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원기는 희연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귀엽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녀의 강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미드가르드에서 현신한 그녀의 게임 캐릭터의 모습에선 괴물을 느꼈다.
‘마치 호랑이 앞에 선 것 같았지.’
원기 자신을 평가할 때, 자신은 곰 정도는 된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호랑이와 곰은 사실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곰이 일부분에선 조금 나은 점이 있을 뿐, 전체적인 능력에선 호랑이가 압도한다고 봐야 할 터였다.
그리고 눈앞에 선 희연은 죽도를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고양이처럼 보였다.
‘좋아. 그럼 한번 붙어볼까.’
원기는 몸을 풀 겸 가볍게 죽도를 휘둘렀다. 확실히 몸이 가볍고 힘이 붙은 듯, 양손의 죽도가 가볍게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힘차게 들렸다.
하지만 뭔가 어색했다.
‘어라? 이런 느낌이 아닌데.’
원기는 죽도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몸의 움직임은 굉장히 좋아졌을터인데, 왠지 모르게 둔한 느낌이 들었다.
“뭐해? 슬슬 시작해도 되겠어?”
희연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희연을 본 순간 원기는 희연이 아까보다 커 보였다.
‘응? 이게 무슨 일이지?’
여전히 고양이로 보이는 희연은 점점 더 크게 보였고, 자신은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마침내 호랑이보다 더 큰 거구로 변해있었다. 고양이인체로.
그리고 원기는 자신이 곰이 아니라, 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함은 상대적이었다. 게임 캐릭터인 원기와 현실의 원기는 알멩이는 같지만, 껍데기가 전혀 달랐다.
현실의 희연은 얼마전에 원기가 마구 짓밟아버린 기사단원들 가운데 한 명 만도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력의 가호를 받은 기사들과 비견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것이지만, 그런 기사단을 짓밟은 원기의 눈으로 볼 때는 약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본래의 육체에 돌아온 원기는 더 약해져 있었다.
“자, 준비가 끝났으면 공격해 봐.”
희연과의 대련은 언제나 지도 대련의 성격이 강해서, 언제나 먼저 공격하는 것은 원기였다.
원기는 그녀에게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 소용 없다’고.
그는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픈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뱀이나 고양이 앞에서 쥐들이 본능적으로 꼼짝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망쳐도 잡히고, 공격해도 소용없다. 그저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상대가 배부르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원기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희연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전의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허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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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성장했는걸.’
희연은 꼼짝못하는 원기를 보며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강함을 알아보는 것은 꽤 중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심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원기의 팬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원기는 저돌적이거나 난폭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싸워야 할 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우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성기사 그렌과의 격전도 그러했고, 다크엘프들에게 뛰어드는 모습도 그러했다.
그리고, 기사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그녀를 전율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한 마리의 맹수, 육식동물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맹수들이 용맹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의 맹수들은 겁쟁이들이다.
왜냐하면, 맹수들에게 있어서 부상은 죽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쥬라기 공원같은 영화에서 보면 공룡들이 풀려나자마자, 인간을 덥치지만 그건 인간의 입장에서 맹수를 본 착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밀림에서 정체불명의 과일이나 버섯을 쉽게 먹을 수 없듯이, 맹수들은 절대 낯선 동물을 습격하지 않는다. 인간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동물을 습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인간을 습격해 본 맹수, 그 가운데도 인간의 무서움을 모르는 맹수만 인간을 공격할 수 있다.
운동선수들에게 부상은 늘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부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경험과 경력이 긴 운동선수들일수록 그들의 한계를 잘 알고 부상을 최대한 피해가면서 싸운다.
원기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듯한, 그런 싸움은 그녀에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동경해온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얕잡아 보는 듯한 눈길을 보였을 때 화가 치밀었다.
동경의 상대가 자신을 가소롭게 보는 순간, 발끈한 것이었다.
그리고 원기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나도 참, 검술을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상대에게 무슨 생각인거야.’
한희연은 내심 조소하면서, 검을 내렸다. 원기는 그녀가 검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꼼짝하지 못했다.
“좀 더 연습하지 않으면, 상대가 될 수 없을 것 같네.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샤워를 할 수 있겠네.”
“하아. 그런가. 숨도 못쉬겠던데.”
원기는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의 강함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진보였지만, 넘어야 할 문제도 생긴 것이었다.
그녀가 리디아에게 맡긴 트레이닝 메뉴대로 충실하게 몸을 관리한 덕분에, 몸 상태는 굉장히 좋았다. 어깨가 살짝 뻐근한 것을 제외하면.
물론 위생상태도 좋아서, 피부는 매끈하고 깨끗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만에 제대로 된 샤워가 하고 싶었다. 몸은 샤워를 해왔지만, 영혼은 샤워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샤워가 정신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도장을 빠져나가면서, 역시 탈의실로 향하는 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재된 뭔가가 아직 더 있다는 느낌이야. 곧 껍질을 벗을 것 같은데...내게 없는 무언가가 더 있어.’
희연은 오한이 든 것처럼 살짝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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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는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서 반 친구인 호철과 찬균에게 이끌려 용산으로 향했다. 게임과 전자제품, 그리고 피규어를 비롯해 취미 관련 물건을 구하는 데에는 여전히 용산이 인기라고 할 수 있었다.
성인들은 용팔이라고 불리우는 집요한 악덕 상인들만 조심하면 되지만, 학생들은 쉬운 용돈벌이를 노리는 불량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부모님 눈을 피해 인터넷으로 취미관련 물건을 사들이는게 쉽지않은 학생들은 현금을 들고 물건을 사러 오는데다가 겁을 주면 쉽게 돈을 내놓기 때문이었다.
겁만 좀 주면, 신고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원기 일행은 제법 덩치큰 양아치 세명과 마주하게 되었다.
“야, 그냥 돈만 주고 가면 되니까, 알아서 내놔. 털어서 나오면 국물도 없다.”
물론 호철과 찬균은 저항할 생각은 별로 없어서, 순순히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원기도 역시 사고를 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상대방이 강해 보인 것은 아니지만,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양아치들이 돈으로 만족을 못한 것이었다. 카메라와 노트북까지 빼앗으려고 하자, 찬균이 저항했고, 그것에 분노한 양아치가 찬균의 안면에 주먹을 휘둘렀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양아치의 주먹은 원기의 손에 잡혔다.
“이 새끼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양아치가 원기에게 발길질을 날리려고 든 순간, 원기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손에 잡힌 주먹의 한 곳을 엄지로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지옥에서 들려올 듯한 절규 소리가 귀가 터질 정도로 울려 퍼졌다. 마치 돼지의 목을 따는 소리, 아니 돼지를 꼬집어 죽이더라도 듣기 힘들 정도의 절규였다.
그 소리에 호철과 찬균은 물론이고, 양아치들도 기겁을 하며 놀랐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원기일지도 몰랐다.
원기에게 손을 잡혔던 양아치는 입에 거품을 물고 하얀 눈동자를 드러낸채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야, 이거 죽은 거 아냐?”
“어, 어떻게 하냐?”
“이,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한거야!”
하도 큰 비명소리가 울려퍼진 터라, 구경꾼들이 골목길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기 일행은 양아치들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피했다. 양아치들 역시 원기를 경계한 탓인지, 기절한 동료를 끌고 도망쳤다.
“야, 너 진짜 어떻게 한거냐?”
“별 건 아닌데...”
원기는 자신이 한 짓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양아치에게 한 것 처럼,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 등 한 곳을 누르자, 제법 통증이 느껴졌다.
“여길 누르면 좀 아프거든. 그래서 거길 눌렀지. 이런 식으로.”
“아야야야. 너 미쳤냐? 사람 잡으려고 그래?”
호철이 원기의 손을 황급히 뿌리쳤다. 원기는 아주 살짝 누른 것에 진심으로 아파하는 호철을 보면서, 자신이 가볍게 생각한 통증이 엄청나게 큰 통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무기가 될 수 있겠다.’
원기는 자신이 통증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통증에 대한 내성이 자신의 장점이라는 사실을 수한에게 듣고, 그것을 최대한 살려 온 것이다.
뜨거운 냄비나 그릇을 요리사나 주부들이 별로 뜨겁지 않은 것처럼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익숙함 때문이었다. 뜨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닌 그런 자극이 되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공격을 당하면서, 아픔에 대해서 몸으로 터득했다.
내장은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그곳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없다. 그래서 간암 같은 병은 소리없이 커져서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다.
통증은 몸의 데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게 꼭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별 것 아닌데, 엄청나게 아픈 경우도 있고 치명상이지만 별로 아프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통증은 그 자체만으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그 비명을 지르고 까무러친 녀석은 두번 다시 원기와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을터였다.
이미 많은 이들과 생사의 혈투를 벌였고, 많은 이들을 죽였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야 상대가 죽는지를 알기 때문에, 어느정도까지 상대가 죽지않고 버티는지도 알 수 있었다.
‘고통, 이게 내 힘이 되어줄 수 있겠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해도 쉽지 않다. 죽은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가족이 있고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피치못할 상황에서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를 상처없이 제압할 수 있다면, 조금은 부담이 덜하게 싸워나갈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페인 마스터리? 페인 마스터?’
원기는 고통을 적이 아니라, 유용한 도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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