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8화 (8/497)

8화

“죄송합니다. 이 반지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여신님.”

발키리는 대뜸 원기라는 캐릭터로 새롭게 로그인한 그를 여신으로 알아 보았다.

캐릭터가 아닌, 내부의 본질을 알아보는 듯 싶었다. 그가 창조했다는 느낌은 별로 없지만, 그들에겐 그가 창조자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남자 캐릭터의 모습을 한 그를 척보고 알아본다면, 실체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를 여신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좀 심하게 위화감이 있었다.

“왜지?”

게이트를 열 수 없다면, 게임의 캐릭터를 이용해서 다크엘프와 싸운다는 계획 자체가 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신의 기적을 통해서 여는 게이트입니다. 신의 힘이 없으면 발동되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인간으로 화신하신 상태에서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발키리의 설명에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예상한대로 신앙 포인트를 활용하는 신의 권능을 엘프 테이머에 불과한 원기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게이트를 열 방법은 없는건가?”

“여신님의 힘 말고는 불가능합니다.”

발키리는 실체가 없는 정신체라서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게이트를 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반지를 가져다주며, 그에게 게이트를 열라고 한 것 같았다.

“잠깐, 반지는 어떻게 가져 온거지?”

발키리에게 물었지만, 그에게 반지를 가져온 발키리는 이미 프레이야와 함께 소멸한 상태였다. 그가 새롭게 창조한 발키리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리는 없었다.

“아마도, 프레이야 여신님께서 게이트를 열어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발키리의 추측성 답변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처음 아스가르드를 방문할 때에도 발키리가 아니라 여신 아바타가 열도록 했던 기억이 났다.

발키리들은 약간의 물리적 힘을 가져서 한 두개의 아티팩트 등을 운반할 수 있었다. 아더왕의 엑스칼리버라는 신검은 북구 신화의 그람이라는 이름의 신검에서 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고 가게 된 아발론은 오딘의 궁전 발하라를 의미한다고 했다.

용사에게 신검을 가져다 주거나 회수하는 역할을 발키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같은 차원에 있을 때의 이야기이고, 차원의 벽을 아티팩트를 가지고 넘는 것은 불가능한 듯 했다.

‘젠장, 이 상태에선 프레이야의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군.’

프레이야의 기억은 아무래도 그의 영혼 속이 아니라, 그의 게임캐릭터 속에 심어진 듯 싶었다.

“그럼, 이 상태로 저쪽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건가?”

여신 상태에서 만들어낸 발키리에게는 원기 자신보다 많은 정보가 주입된 듯 싶었다. 발키리로서 활약하는데 필요한 정보가 부여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그대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신님이 트윈 컨넥트 미러를 만드신다면 그것을 이용해서 가실 수 있습니다.”

“트윈 컨넥트 미러?”

“예. 떨어진 두 장소를 이어주는 거울입니다. 동일 차원에서보다 소모되는 권능은 크지만, 허가된 모든 이가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재빨리 로그아웃해서 여신으로 다시 로그인을 했다.

트윈 컨넥트 미러를 떠올리니 과연 그것에 대한 지식이 떠올랐다. 거울은 마법의 도구로 예전부터 사랑받는 물건이었으며, 이세계와 이어지는 문이자 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굳이 게이트를 사용할 필요가 없군.’

트윈 컨넥트 미러는 만들 때 권능을 좀 많이 소모하긴 하지만, 만들어지고 나서, 유지 비용은 게이트 소환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장기적으로는 유지비가 적게 드는 것이었다.

‘최소한 세 셋트는 만들어 놔야겠군.’

아스가르드의 여신의 궁전과 게임 '운명'의 여신의 신전을 잇는 게이트, 그리고 그의 방과 운명을 잇는 게이트, 그리고 블라드라인과 아스가르드를 잇는 게이트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이 거울이 있으면, 내가 여신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도 사람들을 아스가르드로 데려갈 수 있지.’

그는 블러드 라인의 길드 사무소를 떠올렸다. 길드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 그곳에 거울을 설치한다면 원하는데로 게임속 캐릭터들만 아스가르드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보수를 주고, 게임 세계를 통해서 부려먹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금전적인 보수는 당장은 어렵겠지만, 가족을 치료한다던지, 죽은 이를 되살려 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역시 부자를 하나 잡아야 하는데...’

“우선은 블러드라인의 캐릭터를 써보도록 할까?”

그는 여신의 권능을 이용해서 인간이 걸어서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큼직한 거울 여섯 장을 두 장씩 짝지어서 연결했다. 그리고 게이트를 열어서 발키리들에게 각각의 거울을 배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당분간 권능을 아껴야겠군.’

부잣집 인질에게 ‘새생명’을 주기 위한 권능을 생각하면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남성 엘프 테이머로 캐릭터를 갈아탄 다음, 거울을 통해서 아스가르드로 향했다.

그의 지시대로 발키리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숲 속에 거울을 설치했다.

“우웃, 이거 정말 죽이는데...이게 엘프인가?”

아스가르드에 발을 디디는 순간, 느껴지는 오감의 폭풍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엘프의 시각, 엘프의 후각, 엘프의 청각, 엘프의 촉각, 아직 체험은 못했지만 엘프의 미각도 있을터였다.

게임에선 엘프나 인간이나 그게 그거였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달랐다. 시각은 뭐라고 해야 할까.

색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색감을 극도로 줄인 탓에 흑백 화면 비슷하게 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흑백화면과 컬러화면의 중간 쯤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곳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익숙해지니 위화감도 사라지고 시야가 시원한 느낌이라 나쁜 것은 아니었다.

‘엘프들이 밤 눈이 좋다더니...’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온 몸에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의 폭풍을 즐겼다.

몸은 대단히 가볍고, 공기는 신선했다. 손에 들린 화승총을 보았다. 시험삼아 한 번 쏴볼 필요가 있었다.

그의 눈에 작은 다람쥐가 들어왔다. 신들의 힘으로 만들어지거나 변형된 몬스터들을 제외하면, 모두 지구산이라 이세계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미드가르드는 북구 신화에서는 ‘지구’를 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떠나온 지구를 미드가르드로, 새롭게 열린 이곳을 아스가르드로 칭했다.

처음엔 다람쥐를 겨눴지만, 무기의 시험을 위해서 다람쥐를 쏘는 것은 꺼림찍했다. 자동으로 명중시키는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명중률이 낮을 터였다.

그는 총구를 옮겨서 나무의 기둥을 쐈다.

탕하는 총소리가 메아리치고 화약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는 캑캑 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생각보다 화약 연기가 매웠다.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되었지?”

기침이 멎자 그는 재빨리 나무를 확인했다. 제법 떨어진 거리였지만, 명중할 터였다.

'빗나간 건가? 이정도 표적을?'

그는 총알을 장전했다. 게임처럼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쉽지 않았다. 시간도 제법 걸렸다.

이번에는 나무에 근접해서 총을 쐈다. 총알이 옆으로 날아가지 않는 한 빗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총알은 흔적도 없었다. 소리와 연기는 낫지만 나무에는 총알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총구를 잡고 개머리판으로 나무를 쳤다. 개머리판은 나무를 통과해 버렸다.

'무기는 통하지 않는건가?'

공격력이라는 개념은 상대의 HP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HP가 없는 적에게 어떤 데미지를 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나무가지를 주워서 나무를 쳤다. 그러자 나무 껍질에 자국이 남았다.

'무기 아이템은 작용하지 않는건가? 아니 게임 캐릭터에게는 작용하는 것 같군.'

개머리판으로 자신의 팔을 치자, 은근한 통증이 오면서 붉게 변했다.

아이템은 게임 캐릭터에게만 작용하는 환상과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소리와 형태는 이세계의 존재들에게도 전해지는 듯 했다.

지축을 울리는 쿵쿵 소리가 몬스터의 발자국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황은 최악으로 변해 있었다.

“오우거.”

게임에서 나오던 오우거와 비슷한 모습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3미터라는 크기, 그는 이제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2층건물만한 덩치가 눈 앞에 나타나는 순간 그 위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장진 해야 하나. 아니 의미없지.’

“용가리! 나와!”

그나마 테이밍해둔 리자드 나이트를 떠올린 것이 다행이었다. 게임에서는 테이밍하면 덩치가 줄어들어서 인간보다 작은 크기로 변하는데, 이쪽 세계에서는 원래 크기 그대로 나타났다.

'아니, 원래 크기보다 명백히 작군. 원래라면 오우거보다 클 터인데.'

그래도 약 2.5미터의 듬직한 거구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보스인 만큼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멋진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눈빛과 무시무시한 이빨, 멋들어진 갑옷, 그리고 그 거대한 위용은 그 강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줬다.

오우거 정도는 간단히 해치워 줄거라 믿었다. 그 순간 굉음이 들리며 바닥이 흔들렸다.

오우거의 몽둥이에 머리통이 박살난 리자드 나이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무기가 아닌 몬스터 자체는 캐릭터 자체처럼 어느정도 현실에서도 실체화 되어 있었다.

“어라? 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는 한가지 잊고 있었다. 리자드 나이트는 평균 70레벨에 상대하는 극강의 몬스터였다. 레벨 10에 싸우는 최초의 보스 용가리는, 디자인만큼은 레벨 90짜리 리자드 엠페러를 능가하지만, 턱없이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파티 플레이도 변변히 못하는 레벨 10짜리 플레이어들이 솔로 플레이로 잡아죽일 수 있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퀘스트 몹이었다.

적어도 레벨 70까지는 올려줘야, 보통의 리자드 나이트 수준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총을 오우거의 머리통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큰 소리가 나면 동물들처럼 도망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흉성만 불러일으켰다. 오우거가 그를 향해 포효하며 다가오는 순간, 오우거의 머리에 화살이 박혔다. 하지만 역시 치명상은 아닌 듯 싶었다.

“이봐! 빨리 나무 위로 피해!”

나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서 그가 있는 거대한 나무에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엘프이나 마음은 방구석 폐인이었다. 나무를 오르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허우적대다가, 오우거에게 맞아서 그대로 죽음을 당했다.

끔찍한 고통과 공포, 그나마 죽는 순간 고통에서 해방된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블러드라인의 부활은 기본적으로 죽은 장소에서의 부활이었다. 다만 죽은 장소가 안전지역이 되거나, 안전지역까지 물러나서 부활할 수 있었다.

오우거 곁에서 벗어나면 금방 부활할 수 있지만, 그는 그저 넋을 놓고 있다가 오우거가 떠난 다음에 제 자리에서 부활했다. 시간이 좀 지난터라 그를 도와주려던 엘프 여전사도 떠나고 없었다.

‘이거 악몽이로군. 아니 코미디일려나.’

무사히 부활했지만,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를 도와주겠다고 엘프마저 오우거와 싸우다가 죽었다면 그건 더 끔찍했을 터였다. 다행히 한 방에 죽어서 민폐라도 안끼친게 다행이었다.

보기만 그럴 듯한 용가리도 어떻게 해야 하지만, 화승총가지고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아마 현실에서 총을 가져온다면 쓸 수 있을터였지만, 일반인인 그에게 총을 손에 넣을 방법은 없었다.

‘실총을 손에 넣어야겠다. 가능하면 소음기랑 조준경 달린것으로’

시간은 없는데, 해야 할 일은 늘어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누나와 식사하면서 틀어놓은 TV의 뉴스에서 애처가로 유명한 유명 기업 CEO 조제성의 가족이 차량에 설치한 폭탄 테러로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그에겐 불행이지만, 원기에겐 좋은 기회였다.

‘사람 죽는 소식에 기뻐하는 장의사처럼 되어 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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