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북풍과 햇볕
명필은 붓을 안가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명필은 붓의 품질과 관계없이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작품을 낸다는 것이지, 붓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명필이기에 자신의 실력을 한껏 살릴 수 있는 그런 도구에 더욱 목을 매달게 마련이었다.
당연히 검사는 보검이나 명검에 미치고, 궁사는 명궁에 미친다.
그리고 그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스! 운이 좋았어.”
엘프 총사대 3번대와 4번대(근위 총사대)는 기쁨의 환호성을 올렸다. 그다지 활약들은 못했지만, 지난번 전투에서는 모두 AK-47을 소지하고 출전했다. 그리고 그것은 드워프제 장총을 들고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작전 구역은 남미, 덮고 습하다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울창한 수림은 그녀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지구의 문화나 전투에 익숙해지도록 영화들을 잔뜩 보여준 탓에 영화광이 된 그녀들은 남미 정글에선 인터넷이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서 볼 영화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팔성 사이다도 좀 챙겨야 할 것 같은데.”
“보급품은 조제성 사장이 챙겨 주기로 하지 않았어?”
“그렇지? 리디아 대장. 조사장한테 팔성 사이다 꼭 챙기라고 말해줘.”
이온음료나 다양한 착색 음료에는 거부감을 보였지만, 탄산음료 중 사이다에 맛이 들려서, 사이다를 입에 달고사는 엘프들이었다.
“리디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네?”
“아, 레이니. 별거 아니야. 미드가르드가 걱정이 되어서.”
“아항, 그 오우거 엘프가 신경이 쓰이는 거지?”
“그, 글쎄. 일단 우리 엘프들의 영토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프레이야님의 영역이 우리 영토야. 여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RPG-7, 그거 포획하면 내가 첫번째다.”
“우~. 레이니 부장. 그런게 어딨어. 리디아 대장. 포획 무기는 포획한 사람이 쓰는걸로 해요.”
“정글에는 스팅거도 있다던데. 그럼 전번에 그 헬기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스텔스라던데? 어떻게 되지?”
“M-60이면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난 기관포가 좋아.”
뒤늦게 도착한 조제성은 엘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전쟁영화만 보여준 덕분에 죄다 전쟁영화 광에다가 밀리터리 매니아화 되어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카레에 사이다, 총기 매니아라니, 엘프들을 너무 타락시키는거 아닌지 모르겠군.”
문화 충격,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 차이가 클 수록 충격적이었다. 미드가르드의 저문명, 저문화에서 흘러온 만큼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만, 문화에 대한 저항감이라는게 있어야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프레이야의 영향 때문에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고기를 좋아하고 탄산음료를 좋아하고,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원기를 보면서, 고위 엘프 신관들은 그것을 프레이야의 뜻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가 고기를 좋아하니, 엘프로서도 저항감없이 고기를 즐길 수 있는 카레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탄산음료 중에선 그나마 첨가물이 적은 사이다를 선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프레이야의 선호가 엘프들에게는 절대적 삶의 지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적응력이 뛰어난 젊은 엘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로맨스 영화들을 좀 보여주는게 좋을까? 아니지, 자칫하면 요상한 쪽으로 흐를지도 모르겠군.”
엘프들은 사랑에 대해서 둔감한 편이었다. 자손을 낳기 위한 번식행위라는 의미가 강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연애에 집착하는 현대 문명은 반드시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리디아 전하. 전하께서 용병단, ‘아마조네스’의 리더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연하양이 있지 않나요? 전 미드가르드쪽이 걱정이 됩니다만...”
“정글에서는 순수 엘프들이 아니면 기동력에 보조를 맞출 수 없습니다. 연하양에게는 따로 맡기고 싶은 일이 있군요. 이번 임무는 아시다시피 프레이야님께서 직접 맡기신 일입니다. 그리고 저도 프레이야님의 선택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리디아님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겁니다. 기회는 또 있을 겁니다.”
조제성의 말에 리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은 모르지만,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몰라야 한다고 프레이야를 비롯한 4인 회의의 의원들이 결정했다면, 그것을 몰라야 했다.
“알겠습니다. 조제성 의원님의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결연한 리디아의 표정을 보면서 조제성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행은 남미에 도착했다. 조제성은 시체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은밀히 움직여야 했다. 조제성의 실종이 대내외적으로 문제가 될 때까지는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멕시코 미초아칸주에서는 수년 전까지 라 파밀리아라는 카르텔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두목이 검문소에서 체포된 뒤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이름은 남아있지만, 하부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서 되려 범죄가 급증한 상태였다. 조직의 혼란으로 가장 큰 금맥이던 마약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측에는 좋은 소식이지만, 유괴사건의 빈발로 미초아칸주의 치안은 상당히 안좋아진 상태였다.
“하부 조직들 가운데는 너희 조직도 있는 모양이다.”
크리스가 로이드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템플러 나이츠, 성당 기사단이라는 이름의 마약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 도용당했다고 재판을 걸 수도 없고, 상표 등록을 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크리스는 최근 친족이 유괴된 거물급들 가운데, 용병들 사이에 공정한 거래로 제법 이름난 사업가를 골랐다.
그리고, 로이드를 통해서 내부 협력자를 색출하고, 시내의 연락처를 습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질이 남아있지 않았다.
부두목을 생포하는데 성공했지만, 심문이 쉽지 않았다.
“상황이 안좋습니다. 인질 구출에 실패한 만큼, 빨리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저놈이 쉽게 입을 열지 않는군요.”
크리스는 어두운 안색으로 조제성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입을 열지 않으면 로이드 역시 건져낼 수 있는게 없었다.
고문은 보통 3단계로 이루어진다. 1단계는 겁을 주는 것이다. 2단계부터 실질적인 고문이었다. 고통은 주되 후유증은 없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3단계는 확실하게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 쉽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반드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죽인다는 협박이 안먹히는 상대에게는 장애를 안고 살게될 것이라는 협박이 먹히는 경우가 있었다.
치아를 빼거나 어딘가를 자르거나 하는 등의 최악의 고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 상대의 증오와 독기를 키울 수 있어서, 사실 효과는 크지 않았다. 고통을 가해도 비웃으며 입을 다무는 상대의 경우엔 더욱 그러했다.
“쉽지 않을 듯 합니다만,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
조제성은 크리스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결단을 내렸다.
“아니, 이곳은 리디아님에게 맡긴다.”
“고문을요?”
“일단 두고 보게.”
안토니오는 지저분한 심문실에서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독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새로 나타난 심문관은 의외로 앳되어 보이는 절세 미인이었다.
‘이놈들이 미쳤나? 유혹할 셈인가?’
그는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은 유혹용으로 쓰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를 유혹할 색기가 부족한데다가, 그럴 의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깨끗한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 깨끗하고 시원한 물컵을 가져다 대었다.
“목마르실텐데, 목이라도 좀 축이세요.”
‘정신 나간 년이군. 물이라도 뱉어주지.’
그는 입안에 물을 머금었다. 얼굴에 피와 침이 섞인 물을 토해줄 셈이었다.
‘음, 갈증이 좀 가시는군. 빌어먹을 놈의 고문을 견디려면, 체력을 좀 회복해 두는게 낫겠지?’
그는 모처럼 마신 물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으로 조금씩 넘겻다. 갈증이 풀리면서 몸 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멍청한 계집같으니. 착한 경찰 나쁜 경찰 놀이라도 할 셈인가? 할 수 없지. 이 기회에 체력이나 회복해야겠다.’
“이왕이면, 식사도 내놓는게 어때?”
“그렇게 하지요.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부리또.”
벙어리처럼 비명은 커녕 신음소리도 내지않던 상대가 입을 열자, 크리스와 로이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조제성을 보았다. 조제성은 쓴 웃음을 지은 다음, 손짓을 해서 사람을 불러 치킨 부리또를 배달시켜 왔다.
“먹여 드릴까요?”
“손을 풀어주는게 좋지 않겠나?”
안토니오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마도 거울 뒤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을테지만, 방 안에는 갸냘프고 앳된 여자 뿐이었다. 인질로 잡으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꽤 귀하게 자란 여자에다가 상품가치도 있어 보였다.
여차하면 목을 확 분질러 죽여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탈출 못하고 죽을거라면 적어도 적은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는게 낫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요.”
그녀는 허리를 숙여, 의자에 묶인 그의 팔을 풀어 주었다. 안토니오는 내심 그녀의 어리숙함을 비웃었다. 크리스와 로이드는 조금 당혹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은 리디아가 엘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임 캐릭터의 힘과 엘프의 운동신경이 합해진 만큼, 근접 격투에서도 그녀를 당해낼 만한 이들은 없었다.
그렇기에 문을 열고 뛰어들어갈 생각을 버렸다.
‘저 멍청하고 연약한 계집을 인질로 잡는 건 간단하지. 일단 부리또부터 먹는게 나을 것 같군. 먹으면 기운도 좀 나겠지.’
그는 리디아를 잡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부리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부리또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고문을 견디는데도 체력이 필요했던 터라, 알게모르게 허기가 진 상태였다.
‘하아. 좀 나아졌군. 순진한 계집이야. 이런데서 죽기는 좀 아깝군. 죽을 거라면 그냥 깨끗이 혼자 죽는게 낫겠지. 일단 인질로 삼고 탈출 시도는 해봐야겠지만, 실패하면 깨끗이 혼자 죽는게 나을거야.’
“이봐. 잘 먹었다. 그건 그렇고 먹고 마시니 소변이 보고 싶어지는군. 소변 좀 볼 수 있게 다리에 묶인 것도 좀 풀어주겠나?”
“어려울 것 없지요.”
리디아는 그렇게 말하고 허리를 숙여서 그의 다리를 묶은 고리도 풀어 주었다. 그는 손을 뻗기만 하면, 리디아의 머리채를 잡고 제압할 수 있었지만, 다리를 풀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차피 탈출하기는 힘들어. 괜히 이 착한 아가씨만 곤란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이 아가씨랑 거래를 해보는게 나을 것 같군. 아까의 그 망할 새끼들보다는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아. 어차피 날 구하러 오지도 않을텐데 조직에 죽을 때까지 충성한다는 것도 바보같지.’
“아가씨. 거래를 하고 싶다.”
“다행이에요. 원하는게 뭐지요?”
“외국으로 달아날 수 있게 해주는 것. 남미를 떠나 유럽으로 가고 싶군. 그리고 30만 달러 정도는 준비해 줬으면 좋겠군.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지. 그럼 인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다.”
“30만 달러인가요. 그걸로는 여생을 충분히 지내기 부족할 것 같군요. 100만 달러 드릴께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거울 쪽을 향해서 사인을 보내자, 조제성이 백만 달러를 가지고 들어왔다. 미리 조제성이 준비해 둔 돈이었다. 성공 보수가 200만이고 목적은 돈보다는 연줄을 만드는 것이기에 백만 달러는 충분히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신분과 항공권, 그리고 사면을 약속하는 서류예요. 이거면 충분히 유럽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거에요.”
“이거 고맙군요. 멋진 아가씨. 당신같은 분이 두목이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직접 인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지요. 총을 주시면, 인질 구출에 협력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래요? 그럼 이 총을 쓰세요.”
리디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권총을 넘겨줬다. 크리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 못해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고, 상대가 말하는게 모두 진실이라는 사실을 아는 로이드는, 자신의 진실을 보는 눈이 잘못된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원래 북풍보다는 햇볕이 강한 법이야.”
조제성은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적당히 속여 넘기려고 했지만 그게 잘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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