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17화 (17/497)

17화

“헤에, 이곳이 병원입니까? 멋진 저택처럼 보이는데요. 호텔 같기도 하고.”

“글쎄. 정식 병원은 아니지.”

조제성은 네로, 곧 장수한에게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장수한은 사방을 둘러 보았다.

“병원이 아닌데 절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병원이 아니니까 치료할 수 있다고 봐야겠지. 이곳은 여신의 계약자들의 주택이자, 신전일세. 병원은 아니라고 봐야지. 이곳이 바로 신전일세.”

조제성이 문을 열자, 장수한은 휠체어를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의 큰 공간에 중세 유럽이라기보다는 그 이전 유럽 풍의 석조 건물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거 인디아나 존스의 영화라도 보고있는 듯하군요.”

“엘프들의 신전은 이것과는 좀 느낌이 다르긴 했지만, 나무로 신전을 짓는 것은 무리였지. 빌딩 속에다가...”

조제성은 리디아와 협의하에 저택 최상층에 신전을 지었다. 엘프들의 나무 신전을 만들 수없었기 때문에 반신족에 대한 일반적인 신전의 양식을 빌려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택 내부에 존재하는 신전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충분히 경건함과 위압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분이 엘프인가요?”

“그래. 엘프족의 황녀, 리디아 전하시지.”

엘프족의 황제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도시의 시장급도 안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조제성은 격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여신이 제국 건국을 천명한 이상, 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제국을 만들고자 한다면 격식은 빠질 수 없었다.

“엘프로 안보이는군요. 마법인가요?”

“예. 마법 아이템을 이용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누구시지요?”

“아, 소개가 늦었네요. 광전사하던 박원기예요. 보다시피 미이라에 가까운 꼴이지만. 반가워요. 네로형.”

상처의 대부분이 치료되었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원기는 여전히 온몸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그가 여신님과 계약한 최초의 계약자일세. 자네를 여신님께 추천한 사람이기도 하지.”

“예? 그거 굉장하군요. 광전사 너 정말 대단한데.”

“별로 대단할 건 없어요. 제가 한 계약 가운데는 여신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만약 여신을 배반한다면, 소멸한다는 조건이에요.”

박원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물론 그런 계약은 존재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인 여신을 적으로 돌릴 수가 있을 수 없었다. 자살이라도 하려고 들지 않는한은.

“그런 계약 대신에, 그는 이쪽 세계에서 여신님을 대신해서 일을 추진하고 판단할 권한을 갖고 있지.”

“절대 아닙니다. 조회장님하고 발키리님과 상담해서 결정할 수 있을 뿐이에요. 조회장님 권한이 더 클겁니다.”

“이 친구가 여신님께 대한민국에서는 기업인과 손을 잡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으실 수 없을거라고 조언한 친구야. 덕분에 내 가족이 되살아날 수 있었지.”

“예? 그런 뉴스는 본적이 없었습니다만.”

“물론이지. 그들은 이쪽 세계에선 여전히 죽은 사람들이니까. 여신님의 세상인 미드가르드에서 살고 있다네. 엘프들과 함께 살고 있지.”

“환영합니다. 여러분.”

리디아가 기도를 마치고 몸을 돌려서 그들을 향했다. 기도 도중에 난입한 꼴이긴 했지만, 그녀는 이쪽 세상의 지식을 접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을 지켜서 온 것이기도 했다.

박원기는 그녀의 기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엘프들의 기도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열심히 기도한 한 시간이 그가 사용하는 신성력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았다. 돈으로 비유한다면 그녀가 한시간 성심껏 기도해서 천원을 만들어 낸다고 하면, 원기가 사용하는 신성력은 사소한 것도 수천만원 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데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리디아나 조제성이 보이는 여신 프레이야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을 보고 있으면, 함부로 여신 캐릭터를 가지고 놀기는 어려운 면이 있었다. 양 어깨에 걸린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었다.

“미인이시네요. 전형적인 북구 미인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데 엘프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서른 전후의 조금 딱딱해 보이는 인상의 금발 미녀의 모습을 한 리디아를 보면서 장수한은 조금은 실망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리디아. 이분에게 네 본모습을 보여드려.”

지극히 정중함과 공경을 표하는 조제성과 달리, 박원기는 리디아에 대해서는 가볍게 대했다. 상하관계를 잘못 만들면 앞날이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리디아는 마법을 해제했고 그곳에는 십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 엘프의 모습이 드러났다.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 장수한은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잠시 경직 후에 그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판타지 매니아였나. 혹시 엘프 오타쿠?’

“정말 귀엽, 아니 아름다우세요. 황녀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시지요? 백살은 넘으신 건가요?”

“이쪽 나이로 열일곱 정도 되요. 엘프들의 평균 수명은 백살이 좀 안된다고 보시면 되요. 현대인보다는 조금 장수한다고 할까요?”

“예. 원기님이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원기님? 광전사야. 어떻게 된거냐?”

“여신님이 리디아에게 이쪽 세상에서는 제 지시대로 움직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야 시간이 남아도는 편이니, 그리 어려울 건 없다고 생각해서 승낙했지요.”

“으, 부럽군. 하지만 내 나이를 생각하면 범죄인가. 10년만 젊었으면 말이야.”

“여신님의 계약자가 된 이상, 자네도 미드가르드에 방문할 수 있게 될걸세. 그곳엔 엘프들이 많으니 어떨지 모르지.”

“꼬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리디아만 해도, 인간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편이에요. 저 이마에 주름을 보세요.”

“죄송합니다. 여신님의 계약자들이신데.”

“거기서 인정하시면...”

장수한, 네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공식적으로는 28살의 천재 의사로 되어있습니다. 핀란드쪽에서 온 것으로 되어있고 말이지요.”

“비공식적? 핀란드라니 조금 어색하군요?”

“핀란드야 한국에선 건강에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리디아 황녀님은 공식적으로는 한국에 의료 면허가 없습니다. 발급받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이런저런 귀찮은 일이 많아서요. 그래서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미용사, 그녀가 치료에 사용하는 포션은 건강음료 겸, 미용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회장님의 힘이라면 공식적인 의사로 만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조제성은 장수한의 질문에 씁쓸함을 드러냈다.

“몇몇 고위층과 접촉한 결과, 미용사로 두는 편이 상류계층들만 이용하기에 좋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제한된 약품이라면, 먼저 상류계층들이 이용하고 싶다는게 그들의 속내지요. 실제로 황녀님을 통해서 발휘되는 치유의 힘도 한계가 있는만큼,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여기는 병원이 아니라, 미용실이 되는 겁니까?”

“보통은 에스테라고들 부른다네. 일단 최상층은 신전이, 그 아래층은 여러분 계약자들이 머무는 숙소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저택의 1층 북관쪽이 대외적인 미용손님들을 받게 될겁니다.”

조제성의 말에 장수한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

“이건 좀 억울하군요. 신의 은총마저 돈으로 상류계층들이 점유한다는 것이...”

하반신 불수가 된 후, 오랜시간 고생해온 그는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박원기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벌인 일이니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 만약 그의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분노했을 터였다.

“착각하지 마세요.”

곱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바로 리디아였다.

“이곳의 인간들은 프레이야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곳의 인간들을 위해서 낭비할 은총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계약자들의 도움이, 그리고 이곳의 돈으로 사들일 식량과 무기가 아니라면 프레이야님이 이곳에 힘을 쓰실 이유는 없을 겁니다. 저희 세계에서도 죽을 자는 죽습니다. 아니 죽지 말아야 할 이들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강한 눈빛에 세 사람은 한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엘프들의 사정이 안좋다는 것은 장수한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보탬이 되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 낭비할 은총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게 저희들의 생각이로군요."

장수한은 한숨을 쉬었다. 리디아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의 은총은 프레이야의 자녀들인 엘프들에게서 온 것이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인간들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군요. 함부로 말해 죄송합니다. 저도 밥값은 해야겠지요.”

장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약속받은 기적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여신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보답할 각오를 다졌다.

“광전사야, 우선 나좀 미드가르드에 안내해주라. 뭘 알아야 작전을 짤 수 있지.”

“알겠어요. 그럼 단말기가 설치된 방으로 안내해 줄께요.”

박원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장수한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가장 무겁기도 했다. 처음에는 큰 힘이 주어졌다고 좋아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그저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그가 좋아하던 영화의 대사가 머리속에 맴돌고 있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