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미드가르드 루트
지르 요새에 앞선, 데지스 성 공략전.
미드가르드의 공성전은 중세의 공성전과 비슷하지만,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성역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요새나 성의 중심이 되는 시설은 신전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고랭크의 신전이었다.
신성력의 가호가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일부 에인페리어나 신관들의 경우 광역 보호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마법이나 이능은 신관의 광역 보호 마법 앞에서는 효용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공성 병기의 위력도 꽤 감소하는 편이었다.
성 자체 만으로도 공략이 어려운데, 신성 마법의 보호까지 받을 경우에는 그 어려움은 상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이야 왕국군은 데지스 성에서 약 일 키로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신전과 목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성역으로 성역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성역의 힘은 세계수가 모아들인 정신력의 힘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공성하는 측이, 수성하는 측보다 머리수가 많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요새나 성처럼 랭크를 높이지는 못하지만, 영역 다툼을 이용해서 한쪽 성벽 정도는 중립 성역화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취약한 시기는 역시 신전을 건설하는 시기였다.
목책과 신전을 건설할 때, 수성하는 측에서 일거에 공격하고 도망치는 전투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양 진형이 거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신전이 완성되고 랭크를 올릴 때까지는 수성하는 측이 유리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벽녘에 일거에 쏟아져 나와서, 적들이 대처하기 전에 최대한 피해를 주고 재빠르게 빠지는 수법은 수성측의 표준 전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따라서, 데지스 성 공략군은 목책과 신전을 건설하면서, 적의 도발을 견디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이기도 했다.
“한달은 너무 짧아.”
데지스 성의 성역은 랭크 4, 신전을 급조하고 랭크를 올려도 한달이면 2까지 올리는 것도 힘들었다. 3이 아니면, 완전한 중화는 불가능했다.
어느정도 중화하는 정도만 가능하다고 봐야했다. 랭크 1의 성역에서 적의 에인페리어와 싸우는 것은, 원기나 희연의 경우 좀 불리하다고 봐야했다.
육체와 영혼이 함께 영향을 받는 신관들과 달리, 영혼만 영향을 받는 게이머들은 이능을 쓸 수는 있지만, 마법이나 육체 강화의 능력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이능은 신과의 관계에 의해서 각성하고 성장하는 것으로, 능력 자체가 진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미드가르드에서는 전체적으로 상상력이 빈곤해서, 육체 강화나 마법 강화의 이능위주였다.
“화염의 대마법사인가.”
화염의 대마법사, 기스카르는 오랜 정신 수양으로 높은 정신력과 강한 의지, 그리고 불꽃에 대한 이능으로 엄청난 위력의 마법을 자랑했다.
프레이야가 만든 소환마법(실제로는 환영마법에 불꽃마법을 추가한 것)인 드래곤플레어를 사용할 경우, 꽤 넓은 범위에 2도 수준의 화상을 입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현재는 신관들의 광역방어마법 때문에 소용없지만 공성이 시작되면 가장 크게 활약할 수 있는 존재였다.
‘화염강화가 미드가르드의 마법뿐만 아니라, 게임의 마법에도 통할까? 화염방사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빙계, 풍계, 화계 마법에 대한 이능들을 가진 이들이 제법 있었다. 상상력의 빈곤이라면 빈곤이지만, 욕구 자체가 현대인처럼 다양하고 크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어이, 농땡이 치지 말고 일해.”
장수한의 말에, 원기는 거대한 통나무를 운반하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희연은 날카로운 도끼를 이용해서 벌목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아무리 예리한 도검에 강화하는 이능이 붙었다고 해도, 나무를 자르는데 효율적인 것은 역시 도끼였다.
물론, 희연이 사용하는 도끼는 특별히 날이 길고 예리한 전투 도끼의 일종이었지만, 희연의 이능과 결합하자 나무를 베어내는데도 아주 쓸모있는 상태였다.
빛나는 도끼로 몇번 찍을 때마다, 커다란 나무가 간단히 쓰러졌다.
원기는 엘프들이 가지를 쳐낸 통나무를 양쪽 어깨에 두그루 짊어지고 마차를 제조하는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마차의 제조는 주로, 인간들과 드워프들이 하고 있었다. 바퀴는 적당한 크기의 통나무를 두껍게 썰은 것을 그냥 사용했다. 마차의 무게도 무거워지고, 운반하기 나쁘다는 단점은 있지만, 나중에 공성용 망루의 바퀴로 사용될 것이었다.
“저 무식한 괴물이, 에인페리아이자, 4인 회의의 의원이란 말이지.”
구 굴베이그 왕국의 공작이자, 현 프레이야 왕국의 공작이기도 한 헨릭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노려보았다.
“예. 말도 안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작을 추종하는 귀족 중 하나가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지금은 프레이야 왕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굴베이그 왕국의 귀족들은 아직 새로운 왕국의 일원이 되어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특히 엘프를 귀족으로 하는 제국 건설의도 자체가, 굴베이그 출신의 귀족들에게는 상당한 위기감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미드가르드의 종교에는 경전이 없다. 아니, 경전이 갖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탁이 직접적으로 내려지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곳에서는 신탁이 아니라 ‘신법’ 혹은 ‘신령’이라고 불렀다. 신의 법, 신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돼지를 먹어선 안된다.”라는 신령이 내리면, 그 신을 따르는 이들은 돼지를 먹어선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신이 “돼지를 먹어라.” 혹은 “돼지를 먹어도 좋다”라는 명령을 내리면, 그때부터는 돼지를 먹어도 되거나,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법률이 그렇듯이, 동등한 권한의 법령은 무조건 새것이 옛것에 우선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법’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이 말한 것은 무조건 새로운 신법이자, 신령이 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교리라는 것이 정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것은 ‘4인회의’에 주어진 파격적인 권한이었다. 4인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프레이야의 명령과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프레이야의 명령에 우선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프레이야가 ‘돼지를 먹어선 안된다’라고 명한 후, 4인회의에서 “돼지를 먹어라”라고 결정을 내리면, 돼지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프레이야가 그것을 정정하거나 취소하지 않는 한, 프레이야가 내렸던 명령 자체를 부정하는게 가능한 것이다.
이런 권한은 일찌기 주어진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게 당연했다.
물론 원기 자신이 프레이야임을 아는 사람들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굴베이그 출신의 신관들이나 귀족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반감이나 우려를 갖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원기와 장수한은 모든 것을 엘프들 위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덜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들은 신뢰할 수도 없고, 엘프들에 비해 무능하고 무식하며 야만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을 중용하지 않았다.
일견 타당한 것일수도 있지만, 굴베이그 출신 귀족들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입장 자체가, 엘프만이 귀족이 될 수있으며 모든 인간 귀족들을 평민으로 떨구겠다는 이야기로 해석되고 있었다.
엘프 사랑에 눈이 먼 장수한이나, 엘프의 신 프레이야의 후계자인 원기는 그 문제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 제대로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굴베이그는 인간들의 신이었다. 그리고 티르 또한 인간들의 신이다. 자유나 평등이 아니라, 전쟁과 권위, 차별의 신이었다. 전쟁과 권위, 그리고 차별은 사실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굴베이그에 충성을 했을 뿐, 프레이야에 충성을 결정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프레이야에게 제대로 된 에인페리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게이머를 적극 활용하기 때문에, 혹시 죽을 때를 대비해서 발키리를 보험으로 붙여둔 VIP는 있지만 용맹이나 능력을 인정받아 에인페리아가 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게이머들이 외부에서 보기엔 에인페리아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현재 전쟁에 동원된 엘프 에인페리아는 30을 넘어서는데, 굴베이그 출신의 인간 에인페리아는 단 한명도 없었다.
불만과 불만에서 비롯된 불신이 조금씩 쌓이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공성전에 참여한 이들의 가슴 속에서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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