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오오, 내 다리로 걷는다.”
장수한은 이미 만렙의 캐릭들을 여럿 가지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엘프 마법사였다. 길드를 탈퇴한 그는 박원기의 길드 프레이야에 가입했고, 길드룸을 통해서 이쪽 세상에 도착했다.
“이거 정말 굉장한걸. 머리속으로 알고 있던 것과 느끼는 것이 전혀 달라.”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로 제자리에서 뛰다가 걷다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게임속에서는 자신의 다리로 걷는다는 느낌이 없었을테니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현실 세계의 수한의 몸도 치료받게 될 터이지만, 리디아가 치료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만월의 날을 기다리기로 한 상태였다.
원기의 상처처럼 포션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성직자의 신성치료가 필요하지만, 실패확률이 있다는 이유로 약간 미뤄진 상태였다.
그는 탭댄스를 추려든 듯 움직였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어서 지켜보던 원기는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기쁨에 젖어 있었다.
“와오! 이게 다 엘프들이란 말이야?”
그는 수만명이 모인 엘프들의 도시, 아니 현재는 도시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웠다. 엘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좁고 튼튼한 성채 속에 강제로 수용한 상태였다.
엘프들은 미국산 오렌지와 한국산 사과, 필리핀산 바나나들을 먹으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조차 그는 감격하면서 사방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좀 진정해요.”
“이게 진정할 일이냐? 엘프야. 게다가 생활 양식은 고대 북구 유럽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너무 기뻐하다 못해 추하게 까지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한이었다.
‘판타지가 좋아서 세계사를 전공했다는 괴짜이니...’
그가 블러드 라인에 집착한 이유를 원기는 알 수 있을 듯 했다. 원기 자신도 운명이라는 게임에 오래도록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네가 광전사에 집착한 이유를 알거 같다.”
한참을 돌아다닌 그가 한적한 곳에 앉아서 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렇지요? 이런 곳에서 싸우려면, 광전사와 광포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유감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설령 상처를 입고 멀쩡히 움직였다고 해도, 발전이 없지. 네 숨은 장점도 살릴 수 없었을거야.”
“예?”
“우선 한희연과 유연하, 두 아가씨는 스포츠 선수들이지. 스포츠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아픔에 익숙해. 그건 이해할 수 있지?”
“예.”
“아픔에 익숙하다는건, 머리 속에서 아픔을 느끼면 자동적으로 아픔을 덜기 위해서 뇌내 호르몬을 분비한다는 의미야. 이게 일종의 몰핀같은 마약과 닮았지. 그래서 운동 중독이라는게 있는거야. 몸을 혹사하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는거지. 아픔 뒤에 몰려오는 시원한 쾌감. 아픔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그 상쾌함까지 동반한 쾌감을 즐기게 되지. 그런 만큼 그녀들은 죽음이 두려울 뿐, 고통은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아.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면 고통을 동반한 죽음이 일반인이 생각할 만큼 두렵지는 않아.”
“그런가요.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했어요.”
원기는 두 소녀의 싸우는 모습을 떠올렸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장엄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녀들이 광폭화를 사용하지 않고 싸웠다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닌건 너도 마찬가지야.”
“예? 전 운동 같은거 안했는데요. 아픈 것도 무섭고.”
“네가 고통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는 이유는 뭐지? 바로 그 끔찍한 화상 때문이야. 넌 시력을 잃을 정도로 큰 화상을 전신에 입었지. 그런 네가 고통에 익숙하지 않을리가 있을까?”
“에. 그건 좀.”
“이상하다.”
장수한은 갑자기 원기에게 손을 뻗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걸?”
“아, 머리속으로 클릭하는 느낌으로는 스킬이 발동되지 않아요. 입으로 분명히 말해야 스킬이 발동하더군요. 하지만 이쪽 세계에는 HP가 없어서 마법 스킬이 아무런 데미지를 주지 못해요.”
“마법시전. 파이어 애로우.”
“으아악!!”
수한의 지팡이에서 뻗어나온 불꽃이 정면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던 원기의 팔에 적중했다.
원기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마법시전. 큐어.”
그렇게 수한이 말하자, 곧 원기의 팔에 있던 상처가 나았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마법 스킬은 같은 게임 캐릭터에게는 통해요!”
원기가 열받아서 말하자, 수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안. 그렇게 아파할 줄 몰랐다. 위력이 약한 마법이니까. 하지만 보통 사람은 불꽃에 팔을 당했다면, 너처럼 금방 회복되지는 않아. 설령 상처가 나았다고 해도 말이지. 고통의 여운으로부터 쉽게 회복되지 않지. 하지만 넌 어때? 금방 멀쩡해지지 않았어?”
“그, 그런가?”
“그래. 상처에서 느껴지는 기분은 어때? 그냥 아프고 끝인거야? 왠지 모를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아?”
“.....”
원기는 입을 다물었다. 뜨거움이 가시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시원함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넌 아픔을 지나치게 두려워해. 고통은 즐길 수 있는 감각중 하나야. 꼭 변태만 고통을 즐기는건 아니지. 매운 맛은 고통이야.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매운 맛을 즐기지만, 익숙치 않은 외국인에게 먹이면 그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지.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사고를 경험한 만큼 넌 특별해. 굳이 광포화로 도망칠 필요는 없어. 매운 맛을 떠올려 볼 필요는 있어. 못말리는 짱구라는 만화에서 나오는 명언이 있지. '참고 인내하면 쾌락이 된다.'”
“그런가요.”
원기는 조금은 당혹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기분으로 가슴이 가득 차는 듯 느꼈다. 불행한 사고로 동정을 받아본 적은 많았지만, 그것이 가치있는 경험이라고 봐주는 이가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래. 내가 네게 추천하고 싶은 직업이라면 전사야. 광전사가 아니라, 공포전사.”
“아, 어그로를 빨아들이는 전사인가요.”
“그래. 그리고 그것만은 아니지. 넌 한희연에게 어울리는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냐?”
“검사요. 아무래도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전사가 아닐까 싶어요.”
“땡! 틀렸어. 전국시대 사무라이는 활과 창을 쓰는 전사지만, 에도시대 사무라이는 검을 쓰는 도적이야.”
“도적?”
“그래. 민첩한 몸놀림, 가벼운 복장, 예리한 공격이 주가 되지. 일본 애니나 드라마에서 제대로 무장하고 칼부림하는 사무라이 본 적 있어? 일본도라는 것 자체가 전쟁용은 아니야. 보통 전사는 탱커라고 해서, 적의 시선을 끌고 자신에게 공격을 집중시키지만 공격력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 마법사와 도적, 궁수가 진짜 데미지 딜러지. 한희연은 전사가 아니라, 도적 캐릭이라고 봐야 해. 그리고 네가 말한대로 HP가 없는 적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쪽 세상에서 쓸모있는 직업은 몇개 없지. 기사는 방어력이 높아서 의미가 없어. 반면 전사는 근력이 높아서 쓸모있지. 검사 역시 공격력에 스탯이 많이 분배되어 있어. 광전사도 광폭화 보너스는 공격력으로 많이 가있지.”
“그렇군요. 도적으로 가서 민첩을 최대한 올리는게 좋겠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연하는 전사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그래. 능력만으로 보면 그렇지. 둘이 렙업하는 것 보고 놀랐다. 그 둘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도적과 궁수의 스킬은 그녀들에게 도움이 될만한게 많아. 예를 들면 궁수의 스킬 중에 호크 아이라는게 있지. 이건 시야를 줌으로 당기는 거야. 네 말대로라면 시험해볼 가치는 있지. 패시브 스킬도 액티브 스킬도 쓰기 나름이야.”
“음. 생각보다 많이 박식하시네요. 제가 보는 눈이 있나봐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두꺼운 갑옷을 입고 전장에 서면, 운동신경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어. 그리고 길고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잡병들은 떼로 쓸려 나가지. 청룡언월도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난 양손에 크레이모어를 두 자루 드는게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광포화는 써선 안돼. 아픔이 있어야 몸을 보호하는 법을 배워. 블러드라인 아무리 해봐야 몸쓰는게 늘지 않는 것과 똑같지.”
“그렇군요. 제가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재능이라기보다는 능력, 포텐셜이라고 봐야지. 타고나는 재능도 있지만, 어떤 사건 등을 계기로 얻어지는 능력도 있어. 아픔에 대한 두려움만 극복하면 넌 멋진 전사가 될 수 있을거다. 워 크라이(전투의 함성) 같은 스킬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계에서 적용된다면 그건 사기에 가깝지만, 스킬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함성만으로도 효과는 꽤 클거야. 마법도 마찬가지지. 상대의 눈을 현혹하는 페인트로 쓸 수 있다고 봐.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다고 해도 불덩어리가 날아오면 누구라도 피하게 마련이거든.”
원기는 수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였다. 데미지를 주지 못한다고 해도 빛과 소리는 그대로 구현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충분히 적들을 혼란시킬 수 있을 터였다.
워 크라이 스킬의 무서움을 그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1렙에 반경 10미터 내에 있는 적 모두에게 1초간 스턴, 분노(어그로) 상승.
레벨에 비례해서 반경 50미터까지 확대, 스턴 시간도 3초까지 증가였다.
블러드라인이라는 게임에선 몹몰이라고 해봐야 다섯 마리가 고작이니 그리 밸런스에 영향주는 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스킬이 그대로 먹힌다면, 그야말로 악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스킬이 안먹힌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올 것이고, 그정도라면 소음 수류탄에 맞먹는 효과가 나올 터였다.
스킬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주변 적들의 이목을 끌어들이기엔 충분할 터였다.
‘몰매맞기 딱 좋은 스킬이긴 한데...’
“공포 전사 한번 키워봐야겠네요.”
“너도 게임엔 빠삭하구나.”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시스템을 전혀 모르면 게임을 잘 할 수는 없지요. 사고난 후로 할 거라곤 게임 뿐이었는데.”
원기는 미소를 지었다. 네로를 스카웃 한 것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말도 잘 통하고 느낌이 좋았다.
“난 이곳에 좀 더 머무르고 싶은데, 괜찮을까?”
“자유롭게 머무세요. 참, 여신의 계약자들에게는 여신의 감시의 눈이 붙는답니다.”
“헉, 사생활 침해 아니야?”
“글쎄요. 어찌 될려나.”
원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제로 계약자들 모두에게 발키리가 붙어있는 상태였다. 사고 등으로 죽음을 당하더라도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의미도 있고, 누설이나 배신 등의 걱정도 있기 때문이었다.
조제성 같은 인물은 얻기도 힘들지만, 그가 배신하면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연애는 어떻게 될려나. 엘프 애인이야말로 남자의 로망인데.”
“아, 그건 상관없을거에요. 계약자라는 입장을 내세우거나, 폭력 등 비정상적인 수단만 쓰지 않으면 하렘을 만들더라도 상관치 않는다고 했어요. 다만, 꼬시기가 쉬울지는 잘 모르겠네요.”
“오오, 여신님 감사합니다.”
하늘을 향해 외치는 그를 보고, 원기는 피식 웃으며 블러드라인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새로 키워야 하는거로군. 그래도 재미는 있겠어.”
전사, 도적, 궁사의 조합이라면, 광전사 세명 보다는 훨씬 무난하게 레벨을 올릴 수 있을터였다.
“검사보다는 도적이라니...그건 미처 생각못했네.”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한희연과 유연하에게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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