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블러드 라인의 진화는 조제성의 예측을 확실하게 넘어섰다.
아직 기술은 가상 현실을 완벽하게 지원하지는 못했다. 가상 현실이라곤 하지만, 꿈에 간섭해서 그래픽과 소리, 그리고 몇가지 감각을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새로 나오는 게임들은 좀더 세분화된, 생생한 감각을 제공한다는 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사람들이 꿈꾸던 매트릭스 같은 가상 현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전투 프로그램을 손본 것은, 유저 캐릭터의 움직임에도 변화를 주었다. 몬스터만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캐릭터도 전투 프로그램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좀 더 사람들이 생각하는데로의 움직임에 가깝게 움직여주게 되었다. 전엔 공격이라면, 종베기나 횡베기였다면, 이제는 정확하게 노리는데로의 움직임을 해주게 된 것이다.
생각으로 원격 조종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캐릭터가 반응을 해주는 폭이 넓어지면서, 현실에서의 몸을 움직이듯 게임에서도 움직여 주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블러드 라인은 기존의 RPG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소위 다굴형 대전게임이라는 감각이 된 것이다.
거대 보스몹을 상대로 협공하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제대로 된 협공인가 하면, 그렇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위치에서 거대한 몹을 두들겨 패기만 하는 것이다. 힐러는 체력빠진 동료들 찾아 힐주기만 하고, 각자 적당히 자리잡고 알아서 칼질하는게 보통 게임의 협공이었다.
하지만, 블러드 라인의 협공은 달랐다.
예를 들면, 닭을 상대로 세명의 유저가 협공하는 것이 될 터였다. 덩치가 작은 닭은 상대로, 몽둥이를 휘두르다 보면 정작 닭은 안맞고 동료의 몽둥이나 머리통을 두들기기 쉬웠다.
몬스터들의 인공지능은 상당히 고도의 것으로 플레이어 캐릭터를 방패나 장애물로 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결국 서로가 호흡을 맞춰서, 움직임을 맞추지 않으면 제대로 된 협공이 되지 않았다.
한 명이 앞서 공격을 하면, 그것을 피하는 닭의 움직임과 호흡을 노려서 다른 유저가 공격을 하는 식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AI와 싸우는 것보다 PC, 곧 유저와 싸우는 것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AI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패턴을 익히면, 곧 지루해진다. 사람을 상대로 할 때 성취감도 느껴지고, 흥미도 느껴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블러드 라인의 AI는 인간보다 더 뛰어나고 패턴이 다양했다. 당연히 성취감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새롭게 게임을 시작한 이들은 레벨 10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개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도 사망 페널티가 없어서, 차근차근 올라갈 수는 있었다.
문제는 레벨 11의 벽이었다. 죽을 때마다 경험치가 깎이고, 사냥해서 얻는 경험치는 쥐꼬리였다.
그래서, 레벨 11에 이른 캐릭터를 사람들은 ‘블러드 라인 1단’이라고 불렀다.
만렙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은, 사냥 나가면 죽어 돌아오느라 아이템 드롭, 레벨 다운의 쌍 크리를 얻어맞고 레벨이 죽죽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새 캐릭을 만들어서 게임에 적응해 나가는 것을 택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예 고레벨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게임을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렙에서는 적 몬스터가 스킬이나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사용되는 스킬과 마법은 왠만한 유저들이 감히 넘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다만, 작은 몹 하나를 상대로도 호흡을 맞춰서 동료들과 싸우는 재미는 범상치 않았다. 결국 블러드 라인은 레벨업과 스킬 획득보다는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서 적을 해치우는 일종의 다대 다 대전게임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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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새꺄, 빵좀 사와라.”
“싫어. 니돈으로 니가 사먹어.”
“에? 이새끼가? 정신 나갔나?”
반항하는 왜소한 소년의 말에 덩치 큰 녀석이 주먹을 보이며 다가갔다. 그 순간, 왜소한 소년이 그의 정갱이를 후렸다.
“아쭈.”
덩치큰 소년은 가볍게 소년의 발차기를 피했다. 어디서 격투기 만화라도 본건가 생각하며 비웃으려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그의 뒷통수에 충격이 오면서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뭐야”
그가 돌아보자, 왜소한 소년의 친구 빼빼 녀석이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그의 옆구리에 주먹이 꽂쳤다.
“이 썅놈의 스키들이!”
그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이번엔 빼빼의 발이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중심을 잃자, 이번엔 왜소한 소년의 손 바닥이 그의 턱을 후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리고 그 쓰러지는 순간에도 두 소년의 손과 발이 그의 몸을 연타했다.
“시발. 고마해라..”
곧 덩치큰 소년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별거 아니잖아? 역시 1렙 거지 꼬맹이가 더 힘들었어.”
“확실히 블러드 라인 1단 딴 보람이 있는데?”
블러드 라인의 열풍과 함께 하극상의 바람이 불었다.
격투기를 익히고 등빨 좋은 독불장군들이 비리비리한 놈들의 다구리에 맥을 못추고 거꾸러지는 경우가 생긴 것이었다.
블러드 라인 1단이 되면, 협공으로 두배는 쎈 놈을 잡고, 21렙을 넘어서 2단이 되면 블러드 라인 안하는 놈들은 떼로 잡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그리고 그 효용성을 확실히 증명해 준 것이 바로 경찰들이었다.
범죄자 한명을 상대로 다구리를 놓는게 기본적인 경찰의 전법이었다. 다치지 않게 흉기를 가진 범인이나 주정뱅이를 제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심심풀이로 블러드 라인에서 놀던 경관들이 팀을 짜서 조폭을 비롯한 폭력범을 가볍게 제압하는 일이 연발하면서, 아예 경찰들 훈련 커리큘럼에 블러드 라인을 집어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제성이 노리던 것 가운데 하나였다.
경찰은 국가에서 키워낸 아주 쓸모있는 인재였다. 그리고 일 자체가 험해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없지 않았다.
문제는 부패한 경찰을 끌어들이는 것이 될 터였다. 그리고 부패하지 않았다치더라도, 너무 융통성 없는 경우도 곤란했다.
미드가르드에서 적응하기 위해선, 융통성과 인망, 정의감을 고루 갖춘 경찰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는데 신근호가 도움이 되었다.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밑바닥 인생들이 경찰을 도리어 더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조제성은 몇명의 경찰 후보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제성은 블러드 라인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었지만, 공짜로 게임을 제공할 생각도 없어서 사용 요금은 확실히 받았다. 대신 캐쉬템은 일체 없었다. 요금만 내면 모두가 평등하게 게임할 수 있게 해놓았다. 그리고 다들 저렙에서 놀다보니, 현질은 설 자리가 없었다.
망치든 몽둥이든 신검이든 한방만 잘 맞추면 죽으니 굳이 좋은 템을 갖출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현실세계의 격투기 매니아나 근접 전투 매니아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맨몸으로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느낌을 추구한 탓이었다.
이런 이들에겐 꼭 다굴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희연이나 원기만 해도 솔로 플레이로 충분히 고렙 몹과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희연의 경우엔 세밀한 동작을 전투 프로그램이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
전투 프로그램의 역량은, 희연보다는 못하고 원기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너보다 내가 센 것 같은데?”
“인공지능이 딱 네 수준이라서 그래.”
“이거 새 몬스터 테이밍은 못하고, 레벨만 떨어질 것 같아요.”
연하가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바람을 읽는 능력 같은 것은 이 게임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파이어 볼 마법을 날리면, 돌을 던져서 중간에서 폭발시키는 몹들이 넘쳐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탈것과 합체하는 능력만 보고 테이밍 몹을 선택했지만, 인공지능이 좋아진만큼, 전투를 중심으로 하는 몹을 테이밍할 필요가 있었다.
“이젠 버스 태워주는게 의미가 없어졌네.”
희연이 쓴 웃음을 지었다.
“뭐, 엘프 사랑에 불타는 수한이형은 다르지.”
원기 역시 피식 웃었다. 본래 현세 문물을 본 리디아가 미드가르드에 돌아가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한명의 인재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기는 누나 승희에게 자신이 여신의 계약자라고 밝히고, 그녀를 끌어들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라도 더 끌어들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누나와 리디아에게 블러드 라인을 시작하게 했다. 만렙을 찍는 것은 어렵지만, 소위 블러드 라인 1단만 되어도 전투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 못찾고 헤매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거 60명의 엘프 소녀들을 지구로 끌어들여서, 국제학교의 한 학급에 편성했다. 교육시킬 교사나 제반 여건을 갖추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서 미드가르드에 종교혁명이나 산업혁명이 일어날 위험성이 높아지겠지만, 당장 몇십년엔 무리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60명의 엘프 게이머들이 투입되면, 전력적으로 급상승한다고 보기엔 어렵겠지만 적어도 죽을 염려 없이 굴릴 수 있는 전력이 만들어 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리디아는 오랜만에 미드가르드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해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구에서 가져간 선물들은 유치하게 보일 정도로 원색이 선명한 플라스틱 바가지들과 보온병이었다.
가볍고 잘 안깨지고 위생적인 플라스틱 바가지는 그녀가 생각하기에 엄청나게 가치있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마법 없이, 따뜻한 차를 오래 보존하는 보온병은 그녀가 꽤 마음에 들어하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플라스틱 바가지와 보온병들은 엘프 고위귀족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리고 리디아의 미용실은 엘레니아가 맡게 되었다. 사실 엘프들을 대폭적으로 받아들인 데는 장수한의 강력한 주장이 한몫을 했다. 여친인 엘레니아에게 지구를 보여주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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