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장수의 조건
‘캐릭터 보정인걸까? 정말 위압감이 넘쳐.’
한희연은 눈 앞에 서있는 원기의 캐릭터를 보면서 내심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원기의 캐릭은 그녀가 증오하고, 내심 질투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긴 리치, 두툼한 근육, 강한 힘, 그리고 불굴의 정신.
그리고 불굴의 정신은 캐릭이 가진 특성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아무리 아픈 것에 익숙해진다고 하더라도, 피육의 아픔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아픔에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했다.
아무리 아픈 걸 좋아하는 변태라도, 자신이 죽을 정도로 자해하는 일은 없는 법이었다. 치명적인 고통은 결코 쾌감으로 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기는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레벨 차이, 신장 차이가 있다지만, 원래 원기는 희연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검술을 익힌 덕분에, 한희연과 동렙은 아니라고 하지만 5번 싸우면 2번 정도는 이기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거지만.’
한희연은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원기의 눈을 바라보았다. 원기 역시 한희연과 눈을 마주쳤다. 무기를 보는 것은 두려움의 증거, 승리를 위해 상대의 의도를 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검사의 자세라고 할 수 있었다.
‘저 검은 조심해야 해. 이쪽은 스치기만해도 사망판정이니.’
한희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민첩에 올인한 도적 계열 캐릭터인 그녀는 원기의 대검에 스치기만해도 곧 사망이 뜬다. 승패가 결정되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즉사 판정이 뜰 경우에는 고통 조차 못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블러드 라인은 초기 프로그램 오류 때문에 일종의 자살 기능이 있었다. ‘유체 이탈’이라는 이름의 이 기능은 실행시키면, 전투 중에는 사망 판정이 뜨고, 사망 불이익은 고스란히 받게 되지만, 유체가 되어서 가까운 적당한 곳에서 리젠될 수 있었다.
심한 부상을 입거나, 적에게 포로가 될 경우를 생각한다면 정말 보탬이 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땅속에 파묻히거나, 벽 사이에 갇히는 유저를 위해 태어난 기능이었다. 부상이 심하면, 유체이탈을 사용해서 패배 판정을 받게 되지만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있었다.
“시발! 좀 죽어라!”
원기가 무섭게 외치면서 대검을 휘둘렀다. 공포전사라고 흔히 불리우는 슬로터의 기술 중 테러 피어는 패시브형 액티브 스킬이었다. 상대에게 적의를 담고 외치는 모든 대사에 연동하여 발동하는 스킬이었다.
게임 내에서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둔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아스가르드에선 그저 증폭된 호통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가 담긴 강렬한 호통소리는 충분히 상대방을 위축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발 죽어는 좀 심하지 않아?’
한희연은 내심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에 의한 기선 제압은 검도에선 꽤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 중 하나였다. 귀가 아니라 머리속에서 울리는 듯한 강렬한 호통 소리는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적계 직업인 어새신은 암습을 주로하는 캐릭터라서 스킬들 대부분은 공격형 액티브 스킬이었다. 그리고 공격형 액티브 스킬들은 대부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했다.
“타앗!”
크게 휘둘려 오는 대검을 피해서 그녀는 높이 뛰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원기는 왼손의 대검을 휘둘렀지만, 그녀의 높이에는 미치지 못했다. 오른손이 횡베기를 하는 상황에서 왼손이 종베기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녀의 검이 원기의 머리를 노렸지만, 원기는 재빨리 움직여서 머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꽤 깊은 부상이야. 왼팔은 쓸 수 없겠군.’
그녀는 재빨리 자세를 잡고 민첩하게 뛰어들었다. 공격이 적중하면 그 충격으로 상대가 경직된 틈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원기의 왼손 검이 마치 부메랑처럼 날아왔다.
‘잠깐의 경직도 없어진건가.’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숙이면서 마치 땅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면서 원기의 허리를 노렸다. 원기의 무방비한 옆구리에 검이 박히려는 순간, 원기는 도리어 옆구리를 내밀었다.
회피가 불가능하게 된 순간, 고의로 먼저 맞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검은 허리를 베고 빠져나가는 대신에 그의 옆구리에 박혔다.
“많이 좋아졌네.”
그녀는 재빨리 검을 놓고,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서 원기의 오른쪽 팔꿈치에 박아 넣았다.
“체크메이트!”
그녀가 승리선언을 하는 순간, 원기의 투구를 쓴 머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 떨어지듯 내리 찍었다.
쾅하는 충격과 함께, 그녀는 사망판정을 받았다. 두개골 함몰에 의한 즉사였다.
“박치기에 사망 판정? 이건 좀 심하지 않아?”
검도에 익숙한 한희연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전장의 장수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전의를 잃지않고 조금의 경직도 없이 공격하는 모습은 그녀가 동경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와 달리 원기는 털썩 주저앉았다.
끔찍한 부상을 무릎서고 공격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피로를 불러오기 때문이었다. 잠시의 전투로, 스태미너를 전부 소모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리고 내일 오전 수업끝나고 출발할테니까, 준비 상황은 각자 체크하지.”
장수한이 마무리를 지었다. 원기나 희연, 모두 성장했다고 하지만, 최정예에 가까운 다크엘프 레인저들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현재의 원기라면 혼자서 5명 정도는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희연은 3명 정도가 한계였다. 전사와 검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그녀가 훨씬 빨랐다. 다섯명을 상대하면서 한시간 동안 5분에 한 명꼴로 무력화 시킬 수 있다면, 그녀는 동시에 세명을 상대하면서 두시간 동안 삼분에 한명 꼴로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물론 죽거나 부상당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다는 전제하였다.
천명은 커녕 오십명의 다크엘프 레인저에게만 둘러쌓여도 순식간에 죽고 리젠을 기다려야 할 터였다. 작전은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작전의 기본은 장수한과 조제성, 그리고 박원기의 협의하에 짜여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사의 생환이었다.
유연하와 장수한이 먼저 엘프의 궁수 부대와 함께 적을 공격한다. 그리고 그 틈에 반대쪽으로 원기와 희연이 뛰쳐 나가서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마법사와 그 호위 병력이 상황을 봐서 탈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연하와 장수한, 박원기와 한희연은 죽음을 감수하면서 다시 합류해서 마법사들을 보호해서 굴베이그 여신 일행이 숨은 요새로 향한다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원기야. 장수가 경계해야할 5가지 위험에 대해서 알고있냐?”
장수한의 말에 원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자병법에 나온 말이야. 대충 풀어말하면 반드시 죽겠다고 생각하면 죽고, 반드시 살겠다고 생각하면 포로가 된다. 화를 내거나 성질이 급하면 농락당하고, 원칙에 얽매이면 수치를 당한다. 그리고 병사를 지나치게 아끼면 결단을 못내리게 된다는 내용이지.”
“음. 너무 복잡한데요. 한번에 기억하기는 좀...”
“일단 죽음을 각오하면 살 길을 찾지 못하고, 살려고만 들면 반드시 진다는 소리야. 냉정 침착함은 기본이지. 그리고 원칙에 얽매여선 안되고, 너무 병사를 살리려고 들다간, 되려 죽이게 된다는 소리야. 저들도 정찰용 일꾼이나, 해병이라고 생각하고 죽이러 보낼 수 있어야 장수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소리지.”
“무서운 이야기네요.”
“남 위에 선다는 것은 그런거지. 네가 짜는 작전은 나쁘진 않지만, 죽어도 살아나는 게임 캐릭터들에게 너무 집착하고 있어. 그리고 내 걱정 중 하나는, 이렇게 자꾸 죽는게 과연 영향이 없을까 하는거야.”
장수한의 말에 한희연과 박원기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마법 캐릭터와 궁수 캐릭터인 장수한과 유연하와 달리 둘은 죽고 죽이는 연습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익숙해 져서는 안되는 감각에 꽤 많이 익숙해 진 것도 사실이었다.
꿈에 나올까 기분 나빴던 감각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정말로.’
원기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죽이는 쪽의 기분이 더 오래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고민은 수한이 형과 엘레노아 사령관에게 맏길께요. 이젠 듀얼로 얻을 것도 별로 없고 실력도 늘었으니, 죽을 일은 줄었다고 봐도 될겁니다.”
박원기의 말에 장수한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한희연은 그런 수한의 모습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수한이 원기에게 지휘관의 자질을 기대한다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럼, 전 스킬 재점검 하고 로그아웃 할께요.”
“음, 난 화살 상태 좀 봐야할 것 같아. 언니 먼저 가.”
“전 한숨 자고 생각해 봐야겠군요. 상처가 없어져도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네요.”
원기는 가슴을 짚으면서 피식 웃고 한희연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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