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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36화 (36/497)

36화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원기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고, 여신의 실체가 남자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우리’가 널 여신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부터 말하자면...”

수한은 원기에게 주절주절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도에 참석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부터, 신관들이 발키리를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의 씨앗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까지.

‘하아, 나 바보였던 거야?’

원기는 조금은 허탈해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여신으로서 해야 할 일들도 있었고, 경험 많은 조제성이나 장수한과 붙어다니면서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꿈보다 해몽이네.’

원기는 내심 미소지었다. 신의 씨앗이 인간 남자로 자라나서 부득이하게 프레이야가 그 신의 씨앗에게 자리를 넘겨 주었다는 이야기는 황당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실례로 굴베이그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굴베이그의 경우, 그 씨앗이 된 여성이 여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 여신 부재 상태가 되어버리긴 했다.

‘아냐, 어쩌면 진짜 내가 여신의 씨앗이었을지도 모르지.’

듣고있던 원기는 자신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프레이야는 이 세상에 없었다.

‘죽고나서 진짜 여신이 되면, 여신의 씨앗이 맞고, 죽고나서 그냥 골로 가면 인간 박원기가 되는건가?’

물론 돌연사는 발키리들이 살려주기로 되어있으니, 명이 다해서 죽는 것이 될 터였다. 일단 장수한과 조제성의 예상 범위 내에는 뜬금없이 프레이야가 게임하던 소년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떠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신의 씨앗으로 현세에 태어난 소년이, 게임을 통해 여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자신들을 찾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예, 아니오’로 대답해줘. 너 여신 맞지.”

‘우와, 여전히 단도직입적이네.’

원기는 한숨을 쉬었다. 마법사이건, 신관이건 허언을 해서는 안된다. 그가 갖는 말의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신이나 여신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래서 장수한은 확실하게 못을 박는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요?”

“당연히 여신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야. 우리가 말이지. 솔찍히 넌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아. 나름대로 신중하긴 하지만, 아직 미숙해. 자칫 잘못해서 적대 신관 앞에서 발키리를 문자 메시지처럼 써대다간 바로 들통날거야.”

“그럼 왜 저한테 반말하는 건데요? 여신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네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모른척 해온 것도 있고 말이지. 물론 네가 원한다면 당연히 여신님으로 모셔야지. 그리고 여신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난 당연히 여신님으로 섬길 의사가 있어.”

“일단 맞아요. 제가 여신이에요.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대해 주세요. 특별히 여신의 모습이 된다고 해도, 그냥 편하게 대해주는 편이 나아요.”

원기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희연이나 연하도 알고 있는건가요?”

“그렇지는 않아. 그녀석들은 그정도로 눈치가 빠르진 않지. 사실 나도 제성형님이 아니었으면, 눈치채진 못했을거야. 그양반이야, 사람읽는데 도사가 아니냐. 일단 엘프 신관들은 다 알고있다고 봐야 할거야.”

“그렇군요.”

원기는 리디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여신의 본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리한 요구에도 절대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일단 희연이나 연하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게 나랑 제성 형님의 판단이다. 아직 어린데다가 세상 무서운줄 몰라.”

수한의 말에, 원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한이 말한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거액의 복권에 맞은 사람은 그가 살아온 일상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여신의 힘은 거액의 복권과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엘프들은 몰라도, 인간들을 신자로 받아들이게 되면 네가 받아야 할 스트레스도 이만저만한게 아닐거다. 인간은 누구나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 나나 제성형님도 예외는 아니다만...아니다. 제성형님이라면 맛이 갔으니 괜찮을지 모르겠다.”

“맛이 가요?”

“형수님 밖에는 눈에 들어오는게 없지않냐. 그 인간은 완전히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지. 그래도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게 부럽기도 하고 말이지.”

“음, 잘 모르겠네요. 형도 엘레니아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요? 서로 좋아하는 것 같던데.”

“뭐, 정도의 차이지. 1만큼 좋아하면 1만큼 기뻐하고, 100만큼 좋아하면 100만큼 기뻐지는거야. 내가 엘레니아를 좋아하는게 10이라면, 제성형님은 일만도 넘을거다. 초딩들은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식사로 카레가 나왔을 때,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뻐하지만 카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기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카레가 안나오면 좋아하는 사람만 손해지요.”

“훗. 그도 그렇군. 그래도 나이를 먹어보면 좀 달라. 무언가를 미치도록 좋아했었던 것이, 무언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이 그냥 괴롭기만 한 건 아니야.”

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먼 산을,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원기는 그의 과거도 순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원기만큼 고통에 몸부림치지는 않았지만, 큰 사고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상실감을 맛봐야 했을 터였다.

“그건 그렇고, 전대 여신의 기억은 다 가지고 있는거야?”

“아니요. 전대 여신의 기억이 아니라, 지식만 가지고 있어요.”

“그래? 그런데 발키리가 신관의 눈에는 보인다는 것도 몰랐어?”

“그게, 좀 복잡한데 말이지요.”

원기는 나름대로 수한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머리속에 지식위키나 지식KIN이 들어있는 것 같은거로군. 그것도 여신일 때에만.”

“그런 셈이에요. 수십만권의 책이 있는 거대 도서관 같아서 다 읽는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고,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기도 하고, 여신이 아닐 때는 궁금한게 있어도 검색할 수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랑 형님이 평상시에 궁금한 걸 메모해 둘 필요가 있겠군. 그래서 네게 여신님으로 돌아오셨을 때에 여쭤보면 되겠지.”

“말이 좀 이상한데요. 그냥 편하게 하세요.”

“그건 좀 무리야. 넌 여신님에 대한 존경심이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신님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거든.”

장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 것 같은데요?”

“아냐. 어두워진게 아니라, 하늘이 검게 변했어. 아니, 별이 보이는군.”

원기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그것은 수한을 비롯해서 희연과 연하도 마찬가지였다. 호흡도 왠지 고르지 못하고 가빠졌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엘레니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가 치켜든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닿자, 호흡이 어느정도 가능해졌다.

“황폐화가 여기까지 미쳤을 줄은...”

굴베이그 왕국의 노마법사 란체르트는 주위를 보며 탄식을 거두지 못했다. 모든 풀들이 말라죽고 마치 흑백의 세계처럼 변한 주위 한 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말해주는 버려진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황폐화? 뭔지 알겠냐?”

“음, 어디서 들었더라. 아, 성역의 5단계 이야기였네요.”

“5단계 성역?”

“성역은 일종의 지배 영역? 아, 운명이라는 게임의 영토 개념과 좀 비슷해요. 신전을 세우고 신관들과 신도들이 기도를 바치면, 그 지역에 신의 힘이 자리잡게 되는 거지요.”

“아, 학교랑 미용센터 같은 개념인건가?”

“예. 성역이 발동되면, 신의 힘이 그 지역에 일종의 생명력을 채우게 되는거에요. 학교와 미용센터는 4단계 수준의 성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리디아가 열심히 신전을 지킨 덕분에 생겨난 거지요. 그리고 1단계는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지구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줘요. 굴베이그 여신이 없어지면서 성역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거에요. 지금 엘레니아가 대신관의 성력으로 1단계 성역을 임시로 이곳에 구축한 것이고요.”

“그렇군. 어떤 신이든 믿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거로군.”

장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굴베이그 여신의 신자들이 여신의 씨앗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야 여신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만약, 반 신족이 모두 사라진다고 가정하니 심장이 옥죄어오는 듯이 답답해졌다. 살기 위해서 아스 신족이나 거인족의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굴베이그 여신의 신자들 상당수가 거인족과 아스 신족의 휘하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끝없는 투쟁의 세계. 죽고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세계, 힘만을, 승리만을 추구하는 신들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굴복해서 제 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세의 지옥이군.’

왜 프레이야가 신앙심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왜 리디아가 신성력을 나눠주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지 수한은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지구는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비하면 참으로 살만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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