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말의 힘
‘일주일도 넘게 학교를 쉬는 건가.’
원기는 왠지 섭섭한 느낌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사고 전에는 학교 따위는 진저리친다고 생각했지만, 사고로 학교에 다니지 않게 되면서 느꼈던 상실감은 엄청났다.
학생에게는 학교가 세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막상 다닐때는 지긋지긋하지만, 학교 이외의 세상은 거의 알지 못했다. 혼자 동떨어진 듯한 소외감은 너무나 뼈저려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조제성이 혜서 국제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열때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학교를 다녀보니 느껴지는 것이 완전히 달랐다.
비인가 학교, 실질적인 입시학원이라고 조제성과 장수한이 멋대로 주무르고 있었지만, 막상 다니는 학생 입장에선 이름만으로도 학교는 학교였다. 학교를 다닌다는 느낌이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학교의 최상층에는 리디아를 위해 건설된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신전 내부에는 묘목에 가깝지만 작은 세계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수는 프레이야의 분신에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학교 부지 전체가 성역화되어 있었다. 인간의 생명력이 고양되고 여러가지 면에서 좋은 영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고액의 학비를 거둬들인 조제성의 상술은 확실히 뛰어났다.
1, 2년 생 300명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식으로 모집해서 입학한 사람들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모집 공고 조차하지 않고 인맥과 뒷거래로 정원을 다 채운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초엘리트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게된 원기는 과연 이 엘리트 집합소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바보들이 많아서.’
원기는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30명씩 A반부터 E반까지 있는데 원기는 D반이었다. A반부터 C반까지는 완전한 엘리트 코스로 실제 외국인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서울대에는 관심도 없는 이들이었다. 수업의 대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졌다.
졸업장도 안나오는 학교지만, 진짜 엘리트들에게는 졸업장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D반부터 E반은 완전히 낙오자 반으로, 고졸 검정고시반이었다. 그리고 원기는 검정고시반에서는 제법 좋은 성적이었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한희연은 A반에서도 톱클래스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에게도 엄격하지만, 자신에게는 더 엄격한 편이라 스스로를 혹사하는걸 개의치 않았다.
본래 머리가 좋은데다가, 신전의 버프빨도 많이 받으니 이미 초인이나 다름없었다. 프레이야의 총애라고 할까, 원기와 개인적인 교류가 있는 이들에게는 세계수의 영향력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유연하는 원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바보였다. 검도의 경우 진학에 큰 도움이 안되지만, 양궁 선수로 대학 진학할 생각이었던 그녀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1학년 중 꼴찌인 E반에서도 공부 때문에 꽤 두통을 앓고 있었다.
한희연과 친하니 그녀에게 공부를 배울까 했지만, 가르치기 시작하면 아주 엄격하고 빡빡한 한희연의 페이스를 못따라가서 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리디아는 원기와 같은 반이었다.
‘저 녀석은 정말 천재야. 어느틈에 이렇게.’
그녀는 몇달 사이에 한국어를 통달하고, 수업과정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영어를 비롯한 유럽계 언어는 별 어려움없이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언어 자체가 고대 라틴어와 켈트어의 혼합 비슷한 것이라, 유럽쪽 언어를 배우기는 문제가 없었다.
수학과 과학에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학교에 다니기 전에도 어느정도 수준은 터득한 상태였다. 주로 생물학이긴 하지만, 그녀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이기도 했다.
그녀는 치유신관으로서 대성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관의 역할은 여신께 기도를 바치는 것,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 그리고 여신의 힘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있었다.
여신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치유 마법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아스가르드에서 발현되는 지구에 없는 힘들은 모두 신들에게서 오는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마법은 주문을 통해 발동되는 힘이라기 보다는 ‘언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말에 실린 힘이, 계약한 신의 힘과 어우러져 발동되는 것이었다. 말에 힘을 싣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힘있는 말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신뢰는 능력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세살짜리 꼬마가 말하는 것과 유명한 지진학자가 말하는 것과는 무게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능한 전문가를 흔히 ‘권위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권위’ 그것이 신관과 마법사들의 힘의 원천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세상을, 인체를,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식, 지혜, 신용, 경륜이 그들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권위’가 마법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관의 힘은 믿음이었다. 자신의 믿음대로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힘이 되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영향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신관으로서의 능력은 의학적 지식과 인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이미 고향에 있는 어떤 엘프 신관보다도 높은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미처 깨닫고 있지 못했지만,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학, 수학 등을 통해서 역사에 없는 대마도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야. 이거 좀 봐라. 여기 링크 걸어줄께.”
뒤에서 호철이가 말을 걸었다. D반부터 E반, 검정고시반에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다. 지능은 둘째치고, 성실함은 여자들이 앞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호철과 찬균은 원기가 학교에서 얻은 친구들이었다. 둘 다 흔히 오덕이라고 불리우는 매니아였다. 그리고 학교에 갈 기회를 잃고 컴퓨터에 빠져있던 원기와 말이 잘 통했다.
호철은 밀덕, 밀리터리 오타쿠였고, 찬균은 마법소녀물을 좋아했다. 그리고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 될만한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원기는 책상 위를 터치했다. 펜 디지타이져가 붙은 정전식 터치 스크린이 책상 표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데스크 태블릿PC였다. 노트도 책도 일체 필요없는 학교였다. 호철이 보여준 링크에는 항공 자위대의 전투기 사진이 실려있었다. 만화가를 불러서 엠블렘을 그리게 한다던 비행대는 옛날 얘기고 이젠 아예 비행기 전체를 미소녀 그림으로 도배해 버렸다. 좀 지난 어떤 게임의 영향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군대 맞아?”
“군대가 아니니까 가능한 거 아닐까.”
“음, 이 코스튬을 리디아 여신한테 입혀보면 어떨려나. 꽤 어울릴텐데.”
찬균이 비행기에 그려진 일러스트를 보면서 말했다. 비행기에는 노출도가 살짝 심한 갑옷을 입고 하늘을 나는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발키리가 등장하는 게임이었다.
여신이라는 것은 리디아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북유럽 출신이라고 생각되는 백금발에 지구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백인 미소녀라 엘프라고 안불리는 것이 이상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여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리디아 여신은 진짜 귀족, 그것도 공주라는 소문도 있더라. 학교 이사장이 그녀한테 깍듯이 인사하면서 ‘리디아 전하’라고 불렀다고 하더라고.”
“맞아. 얼음여왕도 그녀한테는 깍듯이 인사를 하더라.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면서.”
호철이 말하는 얼음여왕은 한희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약한 사람 질색이라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면서 원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운동도 잘하는데다가 공부도 잘하는 덕분에 퍼펙트 퀸이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었다.
추가로 유연하는 천연공주, 어린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바보라는 소리였다.
공주라는 조금 미묘한 별명은 여왕이라 불리는 희연과 잘 붙어다녀서 얻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분명한건 학생들 사이의 인기는 유연하가 가장 좋은 편이었다. 그녀의 붙임성있는 성격 때문이었다. 부상 이후로 꽤 힘들어 했었지만, 많이 극복한 듯 싶었다. 타고난 낙천가라고 할 수 있었다.
“나 다음주까지 학교 쉬게 되었다.”
“설마, 여왕과 공주도 함께냐?”
“좋겠다. 브리싱가멘 전속 모델군.”
“그래봐야, 사진 한번 실린 적 없는데 뭐.”
원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넘겼다.
“확실히, 여왕이나 공주에 비하면 빛이 바래니 어쩔 수 없지.”
제성이 만든 브랜드, ‘브리싱가멘’은 프레이야가 가진 목걸이의 이름이었다. 미의 여신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악세서리. 그것이 브랜드 명의 의미라고 했다.
문제는 광고는 전국지에 몇차례 나왔지만, 실제로 물건을 파는 매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목적 자체가 두 사람이 모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돈 버는데 천재적인 조제성을 생각하면 거기에서 멈출리는 없었다.
매장없는 브랜드. 그것이 바로 제성의 판매 전략이었다.
전품 경매를 통한 판매, 그것이 바로 제성의 수법이었다. 실제로 엘프들이 수공업으로 만드는 만큼,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조제성의 판매 전략은 놀라운 곳이 있어서,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의 안목을 시험하는 테스트를 벌였다.
최고급품의 천들을 수십 매 늘어놓고, 게중에 엘프가 짜놓은 천을 딱 한 장 섞어 두었다. 그리고 엘프들이 짠 천을 정확하게 골라내는 사람에 한해서만 경매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좋은 것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치를 가진다.’는 논리였지만, 부유층의 과시욕과 허영심을 극한까지 자극하는 것이었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라는 표현만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문가들을 고용해야만 알 수 있는 진품 예술품에 집착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역사가 긴 명문가에서는 경매 참석 자격을 얻는 사람들이 제법 나왔지만, 재벌가에서는 거의 전멸이나 다름 없었다.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나 사위가 간혹 참석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 거의 모든 물품을 싹쓸이했다.
결국 조제성의 의도대로 한두점씩 내놓는 물건들은 경매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에 낙찰되어 팔리고 있었다. 유서깊은 명문가들은 바람잡이가 되는 꼴이었고, 물건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이들도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했다.
광고는 있지만, 어디에서도 팔고있지 않은 브랜드, 그것이 브리싱가멘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브리싱가멘에 나오는 여신은 실존 인물이 맞는거냐?”
“그거 CG라던데? 실제 인간은 아니라고 하더라.”
“아냐. 실제로 그녀를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
원기는 찬균과 호철의 설전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브리싱가멘을 걸칠 수 있는 것은 프레이야 여신이 유일했기 때문에 딱 한번 여신의 모습으로 사진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CG가 맞긴 맞지. 기본은 내가 CG참고해서 만든 것이니.’
프레이야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여신 캐릭터도 살짝 변해서 완성도가 높아졌다. 인간같지 않은 좀 과장스러운 부분이 자연스럽게 수정되어 완벽한 미모가 된 것이었다.
“넌 어때? 본적 있냐?”
호철의 돌연한 질문에 원기는 내심 식은 땀을 흘렸다. 말이 갖는 힘이라는 것을 그도 프레이야의 지식을 통해서 조금씩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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