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침에 신전에서 함께 기도하기로 약속한 연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녀의 방 앞에 서있던 희연은 예기치 못한 장면에 눈살을 찌푸렸다.
원기의 방에서 리디아가 엘프의 모습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실망감과 짜증, 약간의 분노가 마음 속에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언니? 많이 기다린거야?”
유연하는 한희연의 안색을 살피고는 위축되었다. 많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한희연은 박원기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확 열어재꼈다. 그리고는 방 안에 들어가서는 주위를 살폈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 그리고 소파에서 잠든 박원기의 모습이 보였다. 소파에서 잠든 박원기의 몸에는 이불이 곱게 덮여 있었고, 절대 자신이 덮은 것은 아니었다.
리디아가 나가기 전에 덮어준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야?”
눈을 뜬 박원기가 희연의 모습을 보면서도 잠이 덜깬 상태에서 물었다. 한희연은 살짝 코를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았다. 엘프 특유의 독특한 향기가 낫지만, 그녀가 내심 원치않는 종류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방안의 냄새를 확인하는 한희연의 모습에 잠이 번쩍 깬 박원기가 물었다.
“오빠 방에서 홀아비 냄새가 나나 확인해 봤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아침 연습하기로 한 약속 잊었어?”
“아침 연습?”
박원기는 당황했다.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니. 나랑 한...”
“시끄러.”
“아침 기...”
“닥쳐.”
한희연은 유연하가 말을 끄내기 무섭게 입을 막았다. 박원기는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도류 배워보기로 하지 않았어? 제대로 가르쳐 줄테니까, 빨리 준비하고 도장으로 와. 아침 운동으로 산뜻하게 시작하는게 좋아. 땀을 흘리면, 야한 생각도 사라진다고 하더라고.”
“야한 생각?”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이야. 빨리 준비하고 나와.”
한희연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박원기는 당황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이도류 배우고 싶다는 말을 언제 했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잘된 것 같다.’
원기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빨리 트레이닝 웨어로 갈아입었다.
‘아직 희망은 있는건가?’
약한 남자가 싫다고 했지만, 아침 연습을 챙겨주면서 도와준다는 것은 청신호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뒤늦게 리디아를 떠올린 원기는 방 안을 살피고, 그녀의 모습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희연이에게 걸렸으면, 골치아플 뻔 했네. 다행이다.’
-------------------------------------
계약자중 가장 연장자이면서 바쁜 인물은 바로 조제성이었다. 그는 원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까지 고려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학교 문제를 비롯한 사회적 문제였다.
그는 이곳 저곳, 재빨리 움직여서 비인가 학교를 세웠다. 정식 학교를 세울 수도 있지만, 비인가 학교를 택한 것은 법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원에 가까운 비인가 학교는 고교 졸업 자격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고졸 검정고시를 봐야 했지만 ‘학교’라는 이름과 ‘졸업장’이 나온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소속감을 줄 수 있었다.
정식 병원이나, 정식 학교는 법적 책임이나 의무가 있기 때문에, 택한 편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혜서 국제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장수한을 교사로 채용했다.
“교편을 다시 잡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군요. 역시 제성형님이라고 할까요. 이런 곳까지 배려가 미칠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계약도 전쟁도 한두해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니까, 장기전을 염두에 둬야지. 난 일생 프레이야님을 위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지. 그리고 학원 장사가 꽤 짭짤한 편이야. 이곳도 끔찍하게 비싼 등록금을 받을 생각이니까.”
조제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상층에 신전이 배치되어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 학교 부지가 성역화 되어있다. 머리 회전도 좋아지고, 건강에도 좋고, 미용에도 도움이 된다.
불경기에는 싸거나 아주 비싸야 장사가 잘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희연과 유연하는 조제성이 임시로 설립한 모델 사무소에 등록시켜 두었다. 본래 미소녀인데다가 미모에 버프까지 받은 상태라서 팔리고도 남을 빼어난 미모를 보였다.
물론 모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포장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여신과의 계약을 알리지 않고 경제적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도 안하는 고등학생 딸이 거액을 집에 송금하고 밖에 나가서 산다면 의아하게 여기거나 걱정하지 않을 집안은 없기 때문이었다.
모델 사무소에 좋은 조건으로 계약, 등록하고 비싼 학교에 편입까지 시켜놓으면 가족들의 걱정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원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이나 한두장 그럴 듯하게 찍어서, 자사의 광고에 한두번 노출시키면, 일 때문이라고 학교를 빼먹어도 의심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효과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역시 일처리가 빈틈이 없으세요. 전 미처 생각도 못했는데.”
“자네와 난 맡은 일이 다르니까. 난 몸을 써서 싸우는 취향도 아니고. 그건 그렇고, 자넨 연애 사업 잘되어가나? 엘프들은 문화도 그렇고 성격도 달라서 상대하기 쉽지 않을텐데?”
조제성과 장수한은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장수한은 조제성처럼 예리하고 철저한 면은 부족하지만 다양한 발상으로 조제성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프레이야 여신에 대해 철저히 비밀로 하는 만큼 사람이 부족한 것은 틀림없었다.
철저함이 부족해서 마지막에 조제성이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하는 것은 귀찮지만, 장수한은 조제성이 생각치도 못한 일들을 추진한다는 면에서 시너지 효과가 적지 않았다.
“그게 좋다니까요. 허영심도 없지, 솔직 담백하지. 좋은 점도 많아요. 물론 취향에 따라선 좀 다르겠지만.”
“자네가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는거지? 그건 문제 없나?”
“예. 그도 그럴 것이, 저희가 엘프 종족을 골라봐야 엘프처럼 안보인다고 하더군요. 특히 남자들은 말이지요. 그런 미소녀처럼 꾸밀 수도 없으니.”
수한은 이미 하반신 마비를 치료한 상태였다. 아직 다리에 근육은 부족하지만, 조금씩 근육이 회복되고 있었다.
“재활 운동은 힘들지 않나?”
“그게 말이지요. 성역 내에 있으면, 재활운동을 안해도 자동으로 근육이 불어나더라고요.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다고 할까. 이런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게 내심으론 아쉽기도 하고 말이지요.”
“여신님이 이쪽 세상에 전파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지.”
“여신님이 그런 말씀을요? 아, 원기군이 확실히 펄쩍 뛰기는 했지요. 그건 그렇고 희연이와 묘한 분위기던데 괜찮은 걸까요? 희연이와 연하에게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장수한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원기는 프레이야가 아니고서는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을 무의식 중에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거야. 씨앗 상태에서 여신의 자리를 승계하더라도 여신으로 완전히 각성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마친 다음이라고 하더군. 그때까지는 인간의 삶을 더 중시한다고 리디아 전하께서 말씀하시더군.”
“흐음. 그런가요. 그럼 지금처럼 편하게 대하는게 좋겠군요. 희연이와 연하에겐 알리지 않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자네가 넌지시 여신님 본체와 여신 대행의 차이에 대해서 원기님에게 알려주는게 좋을거야. 눈치챘다는 내색은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형님. 그건 그렇고 의류 브랜드 사업은 잘 되고 계신 겁니까?”
“하하. 나오는 순간, 세상이 놀랄거야. 엘프들의 섬세함이란, 정말로 놀랍더군.”
엘프들의 섬세한 감각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엘프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천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특히 사냥이나 전투에 쓸모없는 남성 엘프들은 집에서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일이 주임무였다.
보잘것없는 나무 껍질로 실을 자아서 만들어낸 천도 나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재료를 주고 비단을 만들도록 요청하자 아는 사람들은 천금을 주고라도 손에 넣고 싶어할 보물을 만들어 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