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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44화 (44/497)

44화

로나스는 심연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처음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주마등은 커녕, 일순간에 죽음을 당해서 죽음에 대한 자각조차 얻기 힘들정도였다. 하지만 곰곰히 죽음의 순간을 되새김으로써, 그는 희연의 움직임을 기억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의외로 선명한 그녀의 움직임, 너무나도 예리하고 빠른 그녀의 일격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검술에 재능을 가진 소녀가, 검술에 미친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단련을 거듭해서 만들어진 세상에 흔치 않은 보석과도 같은 일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내 목으로 빨려드는 듯 싶었지.’

어린 시절, 인격이나 재능이 만들어지기 전에 구축되는 재능은 나이들어 배우는 사람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환상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론이나 훈련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그 무엇.

하지만 로나스 역시 천재였고, 수백년 동안 여러번 죽음을 맞이하며 많은 실전 경험을 가졌다. 그는 심연속에서 희연의 모습만을 떠올리며 몇번씩 반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찌르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찌르기처럼 예리하지는 않지만, 그녀보다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찌르기를 구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참공검의 능력과 그녀의 찌르기가 함께 하게 된다면,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함을 보여줄 수 있게될 터였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상대와 목숨을 걸고 겨뤄서, 패했다.

하지만, 승리보다는 패배에서 배울 것이 많은 법이었다.

‘다시 붙는다면, 그녀는 결코 날 이길 수 없다.’

로나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에 부활한다면, 자신과 겨룰 수 있는 에인페리어들은 한손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터였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곧 사라졌다.

[당신은 부활의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그에게 붙어있던 발키리의 전언이었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이렇게 버려지기엔 아까운 존재입니다.]

로나스는 발키리에게 하소연했다.

[경쟁은 더 뛰어난 자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저는 한층 성장했고, 저보다 뛰어난 자는 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말에, 발키리는 고개를 저었다. 발키리에게 감정은 없지만, 성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신 티르에게 사역되는 오랜 세월의 덕분에 그녀는 조금은 인간적인 반응을 배웠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경쟁은 뛰어난 자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탈락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가진바 능력을 쥐어 짜내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 성과를 못보인 당신을 용서해선 안됩니다.]

발키리의 친절하고 냉정한 답변에 로나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발키리를 조용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미련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로나스의 영혼은 티르의 손을 떠나서 근원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현실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며, 그 이후의 운명이 어찌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특히 아스 신족들에겐 관심도 없었다.

낭중지추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송곳은 주머니에 있어도 그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경쟁 따위가 없어도, 유능한 자는 곧 빛을 발하게 마련이었다.

경쟁은 유능한 자를 골라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자든 무능한 자든 최대한 쥐어 짜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유능한 자가 살아남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능한 자들일수록 더 철저히 쥐어짜서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바로 경쟁의 실체였다.

탈락의 공포를 이용해서, 그리고 1등에게 나눠주는 권력과 부의 한 조각을 이용해서 철저히 쥐어 짜고 마지막에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그것이 아스 신족이 주장하는 적자생존, 약육강식, 경쟁 사회의 실체였다.

그러한 경쟁 속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패자인 것이다. 경쟁의 승자는 오히려 더 철저히 쥐어짜여서 마지막에는 공허함만 남게될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로나스는 이렇게 버리기엔 좀 아까운 자였습니다만.”

“상관없다. 인간 따위는 벌레와 마찬가지야. 어차피 죽어도 죽어도 계속 기어나와서 세상을 다시 가득 채우지. 잘난 벌레 한마리를 키우기보다는 모든 벌레를 쥐어짜는게 이득이지.”

티르는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쳤다. 경쟁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먹고, 조금 더 잘나겠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모습은 쳇바퀴 안에서 발버둥치는 쥐새끼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들이란 얼마나 천박하고 어리석은 생물들인지.”

티르는 그렇게 비웃고는 사라졌다. 대신관이자, 최강의 에인페리어인 그리날은 그런 티르의 자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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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일행은 무사히 굴베이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 하나는 굴베이그의 여신의 씨앗이 공주의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행을 놀라게 만든 것은 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 공주가 15세의 나이에 심겨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공주에게는 여신의 씨앗과 공주 자신의 영혼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이중인격과 같은 형태였다. 한 육체에 두 영혼, 그리고 굴베이그 왕국의 공주는 여기사로서 성장한 경우였다.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 모르지만, 아스 신족의 영토에서 여성은 정략혼의 대상 이상은 아니었다.

여왕, 혹은 여기사 등은 오히려 반 신족의 영토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심 인격은 굴베이그 여신의 씨앗이, 유사시에 공주의 원 인격이 육체를 통제하는 방식이라, 이중인격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국가와 백성, 신을 위해 자신의 육체까지도 바친다는 건가.’

원기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굴베이그 왕국의 모습은 처참했다. 질서가 아직 유지되고 있다고 하지만, 생활상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문제는 아스 신족 휘하의 땅보다는 그나마 났다는 것이었다. 반 신족의 휘하에서는 그나마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아스 신족의 땅에는 문화라는게 존재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죽이고 겁탈하는 야만 문화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원기는 여신으로 나타나서 굴베이그 왕국의 대표들과 계약을 맺고 법령을 선포했다.

주된 내용은, 엘프는 고귀한 종족으로서 고위 귀족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같은 등작의 귀족일 경우 엘프는 반등급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추가로 엘프에 대한 처벌권은 엘프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이 있었다.

각 영주들이 영지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제국 법 내에서 보장되지만, 엘프가 여행으로 들렸을 경우 그들에 대해서는 구속도 처벌도 불가능했다.

물론 불만이 나올 만 했지만, 대신에 당근을 확실하게 던졌다.

그것은 바로 세금 문제였다.

세금은 제국법으로 정해서, 수확량의 10%만으로 못을 박았다. 통행세, 인두세 등의 모든 세금을 금지해 버렸다.

그나마도 향후 5년간은 면제해주기로 했다. 아니 나라에서 무상으로 식량을 비롯해 다양한 것들을 제공하기로 했다.

남은 인구 30만이라고 하지만, 솔찍히 아프리카 난민사회 수준도 안되는 경제 수준이라, 세금이라고 걷어봐야 별 것이 없었다.

조제성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현실세계의 돈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었다. 세금을 걷기 보다는 그저 자기들 먹고 살것만 만들어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었다.

각 영지를 운영할 운영비도 엘프들을 통해서 제공할 뿐 아니라, 영지의 치안, 복지 등에 따라서 성과급까지 약속한 것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오는 것들이, 엘프들을 통해서 제공되는 것으로 둔갑된 덕분에, 반발하는 이들은 없었다.

몇몇 기득권을 지닌 귀족들이 골칫거리이긴 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 놈들은 정리해 버리는게 좋지 않을까요?”

원기가 수한에게 묻자, 수한은 깜짝 놀랐다. 수한은 여신의 모습을 한 원기에 대해서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익숙해 질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삼가하는 편이 좋으실, 아니 좋을 듯....”

평상시의 원기를 대하듯 대하질 못했다. 장난삼아 여신 캐릭터의 가슴을 주물러 보게 한 적이 있는데, 몸둘 바를 모르고 어려워해서 원기가 되려 미안할 정도였다.

여신이 가진 카리스마라고 할까 위엄 때문이었다. 특히 수한에게도 존재하는 신앙심이 작용해서, 감히 불경한 생각 따위를 가질 수 없었다.

“저런 나쁜 놈들을 내버려 두는게 이상한 것 같은데요. 그렇게 안절부절좀 하지 말아요.”

“어찌 감히. 여신님께서 처벌하시겠다면 감히 막을 수는 없지만, 삼가하시는 편이 좋으실 거라고, 아니 좋을 것 같....”

원기가 쳐다보자, 말을 놓으려고 했지만 결국 말끝을 흐리고 말핬다.

“어쩔 수 없네요. 일단 돌아가서 얘기해요. 수한이형 생각보다 소심하네요.”

원기 일행은 굴베이그를 세스룸니르에 안내했다. 그리고 유혜서와 조은혜에게 맡겼다. 일단 한국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굴베이그 여신의 씨앗을 지닌 그녀였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평범한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원기 일행은 열흘 만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컨디션이 왠지 좋은데? 조금, 아니 많이 낯선 것 같기도 하고.”

원기는 본래 육신으로 돌아온 다음, 위화감을 느꼈다. 시야가 많이 낮아진 탓에 자신이 왠지 작아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몸 상태가 좋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절한 운동을 계속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음. 나도 컨디션이 꽤 좋아. 그런데 왠지 좀 어깨가 뻣뻣한 느낌이 드네. 몸좀 풀겸 검이나 휘둘러 볼까? 어때?”

희연은 원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였다. 하지만 원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낯선 느낌을 받았다.

‘헤에. 희연이 얘가 이렇게 작고 약했나?’

“좋아. 한 번 붙어보고 싶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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