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사농공상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회제도를 정비하던 중 조제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회의 좌석에는 조제성과 원기, 장수한과 트리아 여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유교의 신분제도 아닌가요?”
원기는 조금은 찝찝한 투로 말했다. 사농공상, 선비가 제일이고 상인을 천시하는 것으로 유명한 유교의 신분제였다. 이로 인해서 문화, 문명 모두가 서양을 압도하던 동양이 뒤처지게 되었다고 많이들 알고 있었다.
“신분제도로 알려져있습니다만, 그 의미는 좀 다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쟁이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바꿨듯이, 공자의 가르침도 변함은 없지요. 실질적으로는 나라를 세우는 순서, 혹은 우선순위에 가깝습니다. 선비 사를 빼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농은 1차 산업, 공은 2차 산업, 상은 3차 산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선비 사라고 합니다만, 사라는 한자는 무사와 문사를 모두 합한 것입니다. 무사는 치안, 문사는 법과 교육을 의미한다고 저는 봅니다.”
“신분제도가 아니라, 우선순위라고요?”
“그렇지요. 열심히 일하려면, 치안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선 공권력, 즉 국가의 무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힘만으로는 안되지요. 올바른 법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법과 그것을 지키는 이들을 보호하는 강제력이 있으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반면, 열심히 일해서 쥐꼬리만큼 받는 사람들이 무거운 세금에 짓눌리고, 가진 자들은 눈꼽만큼도 세금을 안내고, 법을 어겨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민중은 노동자의 길을 버리고, 도적의 길을 걷게 되겠지요. 올바른 법이라는 이상과, 그것을 실현할 현실적 힘이 갖춰져야만 나라가 바로 섭니다. 그리고 올바른 법을 알고 지킬 수 있도록 국민들을 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치안과 교육, 이 두가지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지요. 그 다음은 농, 곧 의식주를 채우기 위한 기본 산업입니다. 그리고 의식주를 이룬 다음에 추구할 것이 공, 경제와 문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후에 상으로 넘어갑니다. 금융, 유통과 문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제성은 그렇게 원기에게 말하면서, 장수한을 살짝 흘겨보았다. 원기는 비로소 조제성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았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인식한 장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칼챠! 문화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해선 안됩니다. 문화야말로, 호감을 끌어내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며, 쉽게 그들의 의식을 바꿔줄 강력한 무기입니다. 따라서, 제 문화 확산 프로젝트는 결코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엘프는 무기가 아니라, 우상이 되어야 합니다!”
장수한은 열변을 토했지만, 조제성은 코웃음을 쳤고, 원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제성과 장수한이 충돌하게 된 것은, 엘프의 숫자가 충분치 못하다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인적 자원을 장수한이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빼돌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바로 걸그룹과 소년 그룹의 결성이었다.
미녀시대를 베껴서 만든 엘프시대를 비롯해서, 온갖 짝퉁 연예인 그룹을 만들고, 표절곡이라기보다는 무단 해적 번안곡들을 보급했다. 저작권 협약을 맺은 적 없으니 범죄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짧은 스커트에 색정적인 춤과 노래를 처음 접한 엘프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장수한의 비장 스킬, 엘프사랑과 프레이야 여신이 좋아할 거라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걸 그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수한이 원기로 하여금 프레이야 여신으로 나타나서 그들의 춤과 노래를 감상시켰다.
멋모른 원기, 아니 프레이야 여신은 원본을 넘어서는 역량을 보여주는 카피판들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며 찬사를 보냈다. 결국 내심 망칙하다고 여기며 반신반의하던 엘프들은 장수한이 만드는 카피그룹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너무 제 멋대로입니다. 엘프들은 지금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투입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만족을 위해서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조제성의 말에 장수한은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요. 제 프로젝트가 효과가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쓰여진다고 하셨는데, 제성형님의 개혁도 제가 보기엔 제성형님의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제가 엘프의 절반을 끌어다 쓴 것도 아니고, 고작 5%도 안되는 인원입니다. 효과는 절대적이고 말이지요.”
장수한의 항변에 트리아 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원기도 내심 동의하고 있었다. 실제로 걸그룹과 미소년(미소녀처럼 보이지만) 그룹들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은 적지 않았다.
문명 보급의 악영향을 고려해, 전기 관련 기술은 일체 제공을 금지해 둔 탓에 전자 악기는 도입하지 못했지만, 기타,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들을 보급했고, 소리에 민감하고 섬세한 엘프들은 곧 악기들을 뛰어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했지만, 미드가르드의 야만인들에게는 역시 최신 음악이 더 잘 먹혀들어갔다. 본능과 욕정에 호소하는 힘이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야 할 터였다.
굴베이그 왕국령을 다니면서 엘프 그룹들이 공연을 펼쳤고, 문제도 적지않게 발생했지만 문화 침략은 꽤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엘프들에 대해 호의와 동경을 갖게된 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반면 조제성의 개혁은 꽤 급진적이면서도 조금은 파쇼적인 부분이 없지 않았다.
개량형의 통일 정도는 애교라고 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의 도입과 병행해서 한글을 도입시켰다.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 현대의 체계를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세계에는 성씨의 개념이 희박했다. 귀족들이 성씨를 가지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의 이름이었다. 뮤젤 영지를 다스리는 뮤젤 자작이 로엔그람 영지로 이사가면 로엔그람 백작이 되는 것처럼, 혈통을 증명한다기보다는 직업, 혹은 주소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제성은 주민등록제를 도입하면서, 변치않는 성씨를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갖도록 만들었다. 트리아 황가는 프레이야라는 성씨를 받았고, 굴베이그 왕가는 굴베이그라는 성씨를 받았다.
그 외에는 조제성과 장수한이 영화나 기타 미디어에서 본 미국, 혹은 유럽 성씨를 늘어놓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해 놓았다.
덕분에, 잭슨, 스미스, 드니로, 호프맨, 해스턴 등등의 성씨가 대폭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식량 분배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각지에 식량을 분배하면서, 식량을 가지러오는 사람들에게 신상 정보 제공을 요구한 것이었다.
처음에 실시한 무제한의 식량 분배는 곧 부작용이 나타났다. 식량이 무제한으로 제공된다지만, 한 번에 분배되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호송하는 엘프들과 마차 수 등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빨리 많은 가족들을 데려와서 퍼가는 사람들 때문에 못받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불만이 고조되어가는 시점에서 조제성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주민등록제였다.
“외지인들이 옆 동네에 배달된 식량까지 챙겨간다며?”
“아, 나도 본 적 있어. 빌어먹을 놈. 왜 여기까지 와서.”
실제로 먼 지역에서 와서 퍼가는 이들도 있지만, 깊은 산속에 살아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조제성이 막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들 몫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주민등록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식량을 배분받기 위해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신상을 조사하고, 등록하는 업무까지 해야 하다보니, 그것을 행할 엘프들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제성의 목표인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 제도까지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엘프들을 교육하고, 교육받은 엘프들이 인간들을 교육시키고, 교육받은 인간들이 인간들을 교육하는 그런 단계까지 나아가려면 앞날이 까마득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엘프나 드워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저스펙의 잉여 생물이다. 하지만 교육받은 인간은 완전히 별격의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삶에의 적응력은 엘프나 드워프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호주에서 일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엘프나 드워프들을 데리고 만들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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