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사망하셨습니다.’
티레이의 눈앞에 그렇게 메시지 창이 떴지만, 티레이는 메시지 창을 지우지 않았다.
게임 캐릭터가 된 다음에 훈련을 하다보면, 죽는 경우가 제법 생긴다. 일단 죽으면 느끼던 고통이 모두 정지되기 때문에 치명타를 입어서 죽는 경우엔 고통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그리 크지 않았다.
깜짝 놀라고 나면 어딘가가 시큰 하고 내가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메시지 창을 즉시 지우지 않은 것은 장수한에게 배운 요령이었다. 메시지 창을 지우면, 즉시 시체가 사라지며 영체로 변한다. 그리고 영체가 된 뒤, 쿨타임을 기다려서 안전 지역에서 부활하도록 되어 있었다.
반면 메시지 창을 지우지 않으면 시체도 없어지지 않고, 부활 쿨타임도 지나지 않는다. 대신 시체 상태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장수한은 죽은 상태에서 주변 정보를 모은 다음에 영체로 변해서 움직이도록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시체가 남아있으면, 게임 아바타처럼 부활을 위해 시체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암살자로 보이는 여자 에인페리아로군. 우리와는 닮지도 않았는데, 왜 착각한거지?’
가슴도 크고 머리칼도 붉었다. 엘프로 착각할 외모가 아니었다. 엘프들은 프레이야의 눈물이라고 불리우는 금발이 기본이었다. 백금발, 혹은 은발이라고 불리우는 색이 옅은 이들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암살자답게 여자 에인페리아의 무기는 단검이었다.
그리고 거구의 사내. 원기의 아바타보다 더 크고 거대한 사내였다. 무기는 건틀렛에 달린 거대한 갈고리였다. 마치 동물의 발톱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신을 두꺼운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 녀석이 돌아가지 않으면, 곧 정체를 눈치 채겠지. 그 전에 공격하기로 하지.”
숲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거대한 창을 가진 날렵해보이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수백의 대군이 등장했다.
“으, 빌어먹을 냄새. 정말 최악이로군.”
여자가 코를 쥐며 말했다. 티레이는 나타난 대군의 모습을 보자 창을 가진 사내의 정체를 알수 있었다.
죽음의 군주, 티르의 에인페리아 중 최강이라고 꼽히는 그리날이었다. 그가 가진 창의 이름이 바로 ‘죽음의 군주’였다.
그 능력이 바로 시체를 움직이는 능력이었다. 이 장창에 심장을 찔려죽은 시체는 장창의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의 여신이자 거인족인 헬이 만들어낸 아티팩트였다.
소유자가 죽어도 주인에게 돌아가는 특성을 갖고 있었지만, 아스 신족의 성역에서 에인페리아가 죽음을 당해, 아스신족에게 넘어간 무기였다.
시신은 보통 열흘 정도가 되면 부패해서 못움직이지만, 그때까지는 병력으로 부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시체들 가운데에는 소나 말, 늑대 같은 짐승도 있고 오우거나 트롤 같은 몬스터도 있었다. 다수의 소와 말들이 시체들의 이동 속도를 빠르게 해주고 있었다. 소의 시체에 다닥다닥 올라타거나 붙은 다수의 시체들은 보는 이에게 불쾌감과 불안감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단 세 명의 에인페리아지만, 군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엘프로군. 내 창으로 죽이기로 하지 않았었나?”
“어쩔 수 없어. 내 정체를 눈치챘거든.”
“쯧.”
“뭐야? 불만이야?”
암살자 여자는 거구의 사내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만 둬. 대충 적진 위치는 알 듯 하니, 포위하고 잡아 죽이기로 하지. 격돌의 순간에 맞춰선 넌 엘프 황녀를 처리해라. 난 여보를 해치울테니, 넌 간장을 맡아라.”
그리날의 말에 나머지 두 에인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엘프들의 야영지를 향해 움직이자, 티레이는 메시지 창을 지워서 영체로 변한 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본진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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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군단이라니. 조금 골치 아프게 생겼네.”
“그보다 문제가 적의 암살자 아닐까? 아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등뒤에서 찌르면 그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어.”
“저도 언니랑 같은 의견이에요.”
“흠. 그도 그런가?”
원기도 생각에 잠겼다. 움직이는 시체들은 좀비들과는 달랐다. 좀비처럼 허리가 잘려도 기어다니거나 물리면 물린 사람들도 좀비가 되는 그런 끈질긴 물건은 아니었다.
심장을 관통당했을 뿐, 멀쩡한 시체였다. 목을 베여도 죽고, 큰 충격을 받아도 즉시 죽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 군인이나 전사는 거의 없었다. 마을의 농사꾼이나 사냥꾼이 대부분이었다.
죽은 엘프 수송대의 시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설령 죽음의 창을 이용해서 지배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썩어서 끝났을 터였다.
엘프들이 든 60정의 장총과 ‘길막’을 해줄 리자드 나이트들을 생각하면, 그리 큰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그때, 멀리서 인간 여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하는 재빨리 활을 집어 들었다. 가까이 오기 전에 죽여버리면 섞여들 틈이 없을 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원기는 연하를 제지했다.
“왜? 지금 쏴죽이는게 나을거야.”
“그래봐야 암살자 한 명이야. 일단 안으로 끌어들이는게 나아. 지금 저녀석을 죽이면, 놈들은 우리가 자신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할거야. 그리고 에인페리아라면 화살이 안통할 수도 있어.”
“에? 그럼 쏘지 마요?”
“그래. 적아를 구별할 아주 좋은 방법을 내가 하나 알고 있지.”
원기는 자신있게 말했다. 원기는 접근하는 여자를 경계하는 척 하면서, 상대에게 고함을 치려고 했다.
“누구..?”
누구냐라고 외치려고 했던 원기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연하 역시 자신이 왜 활을 당겼는지 잊어버렸다.
사냥용 배낭을 맨 엘프가 사냥을 갔다가 돌아온 것 뿐이었다.
“지금 우리가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아, 암살자 이야기 중이었어.”
희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그 순간, 원기도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암살자는 엘프들 사이에 섞여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구별해 낼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와, 정말 무서운 능력이네. 멀리서 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겠는데?”
“구별할 방법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물론 있지. 하지만 잠깐 기다려.”
원기는 주의깊게 엘프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숲속에서 묘한 움직임이 보이며 동물들이 이쪽 저쪽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왔군. 모두들 전투 준비한다. 리자드 나이트를 소환하고 2인 1조로 서로 마주 보고 선다!”
원기의 지시가 떨어지자, 엘프들은 일제히 리자드 나이트를 소환했다. 그리고 영문은 잘 모르지만, 서로 한사람씩 붙잡고 마주 보았다.
“자, 즉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뺨을 한대씩 힘껏 때린다. 다치지 않도록 이를 악물어라. 실시!”
원기의 명령이 떨어지자, 엘프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엘프들 사이에 숨어든 암살자도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변장도 아닌데 따귀를 맞는다고 풀릴 이유가 없었다.
“실시!”
원기가 다시한번 외치자, 리디아가 먼저 상대의 따귀를 때렸다. 짝 소리가 나면서 따귀를 때리자, 상대도 따귀를 때렸다. 엘프들이니 황녀라고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차례로 이곳 저곳에서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암살자 역시 따귀를 맞았다. 하지만 특별히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역시, 아무일도 없어. 멍청한 짓거리 하고 있군.’
그녀는 자신의 뺨을 때린 엘프의 뺨을 최대한 비슷한 강도로 때렸다. 너무 힘이 들어가면 들통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인내하면서 때린 것이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리자드 나이트가 포효했다. 갑자기 파티원을 선제 공격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당황했다. 자신이 뺨을 때려서 어그로를 끌어모았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상태로, 자신에게 달려든 리자드 나이트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어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거지? 뭐야? 내가 대체 뭘 잘못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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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날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엘프들에겐 암살자가 엘프로 보이겠지만 그리날에겐 그녀의 모습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몬스터들은 대체 뭐지? 저 몬스터들에겐 그녀의 능력이 안통한 건가?’
조금은 당혹스러운 감을 느꼈다. 인식에 장애를 일으키는 그녀의 능력은 이성이 없는 맹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성이 없는 맹수를 마음대로 풀어놓지는 않을텐데? 쯧.’
그리날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돌격하라!”
그의 지시대로 시체들이 사방에서 엘프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원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좋아. 만렙의 무서움을 보여줄 때가 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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