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어떻게 된거지?”
원기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황급히 신전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러자 신전 가까운 집 2층 창문 옆에 붙어서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집 뜰은 물론이고 창문 안쪽에도 백골전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소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작은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서있었다.
“아마도 신전의 주인을 바꾸는 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엘레니아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본래 굴베이그 여신을 섬기던 신전은 미약하나마 성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엘레니아를 비롯한 신관들이 프레이야의 신전으로 바꾼 것이었다. 신전 축성이라지만, 신전을 개종한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1단계 성역이었던 폐신전이 2단계 성역의 활성화된 신전으로 바뀐 것이었다. 체력을 빼앗기고 쇠약해질 수 밖에 없는 1단계 성역에서 체력과 생명력의 회복이 빨라지는 2단계 성역으로 전환된 것은 좋았지만, 지금까지 신전이 유지하던 영역의 신성력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곧 새로운 신성력이 이 영역을 채우고, 더 넓은 범위까지 확장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탓에 신전의 영향권에 들어있던 마을의 건물 일부가 갑자기 영향권 밖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백골 전갈들이 소녀의 존재를 느끼고 몰려든 것이다.
“성역을 만들어 주세요.”
원기의 평범한 요구에, 엘레니아는 정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성전 재활성화를 위해서 그녀를 비롯한 엘프 신관들의 모든 성력이 소모된 것이었다.
“성역을 만들 수가 없어요.”
“그거 큰일이네요. 그럼 이 신전의 영향권이 저 소녀가 있는 곳까지 미치는데는 얼마나 걸리지요?”
수한이 엘레니아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엘레니아가 지나치게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동요하는지 수한은 알고 있었다. 여신이 모처럼 자신을 향해, 명을 내렸다고 할까, 요청을 했는데 그것에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은 신관으로서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틀은 걸릴거에요. 저희가 성역을 만들만큼, 성력을 회복하는데는 하루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어쩔 수 없네. 원기야. 네가 가라. 꼴을 보니, 점프는 못뛰는 것 같으니, 사정거리는 지상으로 부터 1미터라고 보면 될거다.”
수한의 말에, 원기는 자신의 장비를 살펴 보았다. 특히 발 부근을 세심히 살폈다. 게임 캐릭터용 전투 부츠 위에 두꺼운 가죽으로 된 신발을 신었다. 부드럽지만 질기고 두꺼운 가죽은 쉽게 구부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인간을 넘어서는 힘캐릭이기 때문에 신고 거동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꺼운 철판을 이곳 저곳에 덧댄 상태였다. 바지 역시 부츠와 버금가는 두꺼운 가죽과 장갑판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성에서 나올 때의 장비는 다크엘프들에게 맞아죽으면서 날려먹었지만, 탈출부대가 여벌의 장비를 챙겨온 것이었다.
‘좋아. 괜찮겠지’
원기는 크게 심호흡을 한다음,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땅 속에서 거대한 집게가 튀어 나와서 발목을 잡았다.
빠캉하는 소리가 났지만, 역시 두꺼운 가죽을 뚫을만한 힘은 없었다. 장갑판 위로 닿은 집게는 듣기 싫은 쇳소리를 냈지만 원기가 느끼는 압박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원기는 자신의 발목을 잡은 집게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왼쪽 발목을 집게가 찝었다. 하지만 역시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조금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다시 오른발을 옮기자 발목을 잡고 있던 백골전갈이 딸려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집게가 이번엔 무릎 언저리를 찝었다.
‘별거 아니군.’
옷을 타고 기어오르는 벌레였다면 더 섬칫했겠지만, 덩치가 덩치인만큼 벽을 타거나 천을 타고 오르는 재주는 부리지 못했다. 그저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발톱을 땅에 박아넣거나 이빨로 발목 언저리를 물어뜯을 뿐이었다.
‘재수 없고, 섬칫하긴 하군.’
침인지 체액인지 모를 것을 흘리면서 발목 언저리를 갉고있는 전갈을 보면서 원기는 등골이 오싹한 혐오감을 받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발걸음을 빨리했다.
절그럭, 절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원기의 하반신에 달라붙은 백골 전갈의 숫자가 많아졌지만 거침없이 걸어가서 소녀에게 다가갔다.
‘롱다리에 감사해야 하나.’
원기는 자기 체격을 왕창 키워놓은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의 실제 체격이었다면, 백골전갈의 공격 사정 범위에 제 3의 다리도 포함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격 자체가 평범치 않으니, 소녀의 곁에 가서 소녀를 바로 안아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녀를 번쩍 든채로 그는 걸음을 휘적휘적 옮겨서 성역 안으로 돌아왔다. 성역 안으로 들어오자, 죽어도 안떨어질 듯이 붙어있던 집게들이 떨어져나가면서 냅다 성역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소녀를 내려주자, 소녀는 조부로 보이는 노인과 동생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 원기는 허리를 숙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별건 아니었지만, 내심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불안함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아닥쳤다.
“오빠? 괜찮아요?”
연하가 다가와서 물어봤다. 사실 그 무지막지한 꼬리에 연신 찝혔으니 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원기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 외로, 희연은 얼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약점 발견인가.’
원기는 피식 웃었다. 완벽 초인으로 보였던 희연이 벌레 종류에 이렇게 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다. 이정도로 크고 무지막지한 벌레라면, 벌레 공포증이 없어도 무섭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거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작은 거미를 눌러죽이거나 내다버릴 수 있지만 큼직한 거미에는 바짝 어는 것과 비슷할 터였다.
“뭘 이런걸 갖고 놀라고 그래? 기껏해봐야 게나 새우 같은 놈인데.”
원기는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의 안색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연하가 귓속말로 주의를 줬다.
“언니는 게나 새우도 못먹어요. 벌레같다고.”
“그건 좀 심하다.”
원기는 희연에게서 예상 외로 심하게 여자다운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서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은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닐 뿐더러, 그것이 내심 호감이 가는 상대라면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도, 그 벌레 싫어하는 거랑 관계 있어요. 보통은 보이는 족족 때려 죽여요. 죽도로 모기도 잡는다니까요. 방에 있는 죽도는 벌레 퇴치용이에요.”
“다, 달인이네.”
중국 영화에서 젖가락으로 파리잡는 이야기는 보았지만, 실제로 생활에서 죽도로 모기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치 못한 탓에 원기는 식은땀을 흘렸다.
혼자 생활하기 쓸쓸하다고 희연과 방을 트고 살았던 연하는 그녀의 결벽증에 학을 뗀 모양이었다. 청소와 공부, 수련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면서도, 희연과 좋다고 붙어다니는 것을 보면, 연하의 무던한 성격도 있지만 희연의 매력도 꽤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연하의 평가로는 여왕님이라기보다는 엄마였지만.
“게나 새우라. 원기야. 나가서 저 놈들 좀 몇마리 잡아와라. 먹을 수 있나 살펴보자.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데, 영양가 많을 것 같지 않냐?”
수한이 입맛을 다셨다. 원기가 다시 보니, 백골전갈이라는거 흉칙하기만한 괴물은 아니었다. 상성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오토바이 헬멧을 쓴 상대한테 맨주먹으로 안면 펀치를 날려봐야 효과는 거의 없고, 손만 아픈 것과 비슷했다.
왠만한 철제 부츠는 우그러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게 공격이지만, 두꺼운 가죽과 그 안에 있는 두꺼운 근육과 골격을 상처입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만만해 보이니, 괴물이라기보다는 그냥 벌레처럼 보였다. 게다가 먹을거라고 말하면서, 게다 새우다라고 말하니, 그 비슷한 것으로 안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새우나 게는 원기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덩치를 보니 더욱 끌렸다.
원기는 이번엔 별 긴장하지 않고 성역에서 나갔다. 다시 그의 다리 부분에 여러개의 꼬리가 달라붙었다. 원기는 살짝 허리를 구부리고 왼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마리가 그의 팔을 꽉찝었다. 그가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키자 제법 큰 놈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그리고 원기는 그 꼬리를 오른 손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 신전 뜰로 다가왔다. 성역에 들어온 순간, 찝게가 열리면서 놈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오른 손으로 단단하게 잡고 있는 탓에 도망치지 못했다. 전갈은 마치 물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버둥대다가 곧 축 늘어져 죽어버렸다.
빠직.
원기가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껍질이 약해져서 부스러졌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도 살짝 균열이 생기면서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응? 껍질이 저절로 부스러지네. 껍질 벗길 필요 없어서 좋겠다. 빨리 이쪽에 가져와라.”
수한은 미리 큰 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원기도 재빨리 그 솥에다가 백골전갈을 집어 넣었다. 잠시 후, 껍질은 빨갛게 변하면서 부서져서 바닥에 깔렸다.
“오, 잘익었는데. 우리가 먼저 시식을 해보자. 독이 있을지 모르니.”
수한의 말에 원기도 고개를 끄덕인 다음, 큼직한 집게를 이용해서 꼬리 부분을 들어올렸다. 여덟 개의 다리도 작지 않지만, 큼지막한 꼬리는 거대한 새우와도 비슷해 보였다.
한희연은 안색이 파랗게 변해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연하도 황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마을 사람들과 엘프들은 설마 그걸 정말로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하는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새우나 게를 먹어본 일이 없는 이들에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원기와 수한에게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먹음직스러운 진수성찬이었다.
“난, 언제나 게 다리가 이렇게 컸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지. 이거 완전히 사람 팔뚝만하네.”
“저도 그래요. 새우가 이렇게 어른 허벅지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양념이 없고 소금뿐인게 아쉽네요.”
수한과 원기는 소금을 찍어서 백골전갈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오! 이거 진짜 게하고 비슷한 맛이다!”
“정말이에요. 새우랑은 좀 다르지만 죽이는 맛인데요!”
원기랑 수한은 신이나서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비위가 상하는 듯, 마을 사람들과 엘프들이 고개를 돌려 외면하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겠네.”
수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원기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곳에는 원기는 없고 가죽 갑옷과 철판들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수한의 메시지 창이 시야에 열렸다.
[사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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