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난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원기는 심한 자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에는 리디아가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고 있었다. 그는 리디아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인 다음, 옷을 벗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리디아는 여신의 명에 따라서, 그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온 몸이 붉게 변해서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는 엘프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원기는 심한 자기혐오감에 빠졌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애게 채였다고, 이게 무슨 짓이지?’
“됐다. 다시 입어라. 미안하다.”
원기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심한 화상을 입고, 일상 생활만이 아니라 성생활도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가 아쉬워했던 것은 성관계가 아니었다.
온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 온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를 절망하게 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힘과 권력으로 무력한 소녀를 짓밟는 것은 폭행이었다. 그리고 그런 짓거리를 저지른 그를 과연 누가 좋아해 줄 것인가.
여신의 힘을 이용하면 광신자들을 이용해서 하렘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 수는 없었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독점욕이 훨씬 강한 법이었다. 그리고 솔찍히 한희연에 대해서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안해보고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 잠시만 참아다오. 이 이상은 아무짓도 안할테니까.”
리디아가 옷을 입자, 그는 리디아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사람의 온기가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리디아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봐. 리디아. 리디아.”
원기는 놀라서 리디아를 불렀지만, 그녀는 마치 기절하듯 잠이 들어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가. 정말 못할 짓을 했군.”
원기는 씁쓸하게 웃은 다음, 그녀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은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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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전하.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리디아를 전하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것은 조제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프레이야 여신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프레이야 제국 건국을 위해서는 기강이 필요했다.
그는 계약을 넘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프레이야 여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서, 이쪽 저쪽에서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충성심과 신앙심은 리디아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뿌리깊은 인간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가 외부인이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말씀하세요.”
“혹시, 여신께서는 인간에 깃들어 계실 수도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리디아는 조금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왜 그것을 묻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속이거나 감출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가능합니다. 여신님은 전생을 위한 영체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여신님의 씨앗이라고 부르지요. 가끔은 여신님께서 돌보실 자녀들을 이해하시기 위해서, 여성의 태내에 태아를 만드시고 그 안에 씨앗을 부여함으로써 엘프로 태어나게 하신 예가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여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요.”
“과연, 그렇군요. 이쪽 세상과의 연결점을 만들기 위한 것이셨을까요.”
조제성의 말에 리디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제성이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감추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보통 여신님의 승계는 씨앗이 삶을 마치고, 귀천할 때 이루어집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엔 조금 일찍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엔 두가지 삶을 온전히 분리해서 살고 싶어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알려주시지 않는 부분은 알게 되었다 해도 표현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군요.”
조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기는 나름대로 주도면밀할 셈이었지만, 계약자들 모두는 그가 여신이라는 사실을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확신을 갖지는 못했지만, 짐작하게 만든 이유는 몇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프레이야 여신에게 기도하러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리디아를 위해 만들어진 프레이야의 신전이었지만, 반드시 리디아만 기도하라는 법은 없었다. 현재 머무는 건물 부지 전체가 성역화되어 있다고 하지만, 신전만큼 프레이야 여신의 기운으로 가득찬 곳은 없었다.
신전의 중심에는 신상 대신에 세계수라는 신성한 기운이 넘치는 나무가 존재했다. 이는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프레이야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원기를 제외한 모든 계약자들은 틈틈히 프레이야 여신에게 기도하러 갔다. 이계의 신이건, 불멸자가 아닌 유한자에 잡신이건 간에 그들에게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프레이야 여신의 기운이 전신에 녹아드는 느낌이 들면서 생기가 솟는 느낌이 들었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계약자이면서 신전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원기의 태도는 정상이 아니었다.
두번째는 그의 태도였다.
그만이 프레이야 여신에 대한 공경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님을 붙이기는 했지만, 결코 ‘신’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태도나 말투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원기가 인간적으로 미숙했기 때문에 나타난 한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학교말고는 사회경험이 없다보니, 대처가 미숙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와 여신이 동시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와 가짜 여신이 만난 적이 있었다. 원기를 제외한 이들은 그녀를 내심 짝퉁이라고 여기면서도, 여신 대행이라 불렀다. 외모는 프레이야 여신과 똑같지만, 카리스마라고 해야할지 신의 광휘라고 할지가 너무나 차이가 났다. 달과 반딧불을 비교하는 것이 어울릴 터였다.
하지만, 원기는 그 차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듯 똑같으니, 사람들도 속을 거라고 생각했다.
추가로 프레이야 여신의 신관들은 발키리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원기는 발키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면 볼 수 없었다. 그는 온전히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키리의 ‘스텔스 모드’를 믿고, 틈나는 대로 불러들여서 지시사항을 전달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리디아를 비롯해 엘프 신관들, 특히 고위 신관들에게 여러차례 목격된 바 있었다.
원기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여신에 대한 신앙심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여신 캐릭터 자체가 가진 카리스마에 프레이야의 신성이 합쳐진 만큼, 프레이야 여신을 본 사람들을 강렬히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원기만 그 카리스마를 접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리디아를 비롯한 신관들의 해석 자체가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그럴 듯 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적으로는 미숙하지만, 여신으로서는 충실하게 준비된 존재였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는 빠른 대처로 엘프들의 멸종을 막고, 이계와의 협력을 통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믿음직스러운 여신이었다.
프레이야 여신이 미래를 위해 준비한 여신의 씨앗이 아니라고 보기가 오히려 힘들 정도였다. 인간적인 미숙함은 그런 면에선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씨앗이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개화하기 전에, 여신을 승계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위기로 여신의 존재를 유지하는데 드는 신성력 자체가 부족해서, 여신이 자신의 씨앗에게 급히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물려주고 떠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지.”
리디아는 원기의 방으로 향하면서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여신은 너무나 거대한 존재였기 때문에, 불려가는 것만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칭찬을 받는다고 알지라도 긴장해서 숨이 넘어가게 할만한 존재였다.
원기의 방에 들어가자, 그 안에는 발키리들이 몇 보였다. 원기는 그들에게 눈빛으로 지시를 내려서 방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리디아를 조금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부르러 왔을 때의 원기는 기분이 대단히 저조한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본 모습을 보여라.”
리디아는 황급히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었다. 아름다운 엘프 소녀로서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적인 시간이라 조금 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매우 어울렸다.
“옷을 벗어. 하나도 남김없이.”
원기의 말에, 리디아는 순간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두렵다거나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틈틈이 이쪽 세상의 많은 것을 공부했다.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현대인들은 엘프들 이상의 문화인이었지만, 한가지는 짐승 이하였다. 바로 성욕의 문제였다.
물론 그것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굳이 혐오감을 갖지도 않았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 번식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번식 행위란 말 그대로 번식 행위 그 자체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을 섬기는 새로운 신자를 낳는 행위이기도 했다. 미드가르드에서는 이교도간 번식행위는 강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엘프들은 번식기에만 의무감으로 짝짓기를 하고 번식행위를 하곤 했다. 평화와 자유, 조화를 위해 천성적으로 욕구가 희박한 엘프들은 성욕 자체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는 배설행위처럼 지저분하지만 꼭 필요하고 감수해야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리디아에게 갖는 의미와 원기에게 갖는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계는 번식 행위는 상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큰 의미 부여가 되어있었다. 감정적인 결합, 교류를 생각하니 리디아는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여신이 자신을 그렇게나 소중하고(?) 가까운 존재로 여겨준다는 것은 믿기힘들 정도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침인가.’
리디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원기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원기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묘한 상실감과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는 신관으로서 여신을 가까이하고 싶지만, 동시에 몸을 낮추기 위해서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친밀감과 경외는 함께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기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그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나선 다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신전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 기다렸어?”
“....”
“언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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