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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15화 (15/497)

15화

유연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엘프는 활의 명수라는 소리를 소설 등을 통해서 접한 바 있지만, 엘프가 되어보니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활을 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람을 읽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나아가 바람을 예측하는 법을 배운다. 곧잘 쓰는 방법 중 하나가 풀잎을 날리거나, 먼 곳의 나무나 갈대의 흔들림을 보는 것, 그리고 손가락 끝에 살짝 침을 묻혀서 공기의 흐름을 보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엘프가 되어보니, 피부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가늘게 좌우로 뻗는 귀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람의 방향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바람을 읽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한희연이나 박원기에게 가능한 재주는 아니었다. 지식과 경험이 없이는 감각이 거둔 정보를 제대로 분석하고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양 귀로 생생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 소리는 초속 약 340미터이고 바람은 태풍때에나 초속 40미터를 넘는다. 예민한 귀는 바람이 어디를 어떤 세기로 불어오는지 알 수있게 해줬다.

‘이건 완전히 거저 먹기나 다름 없는걸.’

유연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가 손에 든 활은 특수 제작된 컴포짓 보우였다.

그것도 금속과 카본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유연하의 캐릭인 광궁사는 스탯을 전부 근력에 올인한 올힘 캐릭터였다.

덕분에 250파운드가 넘는 장력을 가진 합성궁을 가볍고 안정적으로 당길 수 있었다. 30렙의 광전사 캐릭이 갖는 힘은 평균적으로 인간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지만, 모든 보너스 스탯을 힘에 몰아넣은 탓에, 근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은 범인보다 떨어졌다.

하지만 안정적인 힘으로 활을 당긴채, 조용히 바람을 기다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젠장. 왜이리 손이 떨리는거야.’

이유는 알고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가 표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놀이삼아 움직이는 표적을 쏴본 일은 있지만, 살아있는 표적은 쏴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인간형이라면 더욱 더 망설임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가 나름 냉정을 유지하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궁이나 검, 무도를 익히는 사람들은 내심, 자신의 기술을 실제 생활에서 활용하는 것에 대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정말로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것들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막상 활 시위를 당기고 인간을 겨누게 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거리는 약 200미터, 상대는 아직 자신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거리에 직사가 가능하다는 것은 대단한거야.’

그녀는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바람이 멈추는 순간을 노려서 활 시위를 놓았다.

활 시위를 놓는 순간, 심장마저 덜컥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평정심을 찾으며 화살을 다시 시위에 걸었다.

그녀가 쏜 활은 상대의 흉갑을 꿰뚫고 뒤로 빠져나가서 나무에 박혔다.

“적이다! 적의 공격이다!”

“바람의 정령이여! 우리를 보호하라!”

다크 엘프들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남아서 뒷처리를 하는 무리라고는 해도, 모두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바람의 정령의 가호를 믿고, 활을 꺼냈다. 다음 순간, 유연하가 두번째 화살을 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순식간에 날아가서 또 다른 엘프의 머리를 관통했다.

“헉.”

허무하게 동료를 잃은 다크엘프들도 당황했지만, 유연하 역시 당황했다. 그녀는 심장을 노렸는데, 바람의 정령이 화살을 빗겨나가게 해서 엉뚱하게도 머리에 맞은 것이었다. 보통 활은 곡사로 날아오지만, 그녀의 화살은 직사에 가까운데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왔기 때문에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도 궤도를 조금 트는게 고작이었다.

“모두 몸을 숨겨라!”

“대체 어디야!”

“북쪽 언덕입니다!”

“어떻게 저 먼 곳에서! 에인페리아인가!”

실제 역사에서 영국의 롱보우는 약 250미터를 날았지만 150미터 정도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곡사로 날아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직사로 200미터를 넘게 날아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이 만든 육체인 에인페리아의 육체는 형태는 인간이지만 그 능력은 일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렇기에 다크엘프들은 재빨리 당혹감을 수습하고 몸을 숨겼다.

몸을 제대로 못숨긴 다크엘프를 향해서 또 다시 화살이 날아왔고, 이번에는 어깨에 명중했다. 엄폐물에 몸을 숨긴 만큼 부상은 입힐 수 있어도 일격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접근전이다. 최대한 엄폐물을 사용해서 접근하는 거다!”

그들은 습격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늘을 향해서 발연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연화살을 날린 궁수가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무섭군. 무서워.”

박원기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한희연은 쓴 웃음을 지었다. 연하의 저격 능력이 원기는 물론이고 희연의 예상도 넘어섰다. 저격용 라이플이 필요없을 정도의 명중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 전쟁에서 죽는 사람의 7할은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해요.”

“그건 그렇고, 몸놀림이 정말 무서운 걸.”

박원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크엘프들이 무서운 기세로 숲속을 헤치면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재빨리 몸을 숨겨가면서 달려오는 모습은 전율스럽기까지 했다.

더 이상은 연하도 저격할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다.

상대는 평범한 10명의 군인이 아니라, 특수부대원도 우습게 볼만한 레인저들이었다. 다크 엘프 레인저, 그 사실을 생각하면 승산이 희박했다.

원기는 모조리 힘에 스탯을 불어넣은 전사 계열이었다. 반면 희연은 모조리 민첩성에 스탯을 불어넣었다. 일순간에 승부를 결정하는 검사다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궁사에게 민첩이 아니라, 힘이 필요하고 검사에게 힘이 아니라, 민첩이 필요할 줄은 몰랐어. 확실히 게임과 현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네.’

다크엘프들의 스피드는 엄청났다. 엘프답게 가볍고 민첩한 움직임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입체적으로 움직였다. 연하의 속사가 이어졌지만, 한명이 다리에 맞고 땅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광폭화!”

박원기는 스킬을 발동시켰다. 머리속으로 스킬명을 떠올리는 것으로 발동되던 스킬들이, 음성이 아니면 발동되지 않게 바뀐 것은 좀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한희연은 잠시 망설였다. 광폭화를 외치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왠지 비겁하게 느껴졌다. 아니, 비겁하다기보다는 공정하지 않게 느껴졌다.

상대는 죽는데, 자신은 죽지 않을 뿐아니라 고통마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광폭화를 사용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눈을 감은 상태로 가볍게 피해냈다.

‘기량 차이가 너무 나는걸.’

박원기는 화살을 몸으로 튕겨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광폭화는 고통을 느끼지않게 하지만, 분노에 취한 듯한 상태를 만들었다. 육체적 능력은 상승했지만, 여러가지 감각이 마비되었다.

두꺼운 갑옷 덕분에 화살을 튕겨내기는 했지만, 가볍게 화살을 피하는 두 소녀와는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만 하는거야.’

“으아아아아!”

그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거대한 청룡도를 휘둘렀다.

게임에서 나온 아이템은 아니었다. 게임용 아이템들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들고 온 활과 화살, 청룡도 등 무기는 특별 주문으로 제작된 물건이었다.

청룡도의 무게는 자그마치 72키로. 보통은 사람이 들기도 어려운 무게였지만, 힘에 스탯을 올인한 덕분에 가볍게 휘두를 수 있었다.

그리고 한희연이 든 무기는 마사무네였다. 현존하는 마사무네는 전부다 가짜라고 하지만 제법 잘만들어진 검들이 가짜로 둔갑하기 때문에 조제성이 꽤 비싼 돈을 주고 사들인 물건이었다.

방어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용 방어구들은 형태는 근사하지만 방어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방어용 가죽이나 철판을 덧대서 갑옷을 만들었다.

관절에 무리가 없이 자유로운 게임용 갑옷이라서 좋은 점도 없지는 않았다.

방어용 보강판들은 꽤 무거웠지만, 일반인을 넘어서는 힘을 지닌 아바타에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으랴아!”

박원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두른 청룡도에 아람드리 통나무가 쓰러졌다. 스치기만해도, 아니 막으려고 들어도 사망할 정도의 강력한 참격이었다.

다크 엘프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기선 제압으로선 나쁘지 않았다.

횡으로 휘두른 참격을 마치 땅 위를 미끄러지듯이 피하며 다가온 다크엘프의 모습에 원기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의 정글도가 왼쪽 발목에 박혔다. 그리고 원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떻게 된거지? 설 수가 없어.’

일어서려고 했지만, 원기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원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교전 중에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감각이 없는 탓에 원기는 뒤늦게 자신의 왼쪽 발목에서 피가 분출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다크엘프의 정글도가 그의 목을 깨끗이 잘라버렸다. 원기는 자신의 얼굴이 땅바닥을 구르는 동안에도 살아있다가, 약 십초 후 사망 판정과 함께 유령화 되었다.

‘하아. 결국 한명도 못죽인건가.’

박원기는 허무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한희연과 유연하가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았다. 힘에만 투자한 유연하의 움직임은 다크엘프들의 움직임을 따르지 못했고, 그녀역시 맥없이 쓰러져서 사망했다.

그리고 한희연은 꽤 분전했다. 제대로 검도를 익혔고, 수많은 대련 경험 덕분에 그녀는 두명을 빠르게 해치웠다.

‘저게 일본도의 사용법인건가.’

박원기는 내심 감탄했다. 한손으로 휘둘러서 길게 공격하다가, 양손으로 바꿔 쥐고 강하게 공격하는 수법에 제대로 막지 못하고 두명이나 사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얼마 안가 사망했다.

그리고 다크엘프들은 시신이 사라져버린 것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청룡도와 활, 화살, 일본도를 들고는 떠나 버렸다.

“이런...!”

박원기는 혀를 찼지만, 그 목소리가 적에게 들릴 리는 없었다. 일본도라면 몰라도 무식하게 무거운 청룡도와 일반인은 당길 수도 없는 활은 두고 갈 줄 알았지만, 금속 자체가 귀한 미드가르드에선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재빨리 부활한 박원기는 부활하는 것도 잊고 있던 한희연과 유연하를 불러서 부활시켰다. 둘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죽은 것보다도 죽인 것에 대한 영향이 큰 것처럼 보였다.

박원기는 자신이 한명도 못죽인 것이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졌지만, 동시에 그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적어도 며칠간은 잊혀지지 않겠지.’

10명의 다크엘프들과 붙어서, 7명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지만 그다지 압도적인 전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직도 과제는 많이 남았군...’

고통을 없애주는 무적의 스킬로 생각했던 광폭화가 쓰레기 스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성과라면 성과지만, 아픔이기도 했다.

팔이 날아가도, 다리가 날아가도 깨닫지 못하고 평상시처럼 움직이려고 든다면, 제대로 움직여 질 리가 없었다.

HP가 바닥이 날 때까지는 팔이나 다리가 잘리지 않는 게임과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현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목이 잘려나가도 즉사했지.’

게임과 현실의 괴리감, 이것으로 인해서 검을 난무하거나 화살을 난무하는 액티브 스킬들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버그성 기술들도 있을거야. 역시 게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뛰어난 전사들로서의 재능을 보여준 한희연과 유연하였지만, 게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물론 그들의 깨달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더 효과적으로 살리려면, 게임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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