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엘프들을 이끌고 가는 여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성의 역할 부담 때문일지는 몰라도, 엘프 여성들은 여성스럽지 않았다. 엘프 여성들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존재인 것이었다.
따라서, 수동적이거나 의존적인 면이 없었다. 신데렐라와 왕자님 중, 왕자의 역할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것이 엘프 여성들이었다. 사실 미소녀 수준에서 성장이 멈추는 엘프 남성들한테 무얼 의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었다.
엘프들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었다. 실제로 엘프의 몸이 되어 보니, 역한 냄새때문에 고기를 먹기 힘들었다.
다만, 지구에서 살아본 엘프들이 푹 빠진 음식이 있었다. 바로 카레였다. 다양한 식물성 향신료를 배합한 카레는 엘프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고기에서 나는 노린내를 완전히 잡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카레 재료로 들어간 고기를 별 거부감없이 먹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소화가 잘되는 고기에 맛들인 것이었다.
덕분에 매번 저녁식사는 카레였다.
64명에 말이 70마리에 달하는 대규모 이동을 할 경우엔 흔히 판타지 소설에서 보듯이 여관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작은 마을에는 작은 주점, 옛날 사극에서 보는 주막 수준의 주점이 있을 뿐이었다. 지나가던 여행객 두세 명이 고작 묵을 만한 곳이다.
그리고 숫자가 많으면, 노숙의 위험성은 크지 않았다. 마을 안에 있으나, 마을 밖에 있으나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되기 때문이다. 60명이 넘는 대규모 수송대를 노릴만한 몬스터라면, 작은 마을 정도는 오히려 쉽게 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행 중 식사 준비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침 식사는 보통 저녁에 먹고 남은 카레와 빵, 그리고 간단한 스프를 먹었다. 그리고 점심은 가능하면 마을에 들려서 빵과 야채 등의 식재 구입을 하면서 마을에서 먹었고 저녁은 야영지를 정비하면서 카레를 해먹었다.
가지고 있는 식재료는 소금과 쌀, 그리고 대량의 카레가루(루라고 부른다.)였다. 멧돼지, 꿩, 토끼 등(야생 동물이나 맹수는 지구와 완전히 똑같다. 식물도 당연한 것이겠지만)은 지나면서 엘프들이 족족 사냥했다.
과도한 보호 본능은 상당한 공격성이 된다. 그런 면에서 엘프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대단히 공격적이고 위험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물론 건드리지만 않으면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현대인들에 비하면 대단히 죽음에 익숙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엘프들은 숲을 침범한 인간을 죽이고, 그 죽은 시체를 오우거들에게 던져주곤 했다.
오우거들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숲이 안전해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운나쁜 엘프들은 오우거들에게 잡아먹히지만, 그건 이를테면 현대 사회의 교통사고 같은 것이다. 교통사고 없애자고 차를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엘프들이 죽으면, 마찬가지로 엘프의 시신들도 오우거들에게 던져 주었다. 무덤에 시신을 묻어 봤자, 썩어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프들에겐 역사는 있어도, 묘지는 없었다.
그리고 오우거들도 어느정도의 지능은 있기 때문에, 운 나쁘게 바로 코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엘프가 아니라면, 굳이 엘프를 노려서 잡아먹으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엘프들이 사는 숲에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맹수였다.
늑대나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는 엘프들이 족족 죽여 버렸다. 이유는 하나, 오우거들나 몬스터들이 먹을 먹이를 가로채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맹수와 몬스터의 차이는 인간들이 대규모로 침입했을 때, 피하느냐와 싸우느냐의 차이에 있었다. 오우거가 인간들과 맞서서 날뛸 때, 엘프들은 숲에 숨어서 화살만 날려주는 것만으로도 인간들을 퇴치할 수 있었다.
이슬만 먹고 사는 그런 무력한 존재는 인간 사회보다 훨씬 더 살벌한 숲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행의 특징 중 하나는 중간에 휴식이 많다는 것이었다. 말을 타는 것도 피곤하지만, 말들에게도 휴식은 필요했다.
그때문에 오후 4시경이 되면 그날의 여정은 끝나고 야영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야영지가 확보되면, 모의전을 실시했다.
게임 속의 전투와 미드가르드의 전투에는 차이가 있는만큼 그 갭을 매우기 위한 것이었다.
모의전은 각 부대별로 공격대를 만들어서 벌이는 모의 길드듀얼 방식을 사용했다. 다만 이 경우에 죽어도 페널티 없이 즉시 되살아 나지만, 게임상 장비와 캐릭터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군복은 벗어야만 했다. 그리고 부서지는 총이나 소모되는 총알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군복을 벗는다고 해서 알몸이 되지는 않았다. 군복 안에는 여성용 갑옷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용 갑옷 아이템은 노출도가 높을수록 방어력이 높아진다는 속설처럼, 노출도가 높은 아이템들이 가끔 있었다.
그리고 갑옷 위에 군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선 속옷처럼 생긴 갑옷이 아니면 안되었다. 그나마 원피스 수영복처럼 생긴 갑옷이 있어서, 그것으로 통일한게 약간의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보기 좋다면, 좋지만 말이지.”
원기는 한숨을 쉬었다. 모의전은 각 부대별로도 했지만, 대 에인페리아전을 상정하고 벌이기도 했다. 그 경우 에인페리아들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원기, 희연, 연하의 삼총사였다.
리디아는 4번대(정식 명칭은 근위 총사대)의 대장이긴 했지만, 레벨도 낮은데다가 힐러였기 때문에 에인페리아의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다양한 방식의 모의전이 거듭되면서, 왕따 삼총사라고 할지, 낙하산 삼총사들도 엘프들과 차츰차츰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원기가 처한 현 상황이었다.
청일점이라는게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환상적인 시츄에이션이겠지만, 절대 다수의 여자 속에 홀로 존재하는 남자는 위축되기 딱 좋았다.
실제 엘프들은 노출이 심한 복장은 입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숲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굴을 제외한 피부는 거의 노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일상 생활에서.
외부인들을 절대 들이지 않는 마을 안쪽에서는 꽤 홀가분하게 살았다. 마을 가까운 호수에서는 혼욕 같은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남성보다 여성이 체격 조건이나 정신적 성향 등 여러가지 면에서 압도적으로 강하니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인간 삼총사와의 심리적 거리가 줄어들고, 어느정도 친해지자 엘프들은 좀 더 홀가분해졌다.
희연과 리디아가 조금 강하게, 주의를 준 덕분에 아랫쪽 속옷은 확실히 챙겨 입고 있었지만, 반라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엘프들이 많았다.
원기를 의식해서 얼굴을 붉힌다던지, 그런 반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들이 원기를 보는 시각은 비인간 동료를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성적으로 흥분하기는 커녕, 한없이 위축되는 원기가 있었다.
‘이러다가 불능되는 건 아니겠지?’
성적소수자(?)의 왠지모를 서러움을 느끼는 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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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총사들이 고른 몬스터들도 모두 통일되어 있었다. 바로 원기가 처음 택했던 몬스터 리자드 나이트였다.
레벨 10짜리, 멋지지만 허접한 몬스터였다.
물론 패치 이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인공지능이 향상되면서, 가장 업그레이드가 많이 된 몬스터들은 인간형 몬스터들이었다. 늑대인간이나 골렘도 까다로워지긴 했지만, 무기를 들고 싸우는 몬스터의 진화에는 따를 수가 없었다.
맹수의 무서움은 신체적 조건의 우위와 무시무시한 돌파력에 있을 뿐, 무기를 든 인간에 대항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체중 80키로의 호랑이나, 체중 80키로의 곰과 체중 80키로의 방패와 칼을 든 무사를 비교하면 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
투우사가 황소를 가지고 놀 듯이, 4족 보행의 우수성은 그렇게까지 크지는 못한 것이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하고, 무기쓰는 기술도 뛰어나고, 레벨업까지 된 리자드 나이트는 제법 까다로운데다가 시간을 벌어주는 존재로서 쓸모가 있었다.
일거에 튀어나오는 61마리의 리자드 나이트들은 원기가 느끼기에도 무시무시했다.
‘과연 희연이로군.’
원기가 한마리를 해치우는 사이에 희연은 아주 재빨리 3마리의 리자드 나이트의 목을 쳐버렸다. 연하는 재빨리 물러서면서 활로 뒤에서 총을 겨누는 엘프들을 제거해 나갔다.
‘이런, 저녀석 너무 앞서 나갔네.’
희연의 경우 리자드 나이트에 포위당하면 끝이었다. 원기는 대검을 버리고, 양손에 한마리씩 리자드 나이트의 목을 쥐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살상력은 떨어지지만, 공방 일체의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원기가 날뛰기 시작하자, 희연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그녀의 예리한 칼 놀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원기의 옆구리에 단검이 박혔다. 리자드 나이트들의 틈에서 몇몇 엘프가 숨어 접근한 거였다.
공방일체의 무기인 리자드 나이트들은 그 덩치 때문에 원기의 시야를 가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깊이 박혀든 순간, 단검의 스위치를 누르자, 검이 내장 쪽으로 푹 하고 더 파고들면서, 단검 자루를 쥔 엘프가 뒤로 빠져나갔다.
스페스너츠 나이프의 영거리 사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프를 향해 휘두른 리자드 나이트의 몸통이 허공을 가르고 또 다른 쪽에서 단검이 박혔다.
‘기분 더럽다고 해야 하나.’
원기는 갑옷을 떨구며 사망판정을 받고 장내에서 물러났다. 곧 희연도 포위되고, 연하도 엘프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삼총사팀의 패배로 모의전은 끝났다.
부활한 원기는 리자드 나이트들에게 두들겨 맞고 나중에 짓밟혀서 엉망이 된 갑옷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군복처럼 벗어두면 좋겠지만, 원기에겐 맷집과 방어력, 곧 갑옷이 최대의 무기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소환 몬스터 리자드 나이트와 엘프들의 조합은 확실히 뛰어났다. 리자드 나이트들은 아군일 때도 참 든든하지만, 적으로 두면 참 더러운 기분이 되었다.
길죽하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뾰족뾰족하게 튀어나온 머리들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평소엔 짧아보이는 목이, 때때로 쭉 뻗으면서 팔, 어깨, 혹은 머리를 물려고 들었다.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고, 동시에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특히 머리통을 물릴 때의 기분은 수차례 거듭되었다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뜨끈한 입김에선 아무 냄새도 안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정에 충실하게 고기썩는 비린내라도 났다면, 모의전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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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이 틀림없겠지?”
“예.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이들만은.”
“만약 틀리면, 다시 돌아와서 마을을 몰살시켜 버릴 거다. 다시 한번 확인하지. 지나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틀 되었습니다. 금방 쫓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제 목숨을 걸어도 좋습니다.”
“그렇군. 자네 말을 믿지. 이봐. 몽땅 죽여버려!”
“그, 그런. 살려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죽일 거라고 하면 사실을 말하지 않거든. 원망하려거든 너희를 못지켜준 무력한 프레이야를 원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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