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우선 원기는 두 사람을 납득시킨 후, 블러드라인으로 돌아와서 캐릭터를 다시 만들도록 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데이터를 손대지 않고 본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캐릭터를 만들어왔다.
광렙겸 버스를 의뢰한 블라의 길주 네로는 그들의 앞에 아이템을 쏟아 내었다. 어차피 저렙용 아이템은 유니크나 레어라고 해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제법 큰 길드의 경우에는 남아도는게 그런 아이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블라의 길주 네로에게 조제성이 지불하기로 한 돈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이 사람도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지.’
블러드라인의 최고렙은 99렙이었다. 무한정 강해질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10렙에 1차 전직, 30렙에 각성, 60렙에 2차 전직, 만렙에 2차 각성으로 되어있는 게임이었다.
따라서 30렙까지는 현질과 버스를 이용하면 8시간 정도로 충분히 올릴 수 있었다. 30렙 부터 점진적으로 1렙 올리는 것이 어려워지는 편이었다.
블러드라인은 30렙부터 시작된다느니, 60렙부터 시작된다느니, 만렙부터 시작된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온 것은 이때문이었다.
레벨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게임 고수를 끌어들여봤자 재미를 볼 수는 없었다. 미드가르드의 특성상 게임에서의 컨트롤 테크닉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다만 조제성이 블라 길주 네로를 섭외 대상으로 꼽은 것은 그가 게임 분석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장애, 사고로 인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점과 세계사 전공의 사회 교사 출신이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약초를 뽑으세요. 그리고 저를 따라 오세요. 꼭 3개를 채취해야 합니다.”
네로는 쉴새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 게임속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텔레파시에 가까운 것이었고, 유저가 받는 느낌은 게임 채팅과 비슷했다. 말을 한다는 설정이지만, 목소리가 들린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묘한 이질감, 전에는 당연한 것이라고 느끼던 것들이지만, 미드가르드를 체험한 원기 일행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아아, 이거 왠지 지쳐요. 오빠.”
광궁사 유연하가 살짝 지겨움을 내비치며 말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임의 재미는 스스로 고민하면서, 초반에 이것저것 해보는데 있었다. 그 초반의 재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매달리는 법이었다.
나름대로 블러드라인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원기 역시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키는 대로 완벽하게 짜여진 최단 코스로 미친 듯이 달리는 과정은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네로라는 블라 길드의 길주라는 사람의 일처리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저하게 낭비없이 꽉짜여진 루트를 달리는 느낌이었다.
‘돈 받은 값을 하는건가? 생각보다 지휘 능력도 뛰어난걸.’
한희연은 꽤 차분하고 다부진 느낌이라면, 유연하는 제법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원기는 그들을 보면서, 엘프들을 떠올렸다.
엘프의 아름다움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어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 감탄이 남자만의 것이 아니라, 남녀 공통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여자들의 감탄이 더 크다고 할까.
그들은 확실히 아름답지만, 인간과는 다른 느낌이 강했다. 외국인을 보는 이질감보다 확실히 큰, 외계인을 보는 듯한 이질감이었다.
외모뿐만은 아니었다. 문화의 차이와 정서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인 그와, 자연을 사랑하는 비문명인인 엘프들과는 이야기 자체가 통하질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화적 장벽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취향 문제도 있겠지.’
박원기는 백인 여성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사귀고 싶다고 여기는 쪽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것은 한국인이었고 그 다음으로 생각 할 수 있는게 일본인, 중국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가 두 소녀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아름다운 엘프인 리디아에게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여신의 명을 거스르지는 않지만,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뒤로 물러났다.
리디아는 여신의 계약자이자, 대행자인 그를 좋아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인간, 특히 남성은 오크나 트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몬스터였다.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아는 만큼,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람에게 싫어하는 것을 강요할 만큼 독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만든 세상을 보고 발키리가 찾아온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진지한걸.’
박원기는 한희연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치 아이처럼 주변을 둘러보면서 일희일비하다가 지겹다고 투덜대는 유연하와 달리 그녀는 지시대로 움직이면서도 쉴새없이 게임 시스템을 익히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살짝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지적인 눈매는 그녀의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듯 싶었다. 강한 자존심과 정의감이랄까, 그런 부분들이 보였다.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성격이었다.
‘정말 놀라운 건 저사람이로야.’
블라 길드의 길주 네로.
그는 사제 캐릭터로 접속한 상태였다. 경험치 분산된다고 파티도 맺지 않고, 전투가 끝나면 치료 마법을 걸어주었다.
문제는 세명이 모두 광전사라는 사실이었다. 스킬 분배는 전부 방어 위주로 셋팅을 했고, 액티브 스킬은 익히지 않았다.
체력과 방어력이 좋은 캐릭터는 당연히 공격력이 떨어진다. 광전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이 게임에서는 공격력이 상당히 부족한 캐릭터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세명을 데리고, 효과적으로 광렙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범상치 않았다. 블러드 라인을 해본 적이 없는 두 소녀는 모르겠지만, 블러드 라인으로 제법 렙업을 해본 그로서는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하세요. 광전사 세명 파티로 이렇게 사냥이 가능할 줄은 몰랐네요.”
“그냥, 이렇게 저렇게 게임을 파보는게 취미라서 그래.”
레벨이 오를 때마다, 사냥할 몬스터가 바뀔 때마다 세심하게 아이템을 맞춰주었다. 그래서 몬스터를 공격할 때, 대게 딱떨어지게 맞아 죽었다.
예를 들어 체력이 100인 몬스터를 4번 때려서 잡는다면, 30, 30, 30, 30이 아니라, 25, 25, 25, 25의 공격으로 잡는 거였다. 데미지를 줄인 대신, 연타 속도를 높이는 식으로 세팅을 맞추니 속도가 미묘한 곳에서부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리는 몹들도 공격력은 강하지만, 방어력은 약한 몹으로 골랐다. 그로 인해서, 정말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간단히 몹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지루하기 짝이없을 정도이니.’
“같은 길드 분들은 없나요?”
“그게 말이지, 다들 테란으로 옮겨갔어. 새로 시작한 게임이 재밌다고 말이지.”
그의 말에 박원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드 라인은 확실히 저물어가는 게임이었다. 새로 오픈한 테란 말고도 이미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롱 때문에 예전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린 게임이었다.
동접자 수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박원기가 블러드 라인을 한 것도 운명게임과 플러그인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지, 특별히 블러드 라인에 끌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 블러드 라인은 인기가 떨어진 상태라, 서비스가 계속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을 노려서, 조제성에게 블러드 라인 게임을 인수하도록 말을 건네둔 상태였다.
‘저 사람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야.’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하게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뭔가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로그 아웃 후에, 박원기는 발키리 6호를 불렀다.
[조사장에게 네로라는 사람의 신변 조사를 좀 더 자세히 하도록 전해줘. 그리고 그 다음엔 저 사람 곁에 붙어서 그를 감시, 아니 관찰해.]
발키리가 조사한 대상을 조제성이 조사할 경우는 그 조사 결과를 100%신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제성의 조사만으로는 그 인간의 내부 됨됨이까지 알아볼 수는 없기 때문에, 좀 더 조사를 강화해 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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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허탕인가?”
“예. 이번 마을도 텅 비었습니다.”
“식량은?”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량을 수확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엘프 사냥에 나선 다크 엘프들 역시 이변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숲속 어디에서도 엘프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극히 평화롭게 정리정돈 된 상태로 방치된 엘프 마을들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엘프들이 즐겨먹는 채소, 곡물 등은 물론이고 나무에 영글은 과일들까지 전부 방치된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다크엘프이자, 프레이의 성기사인 그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져 들었다. 엘프라고 해도 식량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숲 전역에 퍼져서 과일과 채소, 곡물 등을 적당량씩 취하면서 사는 것이 엘프의 생활 방식이었다.
‘특정 지역에 모이기로 한건가? 프레이야의 명이겠군.’
프레이야가 한계에 가까울 거라는 사실은 프레이 역시 알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 엘프가 밀집하면, 과도하게 식량을 채집해서 자연이 파괴되겠지만 당장 멸망은 막을 수 있을터였다.
“좋아. 조금 더 범위를 좁혀나가도록 한다. 상대할 적들이 밀집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하도록.”
다크엘프들의 부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의 다크엘프들은 남아서, 과일을 수확함과 동시에 숲을 죽이기 위해서 독을 뿌리기 시작했다.
“헤에, 저게 다크엘프들인가요?”
“그래. 우리가 싸워야 할, 아니 죽여야 할 상대야.”
엘프 박원기의 말에 유연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물론 한희연의 얼굴도 굳어졌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이, 게임속 전투와는 전혀 다른 전투가 될 것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만 생각해. 너희가 죽인 몬스터들과 별로 다를게 없는 존재야.”
원기는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어깨에 힘을 빼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솔찍히 말하면, 쟤네들보다는 우리가 죽기 쉽겠지. 그냥 죽는다 하고 생각해. 광전사화 잊지 말고. 몇번 죽어봤는데 꽤 끔찍했다.”
남은 다크엘프들은 20여명, 전부 남성에 훈련된 전사들이었다. 기습을 걸기도 쉽진 않을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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