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조제성의 처 유혜서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곁에는 아름다운 날개달린 여성이 있었다.
“천사? 아니 천사님?”
“우리는 그대가 믿는 신의 사자가 아니다. 잊혀진 신의 한분인 프레이야님의 종, 발키리라고 한다.”
“어머니, 어머니도 돌아가신 거네요.”
막 고등학생이 된 딸 조은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유혜서는 자신도, 딸도, 발키리라고 이름을 댄 천사들도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들은 이미 죽었다.”
유혜서는 천사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시신을 붙들고 오열하는 조제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사람. 미안해요.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조제성은 제법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천재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바쁜 부모들은 그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그의 부와 재능에만 관심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 가족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 이해받지 못하는 자의 고독으로 인해서 그는 사회부적응자가 되어 있었고,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까지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처음으로 불쌍하게 여기고 인간적으로 대해 준 것이 그녀 유혜서였다.
그 탓일까 그와 사귀기 시작한 뒤로, 아니 결혼한 뒤로도 그는 엄청나게 가정적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스토커이기도 했다. 그녀를 못믿어서가 아니라, 그녀를 믿지만 너무 소중해서 혹시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불안감에 강박증적으로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함과 동시에 안타깝게 여겼다.
“우리들은 그대들이 근원, 이를테면 신의 곁이라고 할까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을 방해하고 그대들을 억류하고 있다.”
발키리의 이어진 말에 유혜서와 조은혜의 눈이 발키리에게 쏠렸다. 천사가 죽음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억류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지요?”
그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후 세계에서 천사를 만난 지금까지 무신론으로 남을 생각은 없었다.
“우리들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신 여신님께서 그대의 남편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때문에 너희를 억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신님께서는 그대들에게 새로운 육신과 새로운 삶을 주실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이전의 육체와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대들은 여신님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조제성은 여신님을 위해 일을 해주는 댓가로 그대들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그런...”
발키리의 말에 유혜서의 안색이 변했다.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긴 했지만, 상황이 변한 것이었다.
“남편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어야 해요.”
“모든 것은 여신님의 뜻에 달려있다. 다만, 그대들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대들의 영혼은 이 세계에 속하는 것, 그대들이 원치 않는다면 그대들을 죽음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해방시킬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보다 그에게 더 나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조은혜의 곁에 있던 또 다른 발키리가 조용히 말했다. 유혜서는 발키리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억류하지 않겠다는, 아니 억류할 수 없다는 발키리들의 말을 듣고는 조금은 안심했다.
“저희가 동의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대들의 동의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선 그대들이 동의한 만큼, 조제성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동의한다면, 그대들은 여신님의 궁전에서 새로운 육체와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근원, 영원한 분의 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영원한 분? 당신들의 여신님은 영원한 분, 곧 신이 아니신가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고, 주인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신으로 믿는 이들의 신이시다. 다만, 영원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한 존재도 아니시다. 그래서 그대의 남편의 힘을 빌리고 싶어하시는 것이지.”
발키리는 조용히, 그리고 냉철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오히려 유혜서의 신뢰를 얻었다. 거짓을 말하지도 과장을 말하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와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유혜서는 최소한 저 세상으로 가기 전, 그와 마지막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게 된 만큼, 그것을 기쁘게 여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예상대로라고 할 수 있었지만, 조제성은 기꺼이 그녀와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섰다.
“그럼 우선, 여신님의 궁전으로 안내하지.”
발키리들은 둘의 영혼을 이끌고 미드가르드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곳에서 여신을 만났다.
“수고 많았다. 조제성이 협조하기로 했다니 다행이로구나. 그리고 그대들을 환영한다.”
유혜서가 본 여신의 궁전은 그다지 화려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껏 관리되었다는 느낌과 주위를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엘프들의 모습은 상상도 못하던 세계에 와있음을 실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엘프들의 여신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력을 빌려, 권능을 행사하는 존재라고 보면 될거야. 너희가 알고 있는 무한한 존재와는 다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북구의 잊혀진 신들이 만들어낸 피신처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신들의 힘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신들의 힘의 근원인 신앙심이 사라지면,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이 세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기에, 지구의 문화를 이쪽 세상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그게 사실 그대들에게 가장 미안한 것이지.”
“그 말씀은...”
“그대들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지구의 문물을 조달해서 지구처럼 살아가는 대신에 내 궁전에서 일체 나가지 말아야 하는 조건을 받아들이던가, 지구의 생활을 완벽히 포기하고 이 세계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던가. 둘 중 하나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신의 설명에 그녀들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지구에 돌아가는 것은 안되나요?”
조은혜의 질문에 여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일단 설명은 해둬야겠지. 그대들이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된다면, 그 육체는 그대들의 것이지만, 영혼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데에는 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유체 이탈이 되기 쉬운 상태라고 해야할까. 내 영역에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대들이 속한 세계에 가면 그대들의 영혼이 순리를 따라, 근원으로 떠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 달에 하루 정도라면 모를까, 사흘 정도만 체류해도 그대들은 육체를 벗어나서 가야할 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크지. 다만 5년 이상 지나면, 그때는 그대의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충분히 공고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느쪽 세계에서 살 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지구식 문명을 선택한다면, 외부와 접촉은 끊겠지만, 이 안에 그대들의 주거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만약 이곳의 삶을 받아들인다면, 귀족에 해당되는 대우를 약속하지. 물론 이곳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주민과 대화하는 것을 금지할 뿐이지, 가끔씩 감시하에 바깥 구경을 하는 것은 용인할 것이다.”
여신의 말에, 모녀는 비로소 얼굴이 밝아졌다. 이유도 없이 지구에 못돌아 가는 것은 아닌 듯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여신이 잠도 못자고 고민했다는 사실은 그녀들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최대 한 달에 하루는 지구에 다녀올 수 있고, 5년 정도가 지나면 지구로 돌아가는 길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에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죽어버린 그대들의 신분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대들의 남편이자 아비에게 맡겨야겠지.”
유혜서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에 살짝 위화감을 느꼈지만, 딱히 뭐라고 할만한 것은 집어내지 못했다. 의외로 여신이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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