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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34화 (34/497)

34화

“죄송합니다. 모두 제 방심 탓입니다.”

성기사 그렌은 대전 앞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성전사 미라엣 역시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방심? 글쎄. 어떨까?”

멋들어진 의자 위에 있던 미소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소년은 반투명한 모습이었지만,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다크 엘프들의 신, 프레이였다.

그의 목소리는 신비롭고 감미로워서, 조금은 편안하고 늘어지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미라엣. 네 지휘는 비록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훌륭했다. 인간과 엘프들의 무리가 세스룸니르를 빠져나간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더군. 그들과 조우한 정찰대의 무리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어. 네가 제대로 판단을 내렸고, 최선을 다했으니 난 그걸로 만족한다. 그렌, 너도 마찬가지야. 프레이야의 에인페리아가 몬스터와 합체할 거라고는 예상할 수 없다. 그걸 굳이 방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 다만...”

프레이는 잠시 말을 끌었다. 그렌과 미라엣은 고개를 숙인채 그의 처벌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너희들의 공은, 너희들의 부활로 상쇄되었다. 앞으로 공을 세워서 다시 에인페리아로서 부활할 자격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너희 말고도 날 위해 공을 세우는 자들이 다수 있으니 말이다.”

그렌과 미라엣은 프레이의 관대한 처분에 대해서 감사하면서도 몸둘바를 몰랐다. 프레이 역시 아스신들과 한편이 되어있지만 기본은 반신족이기에 공명정대함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휘하의 다크엘프들은 일정한 공을 세우면, 그 서열에 따라서 에인페리아로서의 부활권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새로운 프레이야는 마음에 드는걸. 에인페리아와 합체하는 몬스터라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야. 멍청한 반신족들과는 좀 다르군. 에인페리아들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예. 강력한 힘을 가지고 호랑이와 합체하던 에인페리아는 자신을 ‘간장’이라고 했습니다.”

“제게는 ‘구안장’으로 들렸습니다만...”

“흠, 발음이 분명치 못한 건가? ‘간장’이라고 해두지.”

“그리고 민첩한 검을 휘두르며, 일시적으로 귀가 넷으로 변하는 여성 에인페리아는 자신을 ‘여봉’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여봉’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여보’라고 정정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여보’라고 나중에 정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간장과 여보라는 건가. 좀 특이한 이름이군. 그리고 그 외에 활을 쓰는 에인페리아가 있다는 거로군.”

“예. 날개를 달고 일시적으로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그 활을 쓰는 에인페리아가 떨어뜨린 무기라는 건가? 과연,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물건이군.”

“예. 신성력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대단히 탄탄하고 강력한 활입니다.”

프레이는 활과 청룡언월도, 그리고 부러진 일본도들을 확인했다.

“이걸로 신기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렌 그대는 이 무기가 마음에 드는 것 같더군.”

프레이는 청룡언월도를 세심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예. 특히 금속으로 된 봉 부분이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특수 용접된 청룡언월도의 마무리가 마음에 든 그였다. 이정도 거대한 철봉을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장인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제성이 배려해서 이곳저곳에 무리없이 넣어둔 장식도 미드가르드의 기술로는 구현하기 힘들었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스룸니르에 대한 공격은 어떻게 할까요.”

“아, 너희가 쓰러진 사이에 이미 철수 명령을 내려 두었다. 굳이 웅크리고 앉아서 이를 드러낸 녀석들을 상대해 봐야 좋을 건 없지. 좀 기다리면, 다시 숲속으로 기어나와 흩어질 거다. 그때 몰아치는 것도 나쁘진 않아. 일이년? 두고 보도록 하지.”

프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렌과 미라엣은 설욕전을 벌일 수 없게 된 것이 분했지만, 프레이의 결정에 따랐다.

이전까지 프레이야의 세력은 풍전등화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에 대처도 변변히 못하고 그저 쫓으면 쫓기는 무력한 상대였다. 엘프들을 위해서 신성력을 낭비해서, 에인페리아도 변변히 못만드는 무력하고 어리석은 상대였다.

하지만, 새로운 프레이야가 나서면서 상황은 변했다. 그다지 훈련도가 높지는 않았으나, 제대로 훈련받은 엘프들이 수천 단위로 움직였다. 신성력이 어디서 그렇게 나는지는 몰랐지만, 에인페리아들이 등장했다.

처음엔 무능한 녀석들을 에인페리아로 만드는 어리석은 여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성장은 놀라운 것이었다.

‘놈들이라면 짧은 시간에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지만...그래. 공을 더 세운 다음, 겨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결의를 다졌다. 반면 미라엣은 프레이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무력한 반신족을 혐오했다. 하지만, 동시에 반신족의 맥을 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스신족으로, 오딘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잘 모르겠어. 기뻐보이시는 듯도 싶고...’

프레이는 실제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가 알고 지내던 프레이야가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무력한 반신족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무기를 들었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토르가 아무래도 일을 저지를 것 같다. 티르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지. 프레이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하찮은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티르는 전쟁의 신, 토르는 가장 강한 힘을 자랑하는 전사의 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활함의 대명사인 오딘과 상극이라면 상극이었다. 로키와 오딘은 아스 신족과 거인족의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을 움켜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토르와 티르는 반신족 출신인 프레이와 다크 엘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무식한 쓰레기들.’

그것이 내심 프레이의 그들에 대한 평가였다. 교활하지만, 지혜가 있는 오딘이 차라리 프레이로서는 좋은 것이었다. 그가 아스신족에 투신한 것도 오딘과의 거래 때문이었다.

그는 다크엘프들을 규합해서 토르와 티르를 견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프레이야와 그 추종 세력, 주로 엘프들은 시간과 약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훗날, 그가 이 선택에 대해서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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