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배에는 사공이 많은 법이다.
“이봐, 자네가 이대로 죽어 없어지면, 자네 딸은 어떻게 할건가. 자네 복수하겠다고 들고 뛸텐데. 자칫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그리고 그 중에 자네 딸도 포함될 수 있다네. 가능성이 높지.”
조제성의 끈질긴 설득에도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죽어있고, 악마에게 영혼을 사로잡힌 상태라고 마음속으로 결정지은 상태였다.
“나, 참. 답답하네. 좋은게 좋은거 아닌가.”
조제성은 그렇게 말했지만, 로이드에게 통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선 종교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굳이 그쪽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조제성과 사전에 이야기를 마친 주인공, 프레이야 여신이 등장했다.
그녀(?)를 본 순간, 로이드의 눈이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봐. 숨 쉬어. 숨 쉬라고. 뭐, 우리 프레이야님이 예쁘긴 하지.”
실체화된 반 신족이자 동시에 게임상의 여신이기도 한 프레이야의 이중 카리스마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로이드는 자신의 신앙심까지 흔들리는 듯 했다.
그가 생각해오던 신의 강림을 몇배는 뛰어넘는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이드 기사님.”
“주, 죽여 주십시오.”
로이드는 입을 다물려던 의지가 실종된 듯,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왜, 죽으려고 하는 겁니까? 모든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가 아니셨던가요?”
“제게 주신 수명은 끝났습니다.”
“글쎄요. 저를 통해 주신 것인지도 모르지요. 전 인간은 아니지만, 창조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이드는 내심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도저히 한낱 피조물로는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경외감이 그녀에게서 강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진심을 말하고 있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한낱 피조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었다.
‘메타트론님과는 비교도 안되는 카리스마다. 저 분은 위험해.’
로이드는 이를 악물고 그녀에게 흔들리는 자신의 의지를 되찾으려고 했다.
“그대는 창조주를 믿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그렇습니다.”
“그것 치고는 믿음이 약하군요.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제가 그분의 피조물임도 믿어야겠지요. 그리고 절 통해 주어진 여분의 생명도 결국은 그분의 섭리에 의해 당신께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그, 그건..”
로이드가 조금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제성은 내심 성공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적 명제가 아닌 종교적 명제였다.
적절한 상황에 등장시킨 프레이야의 카리스마와 종교적인 접근은 로이드를 설득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대가 믿는 창조주의 뜻이, 우리가 현실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 따님이 일선에서 싸우고 목숨을 잃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네이슨이라는 자가 따님을 이용할 거라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제 2의 순교자로 말이지요.”
제 2의 순교자라는 말에 로이드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말을 하지 않으려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사실 그랬다. 레이나는 아직 이능을 얻지 못했다. 견습 기사라고는 하지만, 로이드와 같이 정보수집조이지 전투조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일선에서 싸우다가, 그녀가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네이슨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전거리였다.
“당신은 우리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절대자이자 창조주의 존재를 믿습니다만,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아직 모르겠군요. 그대가 말하는 분이 아니라고 부정은 못하지만, 긍정도 못하겠습니다.”
그 말에 프레이야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대를 우리 메타트론님과 비슷한 피조물이자, 귀의하지 못한 존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이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반 족의 일원이고, 그와 저의 차이는 개종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뿐입니다.”
“아직 개종하지 않은 것으로 해두지요.”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좋습니다.”
프레이야는 로이드가 협조자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당분간 발키리를 붙여두는게 좋겠지?’
게임 캐릭터의 비밀은 철저히 지켜야 했지만, 그 외의 정보는 그다지 감출 필요는 없었다. 정보는 로이드쪽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럼, 친구. 지금부터 향후의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우선 동영상을 좀 보여주지.”
조제성은 자신이 심문 당하던 상황과 죽고 난 후의 심문실 상황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로이드는 자신이 네이슨에게 죽는 상황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걸 이용해서 네이슨의 음모를 밝히고 자네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만사형통 아닐까?”
로이드는 조제성의 얼굴을 보면서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설마, 그렇게 일이 풀릴 턱이 있겠냐? 그거야 말로 최악의 짓이야. 설마 네이슨에게 한방 먹이는게 목표는 아니겠지?”
“음,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겐 정보가 부족해. 네가 잘 알겠지. 진실의 눈이라는 편리한 능력도 있고. 나한텐 사랑하는 우리 여보랑 연결되는 직속 라인밖에 없으니까.”
“우선 네이슨이야. 녀석의 능력은 불꽃을 지배하는 능력이지. 그가 일으킨 불꽃은 전차 안에 있는 사람을 태워죽일 정도지. 그리고 그건 그가 메타트론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걸 의미해.”
“총애를? 그런 또라이인데?”
“모르지. 그거야. 프레이야님의 총애를 받는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꼭 똑똑하고 현명해야만 총애가 주어지는건가? 프레이야님이 가깝게 여기면 각성하기 쉬워지고 능력이 진화하는건 똑같을텐데.”
로이드의 말에 이능 각성의 원리를 조금은 깨닫게 된 조제성이었다. 원기 역시 최근 인격 오염을 경계해서 프레이야의 기억을 뒤지는 것을 꺼리던 참이라, 한가지를 배운 느낌이었다.
성역 랭크 3의 영향은 제법 많은 이들에게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대다수는 이능을 깨치지 못했다.
부유한 집안의 학생들이다보니,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신근호처럼 학생이 아니고 우연히 휘말린 사람들 가운데 각성한 비율이 더 컸다. 물론 각성한 능력이라는 것이 대부분 자신이 원래 장기로 여기던 능력의 발전형이라, 특별히 이능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원기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제법 쓸모가 있는 능력들을 빠르게 각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로 얻은 찬균과 호철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원기의 호감, 친분, 신뢰 등이 이능을 각성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두려운 것은 메타트론님도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거야. 이 세상에 기적을 드러내고, 그 힘으로 신앙을 세상에 되돌리는 쪽으로 말이지.”
“그럼 네가 경계하는건...”
“동영상을 공개하고 날 죽인걸 보이면 네이슨에게 타격이 가는 건 틀림없어. 영국지부는 물론이고 보수적인 영감들이 가만 두지 않을거야. 특히 로마 교회에서는 ‘신비적’요소를 신앙에서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왔지. 그걸 고려하면 네이슨의 입지는 좁아질거야. 당장은.”
“좋은 것 아닌가?”
“글쎄. 네이슨이 결단을 내리기 쉽게 해주지 않을까? 자신들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힘을 합쳐서 이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해서 프레이야님과 그 추종자들과 싸우려들겠지.”
로이드는 프레이야의 카리스마를 쏘인 탓에, 프레이야에게 존칭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로이드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일터였다.
프레이야 여신이 등장하고, 조제성이 그 엉덩이를 때린다던가 쓰다듬어서 쇼크를 주는게 어떠냐고, 원기가 웃으면서 제안했지만 아무도 동의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리기까지 했다.
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제안했다면, 맞아 죽어도 이상치 않을 분위기가 존재했다. 패주고 싶은데, 팬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안되는 복잡한 기분에 분위기가 절대 영도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둡고 싸늘해졌다.
원기는 프레이야의 존재를 두고는 함부로 농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희연과 연하에게만큼은, 절대 정체를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네이슨을 궁지에 몰아선 안된다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앞뒤 안가리고 날뛰게 두면 정말로 피곤해 질겁니다. 전투 헬기 정도만 가지고 있는게 아닙니다. 메타트론님을 따르는 템플 기사단원은 꽤 많은 곳에 퍼져있습니다. 마흔이 넘은 회원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젊은 자녀를 둔 이들은 기적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좀 됩니다. 미국 동부의 오랜 가문들 가운데는 성전 기사단의 가족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쪽은 전통적으로 아일랜드 지부와 친분이 두텁지요.”
“그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란 뜻인가?”
“물밑 작전이 필요합니다. 메타트론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계신 것 또한 사실이지요. 아마도 기사단 상부에서는 전투 헬기의 사용을 금지할 겁니다. 그리고 은밀한 작전을 요구하겠지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싶습니다.”
로이드가 파악하기에 젊은이들은 힘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따라서 적당히 폭발시켜줄 필요는 있었다.
로이드가 독일지부의 냉철함과 과도할 정도의 결단력을 걱정했다면, 네이슨에게도 독일의 고지식함과 계율주의는 성가실 것이 틀림없었다. 독일 지부는 로이드에게도 성가시지만, 네이슨에게도 족쇄가 되는 것은 틀림없었다.
은밀하게 대규모 작전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네이슨은 어쩔 수 없이 은밀하게 싸우는 길을 택할 터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희생이 생기고 누적되기 시작하면, 힘으로 해결하는 네이슨의 노선에 회의를 갖는 이들이 생길 것이라는게 로이드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움직임을 위해서 로이드가 유럽으로 가서 상층부와 몰래 만나서 실상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어찌되었든 동영상은 큰 도움이 안됩니다. 제가 조제성을 풀어주려고 했기 때문에, 네이슨은 제가 적에게 오염되었다고 판단해 죽였다고 증언하겠지요. 조금 과감하지만, 크게 책망받을 부분은 아닙니다. 실제로 전 이렇게 프레이야님의 덕분에 살아남았고, 프레이야님에게 어느정도 감화된 상태이니, 동영상이 퍼지고 제가 나선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됩니다. 되려 프레이야님의 위험성을 실감하게 될 뿐입니다.”
“세상이라는게 참 쉽지 않군.”
“영화에 반전들이 너무 자주 나와서 그래. 반전만 한번 뜨면 모든게 술술 풀려나가니까, 하지만 사람들이라는게 그리 단순하지 않지. 모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템플 기사단의 계율은 템플 기사단원들에게도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40이상의 회원들 가운데, 불치병이나 불구가 된 이들, 그리고 그 가족들은 계율을 존경하면서도 그게 풀리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았다.
구급차나 소방차, 경찰차는 긴급 상황에서 신호등을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프레이야를 적으로 돌리게 되면 그들을 옭아맨 족쇄들이 풀려나는 것이다.
“자네 말이 맞을 것 같군.”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 레이나를 생포해주지 않겠나?”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 정예 요원중에 상대에게 상처하나 안입히고 곱게 모셔오는 재주가 있는 친구가 있지. 날 믿게.”
조제성은 웃으며 가슴을 두들겼다. 상처하나 안입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차라리 죽는게 몇 배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음, 마음의 상처는 조금 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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