴 헤드셋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컴퓨터가 구현한 영상을 뇌로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사고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문제없이 사용이 가능했다.
문제는 영상처리를 해주는 컴퓨터가 제법 크고 무거운 것이어서, 실외에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실내에서는 헤드셋에 장착한 소형 카메라의 영상을 통해서, 일상 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시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단말을 이용하면, 침대에 누워서 가상현실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다만, 이 단말이 제공하는 감각은 시각과 청각 뿐이었다. 꿈에서 냄새나 아픔,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시각과 청각만이 제공되는 가상 게임은 현실과는 꽤 큰 위화감을 갖고 있었다. 솔찍히 컴퓨터가 제공하는 그래픽의 한계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과 착각할 수준은 아니었다.
게임의 보급 덕분에, 뇌파 단말도 꽤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온라인 알피지 게임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경쟁하듯이 하는 게임들에게서 박원기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할 게 마땅치 않다보니, 이런 저런 게임을 조금씩 거쳐보던 그가 만난 것이 운명이라는 게임이었다.
신이 되어,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게임이었다.
신의 능력으로 사제를 선택하고 그들을 통해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게임이었다.
비록 컴퓨터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행한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신이 기적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게임에 빠진 것일지도 몰랐다.
게임의 목적은 대륙의 신기를 모으거나, 다른 종교를 모두 없애고 단일 종교로 대륙을 통일하는 것, 혹은 신자수가 일정 수 이상이고 그들이 충분히 행복하게 되는 것이었다.
목표를 달성하면, 게임을 중단하거나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일어난 전쟁에는 적극적이고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전쟁을 통한 병합보다는 자연스럽게 문화적인 힘으로 신자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조금은 더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대륙을 통일하고 사람들의 행복도가 일정 이상이 되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그는 게임을 종료하지 않고, 그저 계속 해나갔다.
사람들이 자신의 보호안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불행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해결하면서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게임을 통해서 시름을 잊는 것, 그것이 그가 게임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었다.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것도, 새로운 스토리도 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가끔 자극이 되는 것이라면, 최근 적용된 업데이트로 인해서 외부 유저가 그의 세상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온라인 알피지 블러드라인과의 연계 덕분에, 그가 다스리는 세상에 블러드라인의 캐릭터로 난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그가 다스리는 이 세상엔 몬스터도 남아있지 않았고, 싸울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롭고 좋은 세상이라면서 맘에 들어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금새 실망하고 떠나갔다. 가끔은 욕설에 가까운 메시지도 남겨 놓았다.
-이렇게 게임하니 재밌냐? 찌질아?
-헤에, 이렇게까지 꾸며놓은 정원은 처음 봤어요. 대단하세요.
운명에서 유저들이 신이 되어 다스리는 세상을 유저들은 ‘정원’이라고 불렀다. 이런 저런 반응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불쾌한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열어둔 상태였다.
[신의 사자, 발키리가 당신의 세계를 방문했습니다.]
갑자기 뜬 메시지에 박원기는 조금 당황했다. [블러드라인 유저, XX가 방문했습니다.]라는 메시지는 자주 받아 봤지만, 신의 사자가 방문했다는 메시지는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사자, 발키리가 접견을 요청했습니다.]
‘업데이트라도 한 건가? 이런 건 처음이네. 하긴 신들간의 소통도 만든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
그는 관리모드에서 현신모드로 전환했다. 여신의 몸이 되어서 세상을 둘러보거나, 직접 일을 처리하는 역할을 했다. 여신의 궁전에 있는 많은 NPC들이 그를 보고 존경의 눈빛을 보이면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대부분이 아니라, 전 NPC의 신앙심과 충성도가 MAX인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대단하시군요. 많은 세계를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세계를 본 적이 없습니다.”
신의 사자, 발키리라는 존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외모는 말 그대로 천사에 가까웠다. 다만 갑옷을 충실하게 입었다는 점이 보통 말해지는 천사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후광도 천사의 링도 없었다.
‘헤에, 그래픽이 업데이트 된건가? 조금은 위화감이 느껴지네.’
이 게임에서는 신의 태도도 충성심이나 신앙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기품있는 모습과 권위있는 말투가 기본이었다. 유저들과 만날때는 재수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발키리라는 존재는 NPC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내가 할 바를 한 것 뿐이네. 용건은 그것 뿐인가?”
유저가 방문한 것도 아닌데, 용건이 없을리는 없었다. 퀘스트 비슷한 것이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박원기는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
“저희 세계의 미의 여신 프레이아께서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북구의 미의 여신 프레이아에, 천사 발키리라. 확장팩이라도 만든 건가?’
“글쎄. 유감이지만 난 새로운 세상엔 관심이 없네.”
박원기는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에 선뜻 확장팩으로 옮겨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한번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반지를 드리지요. 저희 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게이트를 만들수 있는 반지입니다. ‘게이트 오픈’이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발키리는 그의 손에 반지를 정중하게 넘겨 주었다.
‘그래. 방문 정도라면 해봐도 좋겠지.’
박원기는 그렇게 생각하고 반지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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