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게 되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니 문명세계에서 가장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TV, 인터넷, 책, 만화 기타 등등.
하지만 한희연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첫번째 것은 오직 하나, ‘화장실’이었다.
‘젠장, 변비 걸리게 생겼어.’
“언니. 아직 안끝났어? 나도 슬슬 배아픈데.”
“잠시만 기다려.”
세스룸니르에서 탈출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챙길 수 있는 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조제성 사장이 챙겨준 고마운 서바이벌 셋트가 있었다.
바로 접이식 좌변기와 물타월 셋트였다. 수한을 비롯해 모두가 조제성 사장을 세심한 천재라고 추켜올리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붙잡아 주지 않으면 바람에 쓰러질지 모르는 마치 옷가게의 시착실처럼 생긴 아슬아슬한 화장실 천막과, 접이식 의자에 구멍이 뚫려서 비닐봉지를 장착하게 되어있는 좌변기는 없는 것보다는 엄청나게 편리하지만, 마음편히 용변을 볼 수 있는 안식의 장소가 되기에는 좀 부족함이 있었다.
희연은 용변을 본 후, 휴대용 비데라는 스프레이 깡통을 사용한 다음 비닐봉지를 처리하고 앉았던 자리를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비닐봉지 내부에는 수분을 흡수하는 부분이 있어서, 소변이 찰랑거리는 것을 막아줬다.
‘자연에서 분해되는 비닐이니, 아무데나 버려도 된다고 했지. 참 대단하긴 대단해.’
“언니. 잘 잡아줘야 해.”
“걱정하지 마. 그건 그렇고 빨리 안끝내면 마차 출발하겠다.”
여행을 하게 되면서 한가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라면, 엘프들은 자연 생활에 대단히 익숙하다는 것과 용변을 보는데에는 우아함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었다.
초식생활을 주로 하다보니 변이 구리지 않다는 것 정도가 약간의 우아함이라고 봐줘야 할지 몰랐다.
신관들이 돌아가면서 성역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성역을 발동시킨 신관에게서 30미터 이상 떨어지는 것은 곤란했다. 따라서 마차가 멈춰설때마다 남자들은 앞쪽으로, 여자들은 뒷쪽으로 이동해서 용변을 처리해야 했다.
‘역시 우락부락한 남자로 캐릭터를 만들었어야 했나.’
적당히 노상에서 일행을 등지고 소변처리를 하는 원기와 수한의 모습은 살짝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샤워는 물론이고 목욕할만한 곳도 없었다. 젖은 종이타월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벌레들의 접근을 용서치 않는 한희연이었지만, 여행이 길어지면서 점점 피곤해지기도 했고, 별 수 없이 적응해가고 있었다.
성장이라면, 성장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포’라니 너무해. 조자룡 정도면 좋지 않았어? 내가 여포하고 싶었는데.”
“넌 황충이면 충분해. 냄새나는 아가씨야.”
“윽, 냄새나?”
“육포를 그렇게 먹었으니 그렇지. 엘프가 되어서도 고기를 그렇게 먹니?”
여포라고 하면 창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알아주는 명궁 중 하나였다. 황충보다는 여포가 좀 나아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원기 오빠. 엄청 세진 것 같아. 굉장하지 않아?”
연하의 말에, 희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진보하긴 했지. 하지만 방어만 좀 좋아졌을 뿐이야. 워낙 신체 조건이 좋아졌으니.”
“방어만? 공격은? 휘두르는거 보니 무시무시하던데.”
“음, 넌 격투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간단히 말하면 방어는 경험이야. 그리고 공격은 오랜 시간의 단련이지. 많이 맞아본 사람이 상대가 어떻게 공격올지 알고 막을 줄 알게 되는거야. 반면 공격은 경험과 꼭 연결되는 건 아니야.”
“경험치가 높으면 공격도 강해지는거 아냐?”
“그건 안그래. 게임이 아니니까. 그래, 좋은 비유가 있다. 공격은 야구의 투수라고 생각하면 되는거야.”
“투수?”
“그래. 상대가 없어도 혼자서 공을 쭈~욱 던져오면 시속 150키로의 직구를 던질 수 있지. 그처럼 상대 없이도 검을 계속 휘둘러오면, 공격에 위력이 붙어. 날카로움, 파괴력 모두 향상되지. 그게 공격이야. 어설프게 경험이 붙어서, 상대가 변화구에 약하다는걸 알게되면 어떨까? 직구를 던져온 사람이 변화구를 던지면, 어설플 수밖에 없어. 어설픈 변화구는 변화구에 약한 상대한테도 얻어 맞을 수 밖에 없는거야. 그래서 공격은 쉽게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경험을 쌓으면 최악으로 나빠질 수도 있지.”
상대에 맞춰나가기 위해서 자신의 폼을 망가뜨리면, 예리한 공격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예리한 맛이 있는 공격, 원기는 그런 면에서 낙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워낙 무지막지한 힘과 육체가 있으니 대충 휘두른 공격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자들이 없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상대라면, 에인페리어들은 고사하고 다크엘프 레인저들도 쉽게 피할 수 있는 예리한 맛이 없는 그저 육중하기만한 공격이었다.
“그럼, 아직 별볼일 없는 건가? 쓸만한 구종 하나 없는 투수인거 아냐.”
“공격은 그래. 다만 방어는 이미 내 수준을 넘어섰어. 방어 경험은 나보다 위일거야.”
희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기를 상대하면서 그녀 역시 경험을 얻었다. 리치가 길고 무거운 공격들, 그런 공격들을 피하며 상대의 숨통을 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원기는 그 이상이었다.
희연은 기본적으로 적을 죽여서 자신을 지키는 타입의 검사였다. 일격에 적을 죽이면, 그 다음엔 방어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원기는 숱하게 두들겨 맞았다. 희연과의 대련에서도 그렇고, 다크엘프들과의 대전에서도 그랬다. 한 방 경험하기도 힘든 살기어린 공격들을 이미 수천 번 이상 경험한 것이었다.
희연의 예리한 공격, 일격 필살의 예리한 공격도 통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물론 일격에 죽지 않고 부상을 입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희연에게는 부담스러웠다.
‘아직은 한 방 맞아 죽을 거 수십 방 맞아 죽는 수준이지만...’
“나도 검술을 좀 배워둘까?”
“참아. 넌 그냥 궁술을 좀 더 갈고 닦는게 나을거야. 원기오빠처럼 방어 경험을 쌓는건, 미친 짓이야. 아니, 우리한텐 불가능해.”
“대단한 건지, 대단하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네.”
“그건 그렇고, 아직도 이어지는거니? 팔떨어지겠다.”
“자꾸 그러지마. 끊기면 어쩌려구.”
“이젠 좀 끊어라. 부탁이다.”
희연의 재촉과 함께 다시 여행이 재개된다는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변비 걸리면 다 언니 탓이야. 언니가 너무 오래싸서 그래.”
황급히 추스린 연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때 북서쪽 하늘 위에서 불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을 태우는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불새는 편지를 전하거나, 정찰임무를 맡길 수 있었다.
“북서쪽에서 누가 오나 본데? 굴베이그 왕국에서 맞으러 오는 건가?”
연하는 여행이 빨리 끝나길 고대하던 터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희연의 안색은 되려 어두워졌다.
“굴베이그 여신의 추종자들 중에 성역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연하는 그녀의 말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 일행은 굴베이그 왕국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고 있었다. 성역이 사라져 황폐한 땅이었다. 사신들은 다른 신의 성역을 몰래 숨어 돌아돌아서 왔지만, 지금은 신관들의 성력에 의지해서 일부러 황폐한 지역의 도로를 이용해서 오고 있었다.
굴베이그 왕국에서 마중을 나올 수 있을리가 없었다.
연하는 황급히 움직여서 제일 큰 마차 위에 올라서서 불새가 배회하는 곳을 살펴 보았다.
“검은 색과 붉은 색의 투톤 칼라로 도장한 기사들이에요. 검은 색이 위, 붉은 색이 아래로 칠해진 방패를 들고 있어요.”
연하의 말에, 굴베이그 왕국의 난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하늘과 피의 대지를 상징하는 문장을 가진 기사단, 학살자 로나스의 기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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