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엘프 리디아, 그녀는 여신의 명을 받고 지구로 나서게 되었다. 미드가르드와의 통행을 허락받은 조제성과는 달리, 그녀는 향후 5년간 미드가르드에 돌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지구의 종교, 신앙, 무신론 등에 대해서는 알려고 들지도 말고, 혹여 알게 되더라도 절대 미드가르드에서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여신의 명령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동시에 프레이야의 신관이 되었다. 신관의 능력은 치유와 성수를 제조하는 능력이었다. 이른바 포션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의사 행세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녀는 조제성이 알선해 준 기술자를 통해서, 현대 의료기기의 사용법과 판독법을 익혔다. 그리고 조제성은 브로커를 이용해서 그녀의 여권과 학위를 위조했다.
꽤 거금이 들어간 만큼, 상당히 안전한 신분이었다. 그녀가 대외적으로 나설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의심할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려보이는 외모와 귀는 마법 도구를 통해서 감출 수 있었다.
인간으로 위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귀걸이는 연령의 조종도 가능해서 30대 후반의 지적인 여의사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신성력만 충분하면, 다양한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었지만, 현재 프레이야에게 있는 신성력은 적자를 간신히 모면하는 상황이라, 아티팩트를 만드는게 쉽지 않았다. 기존의 만들어둔 아티팩트들도 재충전을 못해서 못쓰고 있었다.
반면, 오딘을 필두로 하는 아스 신족이나, 로키를 필두로 하는 거인족들은 넘처나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이야의 영역을 비롯한 다른 신의 지배영역에서 권능을 함부로 발휘하진 못하지만, 죽은 용사들을 마구 찍어내듯 되살리는 것은 그들의 특기였다.
오딘이 데리고 있는 용사들 가운데는 이미 수천년을 살아오면서 반신의 수준으로 올라있는 이들도 있었다. 죽어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지크프리드는 이미 아스 신족의 신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신의 권능에 있어서 거의 제한이 없는 아스 신족과 거인족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힘을 축척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오딘과 록키는 지구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를 떠나면서, 환멸의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에 살아간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고, 평화는 부패와 나태를 불러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구는 쓸데없는 평화주의에 오염된 쓰레기통처럼 여겨졌다.
만약 그들이 지구의 발전상을 보게 된다면,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기 보다는 지구의 전쟁무기를 도입해 더 잔혹하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일 것이 틀림 없었다.
최대한 힘을 모아, 상대가 정신차릴 틈도 주지않고 끝을 내야만 했다.
현재 프레이야, 박원기로서는 그저 과거에 만들어 둔 아티팩트들중 유용한 몇개만을 선별해서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무신론을 퍼뜨려, 아스 신족과 거인족들을 파멸로 이끌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아스가르드 그 자체가 붕괴해 버린다. 마찬가지로 인구가 지나치게 줄어들어도 곤란했다. 아스 신족과 거인족의 전쟁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어져 온 것도 그때문이었다.
적을 함부로 몰살 시켜서는 안된다. 적어도 적을 죽인 만큼, 아군을 잃은만큼 아이를 낳아서 숫자를 맞춰야 하는 것이다.
거인족의 신자를 아스 신족의 신자로 만들거나, 죽인 숫자만큼 아스 신족의 신자 숫자를 늘려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전쟁이 길어져 온 것은 그때문이었다.
역대의 프레이야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엘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엘프만으로는 충분히 숫자를 불려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엘프는 욕망 자체가 인간에 비해서 미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지만 번식력 자체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인구를 맞춰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은 반 신족이든 아스 신족이든 거인족이든 지켜야 하는, 아니 지킬 수 밖에 없는 룰이었다.
‘이게 정말 인간들이 만든 세상이란 말이야?’
미드가르드, 지구에 도착해서 세상을 둘러 본 리디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인간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천한 몬스터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람들이 읽는 판타지에 나오는 오크나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인간들은 달랐다.
크고 작은 분쟁은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지만, 일부 지배 계급의 사리사욕 때문에 일어날 뿐, 대다수의 인간들은 전쟁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평화를 사랑했다.
싸움만이 정의라고 여기고, 병상의 가족을 제 손으로 쳐 죽이는 미드가르드의 야만인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프레이야가 제국을 선언한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들에게는 욕망이라는 강렬한 에너지가 있었다. 엘프들은 평화를 사랑하나, 욕망이 희박해서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했다.
그 때문에 오랜 시간 평화롭게 살아왔지만, 진보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전쟁을 오락으로서만 즐기는 인간들의 모습은 좀 당혹스러웠다. 오락으로 전쟁을 즐기면서도 실제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곳의 인간들이 갖는 평균 수명은 엘프들과 거의 맞먹는군. 키도 외모도 인간보다는 엘프에 가까워.’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씻지 않아도 청결한 편이었다. 병에 걸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신의 가호가 면역력을 높여주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위생 개념은 희박했다. 초식을 선호하는 그들의 식습관 덕택에 그들의 경우 변도 그다지 냄새가 강하지 않고 쉽게 분해되어 식물의 비료가 되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들의 위생관념은 그녀가 보기엔 놀랍기 그지 없었다. 청결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한다는 것은 그녀가 상상하던 인간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엘프들보다 더 엘프같은 종족이었다.
조제성이 제공한 건물은 병원이 아니라 대저택이었다. 합법적으로는 병원 인가를 얻지도 못했고, 실제로 병원을 운영할 생각도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량의 금괴를 받아서, 자금은 확보한 만큼 통크게 만들어서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임시 병원의 운영은 전부 리디아에게 돌아왔다. 프레이야 여신의 지시는 앞으로 리디아를 통해서 조제성에게 전해지기로 된 상태였다.
그리고 리디아는 프레이야의 명에 따라서, 박원기의 명에 철저히 복종하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박원기의 명에 따른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그녀는 뢴트겐, CT, MRI 등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주사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약물을 주사로 몸에 직접 투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견해서, 주사로 약물을 투입한다는 건가.”
그녀의 의학적 지식은 대단히 부족했지만, 기계의 판독법을 배우는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기계를 작동시키는 기사와 판독을 도와주는 의사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단순히 보조 역할만 하도록 고용된 상태였다.
그녀가 배우고자 한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고쳐야 될 부위가 어딘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정확히 그 위치에 주사를 놓는 법이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주사의 약물은 포션이었다. 그냥 무식하게 쳐바르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엄청난 효능이 있는만큼 정확히 주사를 이용해서 필요한 곳에 투여되면 단 몇방울 만으로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박원기에 대한 치료는 이 주사를 이용한 요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치료 효과를 높이거나 포션을 아끼기 위한 것보다는 대외적으로 치료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신성력의 절약은 부수적인 효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임시병원이라는 이름의 대 저택은 박원기의 새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치료 기간을 빙자한 수개월은 가족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입원 준비를 기다리면서, 박원기는 블러드라인에 접속했다.
‘확실히 게임속 세계와 아스가르드는 전혀 다르군.’
아스가르드와 블러드 라인은 전혀 달랐다. 사실 현실과의 이질감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가상현실게임이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해서 게임속 캐릭터가 현실 세계인 미드가르드에서 활동할 수 있는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발키리 같은 영혼체가 아닌 아스가르드의 인간은 게임 속 세계에 진입하게 되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리디아 역시 단 10분만에 심각한 어지러움증과 두통을 호소했기 때문에 황급히 지구로 보내야 했다. 예상대로 지구와 아스가르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기에 곧 그녀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게임 속 아이템은 외부 세상에서는 곧 사라져 버렸다. 다만, 몸에 지니고 있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포션이나 아이템 등을 외부 세계에서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아이템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었다. 포션은 사람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는게 아니라 HP를 회복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게임 캐릭터는 HP가 있으니 회복되지만, 현실의 인간에겐 HP가 없어서 효과가 없었다.
무기나 방어구도 마찬가지였다. 공격력은 그 숫자만큼 때린 상대의 HP를 빼앗는 것이었다. HP가 있는 게임 캐릭터에게는 통하지만 현실의 인간이나 사물에는 통하지 않았다. 총을 근접 사격하고도 나무에 흠집도 안난 것도 그때문이었다.
방어구는 적의 공격력을 상쇄시키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적이 가진 무기에 '공격력 포인트'가 없어서 방어구 역시도 효과가 없었다.
‘캐릭터나 몬스터가 제대로 작용되는 것만 해도 신기하긴 한데. 아이템은 안되고 사람이나 몬스터만 되는 건 어째서일까.’
박원기는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다. 어차피 정답을 알 길도 가르쳐 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임 개발자들이라고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오우거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서 무기를 활로 바꿨다.
스포츠 샵에서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중고로 구할 수 있었다. 총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론 조제성을 이용하면 사냥용 엽총 한두정 구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 총기를 도입하기엔 꺼려졌다.
맹수들이라면 총소리를 듣고 도망갈테지만, 숲의 침입자를 배제하기 위해서 전대 프레이야들이 창조한 몬스터들은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는 선제 공격몹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의 무기를 장착시킨 리자드 나이트 용가리를 앞세우고 활로 동물들과 약해보이는 몬스터를 사냥해 봤지만 경험치 수치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레벨이 저렙이라, 무엇을 잡든 경험치가 오르게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 세계에서 죽이는 것은 경험치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동물이나 몬스터, 인간에게 경험치를 책정하는 자가 있을리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원기는 테이머 캐릭터를 키우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다크엘프와 조우했을 때, 리자드 나이트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오우거와는 파워 자체가 달라서 싸움이 안되었지만, 제법 뛰어난 몸놀림과 두려움없는 공격으로 다크 엘프들을 죽여 나갔다.
하지만, 원기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점이라는 사실을 다크엘프들이 눈치채 버렸다.
원기가 죽자, 리자드 나이트 용가리도 사라져버렸고 그것을 깨달은 다크엘프들은 다시 조우하자마자 용가리를 피해서 원기만을 노렸다.
첫 교전에서 3명의 다크 엘프를 쓰러뜨렸지만, 두번째 세번째 전투에서는 적들에게 농락당하다가 원기만 죽어 나갔다.
결국 리자드 나이트가 만렙을 찍는다고 해도, 현 상태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한 몹이 아닌 다음에는 테이머를 노리는게 상식일 수 밖에 없었다.
블러드 라인에서 조련사 계열 캐릭들이 사장된 것도 그때문이었다. PK가 안되는 그저 몹사냥용 반쪽 캐릭이라는 평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났다.
나무를 탈 수도 없고, 능숙하게 움직일 수도 없는 그로서는 전투가 벌어지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오우거 전투를 포함해서 네번이나 죽어보고 나니, 고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원기는 블러드라인의 공략 사이트들을 돌면서, 자신에게 필요할 듯한 직업과 스킬을 찾았다. 그리고 꼭 필요한 능력을 발견했다.
‘광폭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광폭화가 적용되면 어떤 스킬도 쓸 수 없지만, 능력 자체가 증폭되었다. 물론 그가 노린 것은 능력 자체가 아니었다. 광폭화가 된 캐릭터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블러드라인에서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공격이 캔슬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적용이 될 것은 틀림 없었다.
‘실드타이거와 합체하면, 늘 광폭화가 가능하다는 건가.’
광전사 역시 몬스터의 테이밍은 가능했다. 그리고 테이밍된 몬스터는 탈것, 전투형, 합체 세가지 타입으로 변화되었다.
‘많이 죽어볼 수 있겠군.’
박원기는 미소를 지었다. 죽는 것이 끔찍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요령이 생기는 것도 틀림없었다. 게임의 레벨 업은 없지만, 확실히 죽이고 죽는 가운데 뭔가 배우게 되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역시 혼자서는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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