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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33화 (33/497)

33화

“나는 성기사 그렌, 프레이님의 충복이다.”

“난 성전사 미라엣이라고 하지. 그대들의 이름을 듣고 싶군.”

갑주를 입은 두 엘프는 여유로운 태도로 자기 소개를 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강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오늘 반드시 두 사람을 죽이고 말겠다는 의도를 전혀 감추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어차피 죽일 것 아닌가?”

원기의 반문에 두 엘프는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과 어이없다는 표정을 반쯤 섞은 듯한 얼굴을 보였다.

“물론이다. 네 녀석들을 살려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하지만, 죽인다고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지. 네 놈도 에인페리아라면 그정도는 알고 있을텐데?”

그렌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기는 그의 말에 상대가 에인페리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는 적을 죽이면 끝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쓸만한 재능이 있다면 신들이 되살리고 되살려서 부려먹는 그런 죽어도 끝나지 않는 수라장이었다.

한 번 죽으면, 또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들도 적지 않은 세상이기도 했다.

“굳이 이름을 대기 싫다면, 적당한 가명을 대도 상관치 않겠다. 참고로 지금까지 너희를 부르던 명칭은 ‘힘만 센 멍청이’와 ‘조무래기 칼잡이’였지. 너희의 코드명을 계속 그것으로 해도 상관은 없다만, 그렇게 부르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엣 역시 여유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한희연에게 향하고 있었다. 원기는 힘만 센 멍청이라는 명칭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렇게 불리워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한희연이 조무래기 칼잡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은 몇가지 정보를 머리속에 넣어 주었다.

‘에인페리아들은 다크 엘프 레인저 서너 마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소리로군.’

“시간을 더 끌고 싶은건가? 할 수 없지. 그냥 죽여주지.”

그렌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오른팔에는 전의 전투에서 원기가 잃어버린 청룡언월도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그의 힘이 결코 게임 캐릭터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랜 세월을 싸웠다면 전투 경험도 녹녹치 않을 터였다.

원기는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그렇군. 멍청이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앞으로 날 부를 땐 관운장이라 불러라.”

원기가 말하는 순간, 풋하고 희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청룡언월도를 보고서 떠올린 듯 싶었다.

“관운장? 가명인 듯 하지만, 그렇게 불리길 원한다면 불러주지.”

그렌은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희연을 향했다.

‘그래. 왠지 어울리기는 해.’

관운장의 성품을 알려주는 유명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가 독바른 화살을 맞아 마취없이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받으면서 태평하게 바둑을 두는 것이 있었다.

고통에 대한 의연함이야말로 관운장의 기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희연이 보기에 아무리 관운장이 의연하더라도, 원기만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숱한 부상을 입고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적의 칼날 앞에 자신을 들이댈 수 있는 강인한 의지는 희연으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할 줄은 알지만, 자신을 그렇게까지 거침없이 희생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질수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난 여봉선, 아니 여포다. 여포라고 불러라!”

“여포?”

이번엔 원기가 놀라서 반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렵하고 아름다운 미소녀 검사와 여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포가 관운장보다 세니까. 당연히 여포지.”

그녀는 그렇게 조금은 치졸하지만, 성격이 드러나는 답변을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도 멋쩍음 탓인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군. 관운장에 여포인가.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주지.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성장해 있기를 바란다.”

그렌이 청룡언월도를 세차게 휘둘러왔다. 원기는 그것을 본 순간, 왼손의 클레이모어를 그렌을 향해 던지고는 양손으로 클레이모어를 잡고 맞서서 힘차게 휘둘렀다. 그리고 한희연은 재빨리 아래쪽으로 슬라이딩하듯 움직이면서 그렌을 지나쳐서, 미라엣에게 검을 들고 덮쳐 나갔다.

쾅! 하는 격돌음이 났고, 원기의 오른팔은 두동강난 클레이모어와 함께 빙글빙글 돌면서 뒷쪽에 떨어졌다. 그리고 원기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그리고 희연은 미라엣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렸다.

‘가, 강해. 미치도록 강하다.’

그렌의 일격에 실린 힘은 원기의 상상을 뛰어 넘었다. 청룡언월도를 가볍게 휘둘렀기에 완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빛살과도 같은 일격은 직접 부딪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모어와 함께 그의 오른팔을 가볍게 잘라버렸다.

‘검풍이라는 건가.’

화려하게 빛나는 공격 같은 것이 아니었다. 청룡언월도가 휘둘러지는 순간, 희끄므레한 연기 같은 것이 순식간에 예리한 칼날처럼 지나갔다.

‘아직은 힘만 조금쌘 멍청이로군. 아니 힘조차 당하지 못하는 멍청이인가.’

원기는 실소하며 한희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짖눌리고 있었다. 은은히 들리는 바람 소리가, 그녀의 위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것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거인? 바람의 거인인가?’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위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거인이 있음을 아지랑이같은 윤곽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한희연의 빠르고 유려한 몸놀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너무도 강해서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오, 네 놈 제법이군. 팔이 날아갔는데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을 줄이야. 그런데 말이지. 에인페리아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 혹시 아나?”

“큭. 죽여도 되살아 나는게 에인페리아 아니었나?”

“그래. 하지만, 몇번이고 부활하는 에인페리아를 제거하는 방법이 없진 않아. 신이 없어지면, 죽지. 그리고 다른 신의 성역에서 죽이면 발키리가 영혼을 가져가지 못해서 죽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죽음의 고통으로 영혼을 파괴하는 거다.”

그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자, 희뿌연 도의 그림자가 원기의 온 몸을 스치고 가면서 사방에 피를 튀겼다. 하지만 원기는 신음 한마디 내지르지 않았다.

“무리야. 네 녀석 정도로는.”

원기의 눈빛이 여전히 두려움을 모르자, 그렌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다가가서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들어올렸다. 키는 원기가 만든 캐릭터가 훨씬 컸지만, 무릎을 꿇은 상태라 그가 머리카락을 잡고 당기자, 목을 드러내며 하늘을 봐야 했다. 그 상태에서 그가 원기를 내려다보았다.

“제법이야. 자기 몸의 고통을 이길 줄 아는군. 하지만, 동료의 고통에 대해선 어떻게 반응할까? 저 계집은 별 상처가 없더군.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고통은 피하고 싶어하는 나름 정상적인 전사야. 그녀를 죽이지 않고, 스스로 죽고 싶어질만큼 괴롭혀 줄 수 있어. 아마, 너같은 놈은 그런 상황에 더 약하지 않을까?”

그가 미라엣에게 눈치를 주자, 한희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온 몸을 엄청난 압력으로 누르는 것이 보였다. 원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갑자기 으르렁 거리는 야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지금이야!”

원기가 외치는 순간, 포효와 함께 은호가 그렌을 향해 뛰어 올랐다. 그렌은 원기의 몸을 들어 방패로 삼으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성전사 미라엣의 목을 꿰뚫었다.

“미라엣?!”

다음 순간, 원기의 등을 향해 덥쳐오던 호랑이가 사라졌고, 그가 붙잡고 있던 머리칼이 짧아지면서 그의 손가락에서 빠져나갔다. 자연스럽게 원기의 머리가 그의 손에서 빠져 나왔고, 그 머리는 호랑이의 머리로 변했다. 당황한 그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호랑이의 발톱이 그의 오른 팔을 깊이 파고들면서 움켜 쥐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목을 호랑이의 머리통이 물어뜯으려고 들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피하려고 들었지만, 호랑이의 큰 턱이 그의 얼굴 아랫부분과 함께 목을 물어 뜯었다.

결국 그 역시 미라엣과 함께 절명해 버렸다.

“젠장, 내 첫키스가 남자라니!”

원기는 수인의 모습으로 핏와 살덩어리를 뱉어냈다. 그러면서 파티 메시지를 희연에게 보냈다.

[빨리 달아나. 어차피 난 리젠해야 해. 가뜩이나 낮은 레벨 더 떨구지 말고.]

[언니. 빨리 와요!]

[알았어. 먼저 갈께.]

희연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싸우고 싶어도 바람의 거인에게 짓눌리면서 도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녀는 불여우와 합체한 다음, 불꽃을 몸에 두르고 재빨리 뛰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엄호하듯 화살을 쏘며 유연하가 뛰어왔다.

유연하를 잡기 위해 다크엘프들이 달려드는 순간, 그녀는 날개를 편다음 훅하고 날아 올랐다. 유연하에게 눈이 간 사이에 한희연은 이미 숲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새신의 스킬 중 은신을 익힌 그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시발! 다덤벼! 호랑이 기운으로 상대해주마!”

원기가 호기있게 외치자, 다크 엘프들은 원기를 노려보고 살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정글도를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죽기 위해서 싸우면서도,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야 했다. 발톱으로 적을 할퀴고, 이빨로 적을 물어뜯고, 있는 힘을 다해 포효하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발악했다.

수인화 지속 시간은 순식간에 끝나고, 손가락 셋 남은 왼팔과 날카로운 이빨도 큼직한 주둥이도 사라진 머리통,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통으로도 그는 발악을 계속했다.

몰매를 맞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발버둥을 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다.

‘필사면 살해당하고, 필생이면 포로가 된다고 했던가.’

그는 죽기 위해서 싸우는 것도,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는 숨이 끊어졌다.

‘완전히 다져졌군. 이거 참 기분이 묘한데.’

원기는 다진 고기덩어리처럼 되어있는 자신의 시신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다크엘프들이 당황면서도 재빨리 미라엣과 그렌의 갑주, 그리고 미라엣의 반지와 그렌의 건틀렛을 소중하게 챙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신의 아티팩트라는 건가? 제대로 이겼으면 저것들을 챙겼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원기는 자신의 욕심이 과하다는 것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상대의 방심을 틈타서 두 명의 에인페리어를 모두 처치했다. 그리고 한 번씩 죽는 것을 각오한 작전에서 세 명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 자신도 죽음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었다.

지금까지는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으로 몸을 마구 던져왔다면, 한순간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 몸을, 목숨을 아끼는 싸운에서 얻은 것도 결코 적지 않았다. 아무리 무한정 되살아난다 해도, 목숨은 소중한 것이었다. 더 오래 싸우기 위해서, 몸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버리는 것을 배웠다면, 다시 아끼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는 유체 상태에서 수한이 보내온 메시지를 받고서, 합류 지점으로 향했다.

‘수한이 형은 만난 적이 없을테고, 연하는 뭐라고 불렸을까? 아까 전에 물어둘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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