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10화 (10/497)

10화

“오오, 여보. 은혜야.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

조제성은 말을 잇지 못하고 끅끅대며 흐느꼈다. 여신의 모습으로 조제성을 방문한 박원기는 자신의 인선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조제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람과 동시에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믿자.’

그는 운명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의 속성을 배려한 게임 제작진에게 감탄한 적이 있었다. 선한 신의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상대를 움직여야지, 강제적으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여신 행세를 하는 만큼, 상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일일이 명령을 내리면, 신앙도 신뢰도 깎여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엘프들의 일을, 그리고 여신 프레이야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제법 머리도 돌아가는 것 같으니...’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다. 여신 행세 역시, 그런 면에서는 위험할 수 있었다. 되도록이면, 지구 출신의 인물들과 여신 캐릭터로 접촉하지 않는게 현명했다.

“아직은 영혼이 육체에 안착하지 못했네.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수 있지. 이곳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아직 접착제가 잘 마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거야. 한 달 정도 후부터는 하루 정도는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해 질걸세.”

원기는 충분히 기다린 다음, 숨이 고르게 되는 것을 보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 거울을 이용하면, 그대는 내 왕궁에 들릴 수 있게 되지. 사용 횟수는 하루에 한 번일세. 출퇴근을 하는 개념으로 사용해도 될걸세. 내 궁전 일부를 그대들에게 전세로 내줄테니, 자유롭게 사용하면 될거야. 오늘 저녁에도 가족들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걸세.”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조제성은 감격의 순간이 지나자, 차분하게 그리고 진중하게 물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고, 배려받았다는 생각에 그 이상의 보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프레이야가 여신으로서 가지는 능력 중 하나이기도 했다. 믿음과 존경을 끌어올리는 신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여신 캐릭터에게 기본적으로 존재했을 뿐 아니라, 프레이야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서도 동시에 존재했다.

박원기는 내심 여신 행세가 들통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여신 캐릭터를 직접 접한 사람은 박원기가 여신 캐릭터로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신뢰하게 되어 있었다.

발키리들이 그렇듯이, 여신이 박원기의 형상을 빌렸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의 강한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여신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의 뻔뻔함은 갖추지 못했다.

“일단, 이 세계의 존재를 알게해 준 최초의 계약자가 있네. 그리고 그 계약자에게 도움을 받았지. 자네와 계약하고자 한 것도 그의 조언에 따른 것일세. 그를 돕기 위해서도 자네가 필요하네.”

“말씀하십시요.”

“그는 전신 화상 환자로 각막에도 화상을 입어 심한 약시를 가졌지. 그리고 내 신관은 그를 치료해 줄 수 있네. 문제는 인간 사회가 워낙 복잡해지고 정교해진 터라, 그것이 간단치 않다는 문제일세. 자네의 처자가 갑자기 부활해서 나타나면 어찌될 지 자네라면 알테지.”

조제성은 여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기록상 유혜서와 조은혜는 사망자가 된 상태, 주민등록은 말소되었고 여러가지 법적 지위가 상실된 상태다. 그녀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브로커를 통해서 그녀들의 새로운 신분을 가공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많은 돈이 들었다.

“내 신관을 자네에게 보내겠네. 그녀는 그를 치료할 수 있을거야. 문제는 그것이 대외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지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지. 계약자의 의견으로는 북유럽에서 온 화상 전문 의사가 되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고 하더군. 그녀를 이용해서 병원을 세우고, 돈을 벌어들여서 브로커 비용을 비롯한 투자비용을 뽑은 다음, 그녀가 벌어들이는 돈을 엘프들의 존속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고려중이네. 그 모든 활동에 자네가 필요하지. 난 자네의 재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내게는 대량의 금이 있네. 하지만 이 세계의 물자를 구입하는 것은 쉽지 않지. 돈으로 환전하는 것도 쉽지 않아. 하지만 자네라면 우리를 위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걸세. 위험은 있지만 자네의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걸세.”

“물자라면 어떤 것들을 원하시는 겁니까?”

“우선은 식량일세. 대량의 물도 필요하지. 그리고 엘프들을 무장시킬 저격총이 약 일만정 전후로 필요하네.”

저격총 일만정이라는 말에 조제성은 안색이 변했다. 군수 물자, 특히 화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걸릴 듯 합니다.”

“우선은 식량과 물이 필요하네. 적어도 3만명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는 필요하지. 그리고 저격총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네. 아니, 지금 당장은 우리 쪽에 있어도 처치곤란하다고 해야겠지. 적어도 3년 정도는 지나야 우리도 총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걸세.”

현재 엘프들이 다크엘프들에게 공격 받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숲 이곳 저곳에 부락 단위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여신의 궁전 세스룸니르 곁에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고 그곳에 모든 엘프들이 뭉쳐서 산다면, 다크 엘프들의 습격 없이 군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식량과 식수, 위생 문제만 해결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훈련용으로 서바이벌 게임용 모형건이 적어도 일천정은 필요하네. 작은 플라스틱을 쏘는 총이라고 하더군.”

“아, 그거라면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조제성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총기를 사들이는 것은 무리지만, 미국 지사를 차리거나 미국 지사를 가진 기업을 사들이고, 건 샵 등을 사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성 무역의 오너인 조제성이라고 합니다. 박원기 군의 누님 되시는 박승희씨 되시지요?”

조제성은 발빠르게 박원기의 집을 방문했다. 처자가 살아났다는 기쁨에 보은을 위해서 필사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 예. 대체 무슨 일이신지?”

박승희 역시 그의 가족이 테러로 죽은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테러였기 때문에 한동안 뉴스에 오르내렸다.

“제게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뉴스를 통해 아실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 화상 전문 병원을 기념 병원으로 건설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의사를 초빙하기로 이미 결정이 된 상태입니다.”

“아, 예.”

화상 전문의 기념 병원이라는 말에 박승희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하지만 곧 그녀는 냉정을 되찾았다.

박원기는 이미 받을 수 있는 치료를 다 받은 상태였다. 남은 상처 등은 쉽게 고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각막 이식 정도만이 남았지만, 각막을 필요로 하는 이는 많지만 기증하는 이들은 여전히 부족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화상 전문 병원이 생긴다고 해서 원기가 얻을 혜택은 크지 않았다.

“우리가 초빙하기로 한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박원기 군의 경우 완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화상의 흉터도 남기지 않고, 각막까지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는군요.”

“예? 정말인가요?”

“아직은 정식 인가가 나지도 않았고, 의료 보험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의사 선생님이 우리나라에 계셨다면, 제 처와 딸도 살았을지 모르지요.”

그의 말에 박승희는 기대로 얼굴이 상기되었다. 하지만 지나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의구심을 보였다.

“돈은 얼마나 드는 거지요?”

“돈은 우리측 재단에서 전부 지불할 겁니다. 가족 분들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승희의 의구심은 되려 더 깊어졌다.

“대단히 고마운 말씀이군요. 하지만 왜 제 동생이 그런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화상 환자들은 많은데 말이지요.”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한 시술도 아니고 말이지요. 다만, 그 의사선생님이 완쾌시킬 수 있는 정도가 딱 원기군의 화상정도라고 하더군요. 더 가벼우면, 보여줄 만한 성과가 안나오지요. 그렇다고 더 무거우면 완치시킬 수 없고 말입니다. 화상으로 아예 실명한 사람은 치료할 수 없지만, 화상에 의한 각막 손상으로 인한 약시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흉터역시 근육 깊숙히까지 손상된 경우엔 고칠 수 없지만, 피부를 중심으로 근육 일부가 손상된 경우엔 치료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원기군은 공짜 치료를 받는대신, 광고나 의학협회에 증례로서 사용될 겁니다. 정보 이용 동의서에 사인하시면, 무료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잘못될 경우, 저희 회사에서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보다는 좋아지는거야. 해보자. 누나.”

박원기는 내심 조제성의 말 솜씨에 감탄하면서 누나의 손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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