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생각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최대한 몸으로 버티는게 전사예요. 강한 적이 있으면 꼭 이기려고 들지 마세요. 일격에 해치울 수 있는 약한 적만 해치우고,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면 우리가 해치울게요.”
한희연의 말에 피투성이로 바닥에 드러누운 박원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단 한번 그녀의 몸에 공격이 스치지도 못하고, 셀 수없이 많은 치명타를 맞았다.
하도 맞고 구르다보니, 굴욕감도 사라졌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장수한의 말대로, 고통은 익숙해 질 수 있었다. 공포와 고통은 도망칠 수록 커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를 악물고 각오한 상태에서 맞으면, 도망치다 맞는 것보다 훨씬 덜 아팠다. 오기로 고통을 극복하면서 싸우는 것을 익혔다.
올 힘 캐릭이니만큼 두꺼운 철갑을 입는게 가능했다.
게임에서 쓰는 화려하고 멋진 갑옷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기의 공격력 수치와 상쇄되는 것이 방어력이라, 공격력 설정이 없는 현실의 무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어효과가 없을뿐 아니라, 웃긴 것 중 하나가 갑옷을 맞아도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화려하고 큼직한 장신구 부분에 맞아도 몸에 충격이 왔다.
결국 몸에 붙는 작고 옵션이 좋은 갑옷을 장착한 후, 그 위에다가 두꺼운 철갑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남자용 갑옷은 좋은 갑옷일수록 크고 화려해서 적당한 것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한희연과 유연하는 여성용 갑옷 자체가 비싸고 좋을수록 비키니 속옷에 가깝다는 사실을 반겼다. 위에 제대로 된 갑옷을 걸치기에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대련을 통해서 덜 아프게 맞는 것, 치명상을 피하는 것은 이젠 어느정도 가능해졌다. 거대한 쌍검을 휘두르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견제하며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실제 전장에선 자신 말고도 공격해줄 동료가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전사의 역할, 탱커로서 상대방의 공격에 견디면서 동료가 공격할 시간을 버는 역할에 자신이 붙었다. 일주일간 캐릭터를 키우면서 특훈을 거듭한 결과였다.
현재 전사렙 50, 인간을 완전히 넘어선 오우거 급의 완력과 다양한 스킬을 갖추고 있지만, 도적렙 50, 스토커로 전직한 한희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국시대 사무라이는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는 전사라면, 에도시대 사무라이는 검사, 블러드 라인의 직업으로는 도적이에요. 방구도 갖추지 않고 예리하기만 한 칼로 1대 1 대결에 특화된 싸움꾼이지요.”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선 과묵한 편인 한희연이었지만, 검술 이야기만 나오면 불타올랐다. 박원기는 덕분에 그녀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도류의 달인으로 미야모토 무사시를 꼽고, 이천일류를 전형적인 이도류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달라요. 지금의 완성되고 세련된 이도류는 이천일류와는 다르지요. 왼손에 코타치(소태도) 오른손에 타치(태도)를 드는 이도류는 1대 1에 특화된 검술이에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1대 1에는 하나의 검을 주로 사용했고, 자신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다수를 상대할 때는 전장에 널린 버려진 장검들을 사용해서 이도류를 펼쳤어요. 그게 이천일류지요. 다수의 잡병을 상대로 위용을 떨치지만, 대등한 기량의 상대에겐 그다지 통하지 않는 말 그대로 장수의 검술이에요. 그리고 원기 오빠가 익힐 것은 바로 그 장수의 검술이에요. 저처럼 민첩하고 교활한 상대에게 이기려고 들지 마세요. 버티면서 시간을 끌면, 저랑 연하가 끝장을 낼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그 체격은 정말 반칙이네요.”
“좀 그렇지?”
원기는 피식 웃었다. 신체 조건은 승패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원기는 원래 운동을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특별히 운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검도나 양궁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은 두 소녀와는 상황이 달랐다. 게임 아바타에서 얻은 경험을 본체에서 살리려면 신체 조건이 같은 쪽이 좋았다.
반면 스포츠와는 인연이 없는 원기는 그런 제약 조건이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신체 조건을 확 바꿔버렸다. 캐릭터 생성시 최대 키인 2미터10센티 까지 키운 것이었다.
몬스터와 착각할 만한 덩치빨로 만들어 둔 덕분에, 큼직한 대검을 휘두르면 그 반경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컸다. 민첩의 극에 달해서 유령처럼 잔상이 남을 정도로 움직이는 한희연도 쉽게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운동신경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덕분에, 몸을 움직이는 감각이 둔했지만 역으로 그 덕분에 큰 덩치로 바꿔도 적응할 수 있었다.
반면 한희연이나 유연하의 경우는 극한까지 신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때문에 신체 조건을 바꾸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설사 게임 캐릭터에 적응한다손 쳐도, 현실 세계에서 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임에서는 거구가 되었다고 힘에 보너스가 붙지는 않았지만, 아스가르드에 들어서면 신체조건에 맞춰서 힘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덩치 자체가 주는 위압감은 충분히 전투에 도움이 될 터였다.
“그건 그렇고, 마법은 쓸만 해요?”
“이대로는 영 아니다.”
수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을 눈속임용으로 사용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결정적인 것은 게임에 설정된 사거리 문제였다. 게임에선 떨어진 곳에 있는 몹을 공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의 최대 사거리는 보통 30미터로 설정되어 있었다. 게임에서는 그정도로도 나쁘지 않았다. 시전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보통 몬스터가 눈치를 못채는 거리이고 첫 일격을 맞고 전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선 30미터면 바로 코앞이었다.
소규모 전투라면 몰라도 대규모 전투에선 거의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끔찍한 것은 시전할 때 소리까지 난다는 사실이었다. 적이 눈치챈 상태에서 꼼짝도 못하고 스킬 준비하고 있다면 그건 그냥 죽여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버프 마법은 파티 멤버들에게만 쓸 수 있었다. 당연히 게임 캐릭터가 아니면 파티를 맺을 수 없었다. 게임 캐릭터의 강화는 나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마법사나 신관 캐릭을 동원한다는 것은 아까웠다.
게다가 날고기는 다크엘프 레인저들이 상대라면, 30미터의 거리는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마법사나 신관 캐릭터로는 다크엘프 레인저에게 순삭 당하기 딱 좋았다.
100미터는 족히 떨어진 거리에서 순식간에 날듯이 다가와서 그들을 덥친 다크엘프들의 움직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마법은 쓸 수 없을 것 같다. 난 성직자 계통을 해야겠어.”
궁사의 경우 트리플 샷같은 액티브 스킬이 있지만, 이것은 사거리가 15미터였다. 사거리가 15미터라기보다는 대상이 15미터 이내에 들어오지 않으면 기술이 발동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화살에 마법 속성을 부여하는 것는 스킬을 사용하면, 활을 쏘는 것은 연하에게 달려있는 만큼, 사거리 제한을 받지 않았다. 가장 쓸모있는 스킬은 폭발 속성의 마법을 싣는 것이었다.
폭음과 폭발연출이 화살과 병행되면 적들을 동요시킬 수 있었다. 단순히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이지만 보기에는 강력한 폭발로 죽는 듯이 보일 것이었다.
추가로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가이드 비콘 스킬이었다. 가이드 비콘 스킬은 궁사의 상위 직업인 스카우터의 스킬이었다. 적을 확인하고 적의 머리위에 가이드 비콘을 찍어두는 능력이었다. 이것을 사용하면 적이 건물 안에 있어도 어디있는지 파티 멤버들에게 확인이 가능했다.
타겟이나 위험한 적을 표시해서 전투가 쉬워지게 만들 수 있었다.
성직자의 경우엔 파티 멤버에 한해서 사거리의 제한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적당한 곳에 숨어서 체력만 회복시켜줘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꽤 장기전이 될 것 같은데. 슬슬 다크엘프들을 청소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저들을 정리하면, 더 큰 규모의 적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기회가 되면 다크엘프들을 싹 정리해서 프레이를 소멸시키고 싶지만...”
“개종을 시키던가, 학살을 해야 한다는 건가. 쉽지 않은 문제네. 특히 종족신이 있을 경우엔 개종이라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니.”
엘프가 자기 종족신인 프레이야를 배신하고 다른 신에게 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크엘프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좀 벌게 된 것은 다행이지요.”
원기의 선견지명 덕분에, 엘프들은 세스룸니르를 중심으로 한 곳에 뭉쳐있는 상태였다. 외부 세계에서 식료를 들여오기 때문에 외부로 출입하는 출입구조차 최소한으로 해둔 상태였다.
다크 엘프들도 주변을 정찰하긴 했지만, 세스룸니르에 쳐들어 올 생각은 하지 못하고, 주위를 적당히 감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외부로 식량을 구하러 나오는 엘프가 있으면 공격하려고 노리고 있을 뿐, 직접 세스룸니르를 공격할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다.
혹시 합류하지 않은 엘프 마을이 있는지 몰라 탐색만 헛되이 계속 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식량 확보를 위해서라도 숲으로 나와야 정상이었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굶어 죽는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 멍청한 엘프들은?”
“아마도 여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프레이야 여신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저 어리석고 수동적인 것들 다운 최후일지도 모르지.”
“어찌되었든 현 병력만으로 세스룸니르에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야. 결계도 충실해서 화공도 마법도 통하진 않아.”
엘프 말살의 명을 받은 다크 엘프들의 수뇌부들은 허탈감과 초조함, 이해 불가능한 엘프들의 대처에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세스룸니르는 프레이야의 성소, 성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엘프들의 생명력을 비롯한 모든 능력이 상승했다.
적대신의 성역에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일단 올 겨울까지는 지켜보도록 하지. 그래도 저들이 안움직인다면 공격할 필요가 있을거야. 증원 요청을 하는게 좋겠지.”
“그렇게 전해 두지. 미라엣 사령관.”
전령으로 온 다크엘프가 사라지자, 학살부대의 리더 성전사 미라엣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이 대륙에는 프레이야와 굴베이그를 제외한 반족의 신들은 소멸이 확인된 상태였다. 아에기르는 바다로 도망쳐서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원군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정말 그들이 주장한 평화로운 종말을 맞으려는 건가?’
반족의 신들을 섬기는 인간 잔당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이미 마법과 신성력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마법과 신성력, 그리고 정령력까지 모두 부여해주기 때문이었다.
그저 육체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만큼 녹녹한 세상은 아니었다.
‘싸우지 않고 죽은 셈인가? 멍청한 것들.’
그는 경멸과 짜증을 섞어 저주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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