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그것이 마틴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인삿말이었다. 9살 소년 마틴은 그렇게 부모에게 버려졌다.
“이런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다행히 외로이 혼자 죽어가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 위안일까.
마을 신전에는 마틴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져서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젊어보이던 신관님도 갑자기 노인이 되어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여신님을 잃은 결과였다.
새로 태어난 공주님이, 언젠가 굴베이그 여신님이 되실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체념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마을의 젊고 건장한 사람들은 모두 아스 신족의 영토로 떠나갔다.
그들이 남아 있어봤자, 그저 함께 죽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조금 남은 식량이 더 빨리 바닥을 드러내게 될 터였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은 아주 약간의 휴대식량만을 챙겨서 아스 신족을 향해 떠나갔다.
가족을 데리고 대륙에 유일하게 남은 반 신족인 프레이야님을 찾아 나선 이들도 있었다.
싸울 수 없게 된 이들, 노인, 불구자, 병자들을 가족의 손으로 쳐죽이도록 가르치는 아스 신족의 치하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프레이야님은 엘프의 신이고, 인간들의 신은 아니었지만 설령 엘프의 노예나 가축이 된다고 해도, 아니 정 안되면 숲 한 구석에 구덩이를 파고 산다고 해도 죽여 내쫓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엘프들의 숲을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크엘프의 손에 죽어나갔다. 곧 엘프들도 프레이야님을 잃게 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죽고 싶지 않은 이들은 싸울 수 없는 가족들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갔다.
그들이 한동안 먹을 수 있도록, 먹을 것을 두고 가준 것만 해도 그들로서는 많은 희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종말이 찾아왔다.
하늘에 해가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들이 보이는 밤하늘이 되어갔다. 처음에는 하늘이 갈수록 맑아진다고 여겨서 아름답다고 여겼지만, 차츰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마을 주변에서 빛을 발하는 곰팡이들이 피기 시작했다. 밤을 빛내는 아름다운 꽃처럼 하얗게 빛나는 식물과는 다른 곰팡이들은 손을 대면 부서져 나갔다.
점차 주변에 풀들은 사라지고, 빛나는 곰팡이들만 남아갔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풀을 뜯어야만 했다.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풀은 아닐지라도 염소들에게 먹이면 젖이 되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풀은 사라지고 하얗게 빛나는 곰팡이들로 가득해진 들판에 괴상한 벌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그것을 보고 백골전갈이라고 불렀다.
백골과도 같은 모습을 한, 거미와 전갈을 섞어놓은 듯한 이 벌레들은 살아움직이는 모든 것을 잡아 먹었다. 덩치는 개만큼 크고, 숫자는 많고, 껍질은 단단했다. 움직임은 둔했지만, 꼬리에 달린 집게는 민첩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순식간에 잡아챘다. 마치 덫에걸린 짐승처럼, 잡힌 팔이나 다리를 끊지 않고는 도망갈 수 없었다.
어른들은 그것을 두고 신을 잃은 땅의 주인들이라고 말했다.
점차 호흡은 가빠졌고, 열이 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차츰 병약해졌다. 염소에게 먹일 풀이 부족해서 염소를 잡아서 커다란 솥에 스프를 만들었다.
흰 곰팡이와 백골 전갈들은 점점 마을을 둘러싸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뭉쳐서, 그저 다가올 죽음만을 기다렸다.
굴베이그 여신님의 가르침, 인간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굴베이그 여신님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런게 무슨 소용이 있냐며, 백골 전갈들이 넘치는 벌판으로 뛰어들어 미친듯이 날뛰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잔인한 아스 신의 백성이 되려고 갈거라면, 왜 자신을 죽이고 가지 않았냐고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신전에 모여서 신관님의 주도하에 지금은 들어줄 신이 없는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그저 다가올 최후만을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이리로 피하지요. 꺅! 여기 사람들이 있어요! 으악! 시체도!”
갑자기 신전 안으로 신전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날개달린 독수리같은 괴물을 탄 아름다운 소녀였다.
‘귀가 뾰족해. 엘프인가? 시체를 보고 놀라다니. 순진하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환한 빛이 신전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틴이 눈을 돌려 빛이 나오는 곳을 바라보자, 거기엔 아름다운 엘프 신관의 모습이 있었다.
빛나지만, 눈이 부시지 않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기운이 조금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맹렬히 배고픔이 덥쳐왔다. 죽은 듯 늘어져있던 사람들에게서 일제히 기침소리가 튀어 나왔다.
“질병이에요! 어떻게 하지요? 죽음의 저주에 걸렸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은거나 마찬가지에요.”
빛을 발하는 엘프 여신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사람들은 허탈한 미소를 짓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토하는 기침을 하는 이들은 신관의 치유로는 낫지 않는다. 신관의 기적이 아니면 낫지 않지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신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의 신관님인 브리 신관님도 꽤 상위 신관이지만 기적을 행할 수는 없었다.
“다들 한 번씩은 기적을 쓸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엘레니아님을 제외하면 꼼짝을 할 수 없을거에요. 신전이 없어서 신성력을 보충할 수가 없어요. 굴베이그 여신님을 구하러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으니.”
엘프 여신관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하지만, 곧 사람들의 눈빛은 담담하게 변했다. 이런 지옥같은 세상에서 잠시 더 살아남는다고 뭐가 변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차라리 굴베이그 여신이 되살아난다면, 다른 이들만이라도 좋은 세상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마을을 떠난 이들 역시 그들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들이 돌아올 땅이 필요했다.
“일단 먹을 것부터 나눠 줍시다. 물은 있습니까?”
나이들어 보이는 남자 엘프의 말에 엘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을 끓이고, 식량들을 꺼냈다. 향긋한 과일 냄새가 신전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소화가 잘되는 고기가 없는게 아쉽네요.”
조금 젊은 거구의 남자 엘프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마티는 자기가 듣던 엘프들에 대한 상식과 너무 달라서 입을 딱 벌렸다.
얼굴은 엘프답게 미형이었지만, 몸은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근육덩어리였다. 정말로 고기를 먹지 않고는 저 체격을 유지할 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마틴의 머리속을 스쳤다.
“실없는 소리는 좀 그만해. 그보다 환자들이 누울 침상을 좀 더 확보했으면 좋겠는데, 가져다 줄래?”
등에 두개의 칼을 엑스자로 차고 허리에 긴 검을 왼쪽에 둘, 오른쪽에 한자루, 도합 다섯자루를 찬 여자 엘프가 거구의 엘프에게 말했다.
“침상은 여기있는게 다입니다. 다른 집들은 전부 괴물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브리 신관이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필요한 옷가지나 침구등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전갈들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낮에는 땅 속에 잠복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신전 주위를 포위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저희가 올 때는 보지 못했는데요?”
활을 등에 맨 귀여운 인상의 엘프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신성력에 상극이라, 그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성력 결계 없이 다가가면 꼬리를 드러내서 마치 덫처럼 잡아 챕니다. 그리고 이 마을은 희망이 없습니다. 죽음의 저주가 여러분에게 옮기면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어서 떠나주십시요.”
그러자 엘프 신관들의 눈이 모두 한곳으로 모였다. 오우거와도 같은 몸집의 엘프였다. 반면 거구의 엘프는 또다른 남성 엘프를 쳐다 보았다.
“죽음의 저주라는거, 내가 보기엔 결핵이다. 폐병이라고 해서, 예전엔 한번 걸리면 무조건 죽는 병이었지. 전염성도 그리 크지 않고, 병의 진척도 느리니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흑사병이나 천연두였다면 여기있는 사람들 이미 다 죽었을거다.”
평범해서 이상한 느낌의 엘프의 말에 거구의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 신관들은 다시 환자들을 돌보는데 전념했다.
그때 신전 창문에 붙어서 밖을 내다보던 한 소년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누나를 도와주세요. 누나가 약초를 가지러 집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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