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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16화 (16/497)

16화

살인의 충격, 사람에 따라서 그 충격의 정도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소녀에게 그것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얻은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희연은 텅빈 도장에서 혼자 검을 휘둘렀다.

도와 검의 구분 자체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혹자는 한쪽 날을 가진 것이 도이고, 양쪽 날을 가진 것이 검이라고 분류했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든 칼은 도였다. 일본도.

반면, 베기를 주로 하는 것은 도요, 찌르기가 가능한 것은 검이라고 분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도를 휘두르는 것을 검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본질은 살인술이에 지나지 않지.’

중국의 무도와 일본의 검도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달랐다.

중국의 무도는 불교와 도교의 수행에서 비롯되었다. 불교는 달마 대사가 전해준 요가를 바탕으로 육체를 단련했고, 도교는 제사에 쓰는 도구인 검을 통해서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었다.

육체를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다 보니, 싸움에도 강해진 것 뿐이다.

반면, 검도는 살인술이었다.

전국시대를 거치고 사무라이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질리도록 죽이고 죽임으로써 갈고 닦아진 살인술이 기본이었다.

훗날 정신수양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검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익혀온 모든 수련속에서 살인을 위한 동작들을 깨우치고 있었다. 검술은 살인술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던 동작들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면서 그녀의 검이 한층 더 날카롭게 변했다.

발키리는 그저 미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검의 재능에 뛰어난 미인을 찾은 것이었고 그녀의 재능은 천재라고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시 한번 전장에서 검을 휘둘러보고 싶군. 민첩에만 모두 투자한 건 어리석었어.’

그녀는 전투를 되돌려보면서, 매 순간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되돌아 보았다. 팔을 베일 때의 아픔도, 다리가 잘릴 때의 고통도, 옆구리가 베일 때의 충격도 목이 날아가던 순간의 감회도 모두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고통에 익숙하다. 아픔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극도의 긴장과 흥분은 고통을 잊게 만들어주는 효과까지 있었다.

그녀가 관심을 두는 것은 부상을 입었을 때의 영향이었다. 상대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 충격을 통해서 어떻게 상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지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블러드라인이라는 게임에서는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죽고 죽이는, 고통과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걸어온 검의 길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상대를 위압하는 강렬한 살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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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보인다. 보여.”

유연하 역시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그녀가 살인을 통해서 얻은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한희연이 죽고 죽이는 혈투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녀는 엘프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보통 시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듣고 나면, 계속 들려오는 법이었다.

그녀는 바람의 소리도, 바람의 모습도 지금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엘프가 되었을 때의 읽은 바람의 모습과 소리가 지금도 보이고 들렸다.

감각적으로는 엘프와 비교도 안되니, 선명함은 떨어진다고 하지만 한번 보이고 한번 들린 것은 결코 잊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동네에서 제법 떨어진 국궁장을 향했다. 다시한번 양궁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녀가 부상에서 회복했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화살을 날렸다. 세찬 바람 속에서 그녀의 화살은 크게 휘면서 표적 구석에 꽂혔다.

“아가씨, 좀 아쉽게 되었네. 하필이면 그때 바람이 불어서.”

옆에서 활을 당기던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음 바람을 기다렸다. 바람이 잦아드는 순간을 읽어서 쏘는 것은 너무 간단했다. 그녀는 세찬 바람이 부는 그 순간만을 노려서 활을 쐈다.

그리고 옆의 과녁에 적중했다.

“이런, 또 바람이 세게 불었네. 옆 과녁에 맞아버렸어.”

“오늘은 운이 없나봐요.”

유연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옆 과녁을 노렸다는 사실은 그녀를 제외한 누구도 몰랐다. 그녀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약한 바람 속에서도 그녀가 의도한 대로 표적에 화살을 꽂아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궁술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장에서 적을 꿰뚫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그것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다지 개의치는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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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데?”

박원기는 네로의 신상 명세를 재삼 확인했다. 세계사 교사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하반신 마비를 겪게 되었다.

“헤에, 선생님이었나.”

하반신 불수가 된 후, 가르치던 생도들과 블러드라인을 시작한게 게임 생활의 계기였다. 블라라는 길드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학생들이 졸업하고 떠나가면서 길드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령길드원만 남은 상태였다.

테란이다 아이롱이다 하는 게임으로 다들 옮겨갔지만, 컴퓨터의 사양 때문에 아직도 블러드 라인을 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할게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특히 블러드 라인의 단말기는 국가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공급되는 물건이었다. 젊은 나이에 장애를 얻었으니 절약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왠지 설명이 능숙하더라니...’

박원기는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조건이 좋은 상대였다. 게임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과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역사 특히 전쟁사에 강하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조제성을 통해서 이야기를 넣어보는게 좋겠군. 거절할 리는 없겠지.’

이세계의 신이 나와서 아무댓가 없이 도와달라고 하는 그런 흔히 볼 수 있는 모험담과는 달랐다.

적어도 목숨을 잃을 위험성은 없고, 돈으로 얻을 수 없는 댓가를 지불할 뿐만아니라, 조제성을 통한 금전적인 보상까지 따른다.

이것을 마다할 바보는 없었다. 특히 보상이 자신의 건강일 때는 더욱 더 그러했다. 다시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된다면 그는 결코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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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기를 사용하는 놈들이 있다고?”

다크엘프의 성전사 미라엣은 무기들을 살펴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세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무기만 남기고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은 신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했다.

“이상하군. 아무런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아. 그건 그렇고 이걸 가볍게 휘둘렀다니, 대단하군. 나와 같은 타입의 에인페리아였나?”

청룡언월도는 혼자서는 도저히 휘두를 수 없는 무게였다. 운반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했다. 그렌은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는 에인페리아였다. 다크엘프들 가운데에서는 이질적인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질좋은 철로 만들어진 청룡도를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활도 그렇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단단한 활이 있지? 이걸 가냘픈 계집이 썼단 말이야?”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으로 인해서 문명이나 문화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미드가르드였던 만큼, 무기 역시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엘프들이 가진 궁은 단순궁을 신성력 혹은 정령력으로 강화한 것이었다. 성능 자체는 복합궁에도 미치지 못했다. 활을 만드는데 필요한 질좋은 나무 자체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화살도 깃 부분을 제외하면 전부 금속으로 만들어졌군. 대체 어떻게 이렇게 곧게 만들 수 있는거지? 그리고 깃도 무슨 재질인지 잘 모르겠군.”

“일단 본국으로 가져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에인페리아가 세 명이나 나와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웃기는군.”

불사의 전사, 에인페리아는 신이 부활시킨 전사를 의미했다. 하나를 부활시킬 때마다 들어가는 신성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때문에 에인페리아를 부활시키는 것은 현재 엘프들을 압도하고 있는 프레이라고 해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에인페리아가 될 것을 약속받은 전사는 현재 1000명의 엘프 학살부대 가운데 세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죽은 이들은 모두 되살아나지 않았다.

“멍청한 프레이야. 엘프들을 죽일 수 없다고 에인페리아를 동원할 셈인가? 조만간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되겠군.”

그는 임무 달성이 머지 않음을 느끼고,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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