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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46화 (46/497)

46화

“이 등신같은 새끼야. 고삐리한테 당해서 도망을 와?”

양아치들의 두목, 신근호는 이를 갈았다. 그는 조직폭력배들과 친분이 있는, 이미 반쯤은 조폭이나 다름없는 거리의 보스였다.

그가 조폭 사무실에서 배운 것 하나는, 조폭은 폭력이 아니라 공포로 먹고 산다는 사실이었다. 폭력은 공포를 위한 도구로 최소한으로 그리고 최대한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고삐리한테 당해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쳐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말 그대로 장사는 접어야 했다.

명성이 공포가 된다. 그리고 공포가 또다른 공포를 낳는다.

조폭의 자본은 공포였다. 그리고 그 자본을 날려먹으면, 다시 명성을 얻기 위해 폭력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폭력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야. 애들 모아. 그새끼들 한번 밟아줘야겠다. 이 새끼 쓰러뜨린 호신술 도련님이 누구라고?”

그는 비명을 질렀던 양아치를 한쪽 발로 밟은채 말했다.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아서 그의 발 아래서 꿈틀대고 있었다.

“여기, 그녀석들 지갑이 있습니다. 제일 위에 것이 놈의 지갑입니다.”

“박원기라. 그놈들 돌아가기 전에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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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용산인가요? 특이하네요. 왜 하녀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거지요?”

리디아는 신기한 듯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할까. 세상을 바꾼 스마트폰, 태블릿PC와 노트북, 혹은 미니 데스크탑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기존의 전자상가 용산은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전자 양판점, 게임 가게, 피규어등의 매니아 상품을 파는 가게들로 변해 있었다. 아키하바라에서 유행하던 메이드 찻집이나 코스프레 찻집 등이 컴퓨터 부품 도매상가들을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오덕이라고 하지.”

내심 곱하기 2를 하고 싶지만, 상스럽게 여겨질까봐 한희연은 오덕이라는 표현에서 자재했다.

“원기 오빠는 이런 거랑은 거리가 먼데. 친구들이랑 어울리려고 무리하는 건가?”

밝고 긍정적인, 때론 생각이 없는 연하가 혼잣말을 하자, 희연이 코웃음을 쳤다. 성실함과 결벽증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희연에게 원기의 유희는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흥. 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야. 내가 보기엔 원기 오빠도 오덕임에 틀림없어. 엘프하고 로맨스 해보겠다고 여신님한테 요구해서 시녀로 리디아를 불러들인 것도 그렇고, 소녀들로만 파티를 짠 것도 그렇고 말이지.”

“예? 엘프하고 로맨스요?”

리디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엘프들과 인간들은 삶의 방식이 너무 달라서,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 판타지 오덕들의 꿈이야. 엘프 여친을 거느리는거. 저런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희연이 가리킨 곳에는 인간 전사가 노출심한 엘프 여전사를 끌어안고 있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미소녀 마법사와 미소녀 사제의 모습이 약간 작게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가요? 원기님이 절?”

리디아가 얼굴을 붉혔다.

“정말? 원기오빠가 날 좋아해서 계약자로 넣은거야?”

연하의 표정도 왠지 밝아졌다. 한희연은 그 순간, 앗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아니. 원기 오빠가 그럴리가 없지. 리디아를 여신님이 그런 식으로 보냈을리가 있겠어? 이쪽 세상을 보고 배우라고 보낸거지. 정말 그런 오덕이었으면, 리디아를 그냥 뒀겠어? 그리고 계약자들도 그래. 조제성 아저씨나 장수한 선생님을 생각해. 남자 둘, 여자 둘이야. 우리는 전투에 재능이라도 있지. 원기 오빠가 그 두사람하고 연애할려고 집어 넣었겠니? 나쁜건 다 친구들이야.”

한희연이 그렇게 얼버무릴 때, 갑자기 일단의 사람들이 원기 일행에 접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지요?”

리디아는 뒷 쪽에 살짝 눈길을 줬다. 조제성이 붙여 준 보디가드들이 두 사람 자리잡고 있었다.

“잠깐 상황을 보자. 섵불리 개입하는 것도 좀 곤란하니.”

희연은 쓰레기통 옆에 놓인 PVC 파이프를 살짝 눈여겨 봐뒀다. 좀 불결하고 약해 보이긴 하지만, 맨몸의 상대를 제압하기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보디가드도 PVC 파이프도 그다지 현명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가장 일반적인 대응, 경찰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었다.

보디가드든 호신술이든,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용도로만 쓰는게 가장 적절한 대처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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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남은 돈 있냐?”

“없는데. 지갑 못챙겨 왔어.”

“나도.”

“차비 어쩌냐?”

“걸어가야 하나? 핸드폰은 있지?”

“누구한테 전화하냐? 난 부모님한테 전화하긴 좀 그런데.”

“나도 그래. 원기야. 넌 형이나 누나 없냐? 동생이라도.”

호철의 질문에 원기는 살짝 생각에 잠겼다. 용산에서 돈뺐겼다는 것 정도는 자신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는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누구를 부를 것인가가 문제였다.

‘일단 시녀니까, 리디아를 부르는게 좋을려나? 음, 부담은 없지만 길이나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조제성 사장님이 안좋아 할려나. 수한이형은 휴일이라고 미드가르드에서 엘레니아랑 노닥거릴테니, 전화를 안받을테고. 희연이가 어떨까? 아냐. 이런데로 불러내면 틀림없이 한 소리 들을 것같아. 연하? 걔도 틀렸어. 희연이한테 불어버릴테고. 역시 누나 밖에 없나?’

친누나인 승희를 떠올리니, 역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일단 보호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 와서 깡패한테 돈뺏기고 다닌다고 알면, 걱정이 더 심해질 것 같았다.

원기는 한숨을 쉰 다음, 핸드폰에서 희연의 이름을 골랐다. 한심하다는 조금은 매섭고 차가운 시선을 감수해야겠지만, 그래도 가장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 원기야.”

찬균이 원기의 옆구리를 쳤다. 그리고 원기는 자신과 일행들이 험상굳은 사람들에게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기 일행은 조금씩 몰려서 어두운 골목으로 이끌렸고, 깡패들은 길 양쪽을 막고 사람들의 통행을 차단했다.

‘어떻게 하지?’

원기는 핸드폰으로 경찰을 부를까 생각했지만, 안테나 표식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을 들어 보니, 얍삽하게 생긴 사내가 손에 무전기 같은 것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휴대용 휴대폰 교란기였다. 학교나 영화관 등 공공장소에서 사용되는 그런 물건이었다. 범죄자들이 악용하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터넷 등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물며 용산 뒷골목이라면, 널린 물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살기어린 눈빛을 한 두목 신근호가 앞으로 나섰다.

“아까, 우리 친구들이 너희에게 실례를 한 모양이더군.”

그리고 그의 눈이 원기와 마주쳤다. 원기는 일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아예 벼르고 나선 듯, 숫자는 가볍게 스무명을 넘기는 듯 했다. 양쪽 길을 향해서는 큼직한 라디오카세트기계를 틀고있는 놈들도 있었다. 안에서 나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할 생각인 듯 싶었다.

운동을 좀 했다지만, 평범한 신장에 평범한 육체, 그다지 좋지 않은 운동신경으로 몇 명이나 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놈만 잡는다는 발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정말 위험하군. 죽여야 하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곤란하지. 죽지만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면 어떨지 모르지.’

원기는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 신근호를 주시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상황은 최악으로 흐를 수 있었다.

그냥 두들겨 맞는게 싸게 먹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를 건드린 등신같은 놈은, 내가 반 죽여놨다. 미안하게 되었다. 여기 너희들 지갑을 가져왔으니, 쇼핑이나 즐기고 가도록 해라. 적어도 이 근처에서 너희를 건드릴 놈들은 없을 거다.”

신근호는 빙긋 미소지으며, 원기 일행에게 지갑을 건내줬다. 그리고는 찬균과 호철의 어깨를 친근한 듯 툭툭 치고는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원기는 황당함과 허탈함의 이중주를 맛보며, 떠나가는 깡패들을 바라보았다. 깡패들도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고, 깡패 두목인 신근호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야, 혹시 너네 아는 사람이냐?”

원기가 물었지만, 찬균과 호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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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입니까? 형님?”

“몰라. 그냥 모르는게 나아. 따라오기나 해. 젠장.”

신근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에,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아동학대로 푸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이라고 할까, 사람들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위험을 파악하는 재주를 얻었다.

그리고 몸성하게 두목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아, 진짜 쪽팔리네. 아까 내가 말하던거 어색하지 않더나?”

“좀 어색하긴 하던데요.”

신근호는 원기의 눈빛을 본 순간, 원기가 사람을 죽여봤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 눈빛은 조직 사무실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던, 해결사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제거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그는 눈빛만 봐도 상대가 대략 몇명을 죽여봤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조폭은 살인과는 인연이 없다.

그리고 살인에 손을 담근 사람들은, 죽인 사람들이 양손가락을 넘기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스무명을 넘기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원기라는 고삐리의 눈에서는 그 이상을 보았다.

‘대체 무슨 놈이길래, 고삐리가 수백명을 죽이고 뉴스에도 안나온 거지?’

그는 똘마니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길가에 서있는 예쁜 아가씨들을 보았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소녀는 말 그대로 ‘엘프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소녀도 엘프녀에 조금도 꿀리지 않는 미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빛을 본 순간, 신근호는 가슴이 섬뜩해 옴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이 맛이 간건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들을 멀찌감치 피해가는 것을 택했다. 그는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에서도 장수할 재능이 충만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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