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83화 (83/497)

83화 반간계

“모반이라고요?”

“정당한 권리를 찾는거라고 해야겠지. 모반은 무슨.”

“하지만, 여신을 배신하는 것은...”

“우리를 져버린 굴베이그 여신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우린 굴베이그 여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엘프들의 여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 없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엘프들의 여신은 인간들을 몰라. 엘프 다루듯이 인간들을 다루려고 하고 있지. 낮에도 보지 않았나. 에인페리아는 물론이고 4인회의 의원이 하던 짓을.”

“그렇지요. 작업부들이나 하는 천한 짓거리를 하다니, 기품이 뭔지 권위가 뭔지 모르고 있더군요.”

“그래. 권위야. 귀족에게는 귀족의 권위가 있듯, 여신에게도 여신으로서의 권위가 있어야 하지. 그런데 뭔가. 4인회의에 여신의 결정을 거스를 권한까지 있다는게 말이 되나?”

“저도 납득은 잘 가지 않더군요.”

“모든 인간은 모든 엘프와 마찬가지로 평등하다면서, 엘프들을 모두 귀족 대우를 한다는 것은, 우리 귀족들을 평민으로 떨구고, 엘프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 생각이야. 이걸 납득할 수 있겠나?”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연판장에 서명하게. 이틀 후, 새벽에 반드시 티르군에 협력하겠다는 내용일세. 자네가 마지막일세.”

연판장에는 귀족들과 기사들의 이름이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인들은 하나같이 빛나고 있었다. 진실의 글씨라고 불리는 특수 효과였다. 특수한 일회용 아티팩트로, 거짓을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몇몇 이름이 빠져 있었지만, 새로운 여신에게 충성하겠다고 드는 고지식한 이들이었다. 귀족도 기사도 마법사도 일종의 신관이기는 하지만, 진짜 신관들과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달랐다.

“알겠습니다.”

그가 서명하자, 헨릭 공작은 연판장을 어두운 안색의 음침해 보이는 사내에게 넘겼다.

“저자는 누굽니까?”

“데지스 성에서 나온 연락책일세. 혀가 잘려서 없는 사내야. 확실히 저렇게 만들어 두면 써먹기는 좋겠지.”

굴베이그 귀족들은 원해서 프레이야의 신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프레이야를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이번 전투는 티르에게 투항하면서 공을 세울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데지스 성을 지휘하는 사령관 데지스 자작은 티르의 이름으로 그들의 안전과 권리, 영지를 보장하는 문서를 작성해서 보낸 바 있었다.

평화, 평등, 자유 등을 이야기하는 프레이야보다는, 귀족을 귀족답게 대우해 주는 티르 신이 낫다는 것이 귀족으로 살아온 이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이들에게도 일종의 기사도가 있지만, 기사도라는 것이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연인이나 자식,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도 지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굴베이그 여신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아스 신족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아스 신족을 섬기던 신자들을 끌어온 터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프레이야보다 몇 배는 많은 신자들을 지니고도, 프레이야와 비슷한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굴베이그 여신을 진심으로 섬기던 귀족들은, 굴베이그 여왕과 함께 굴베이그령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가 위선적인 반 신들의 곁을 떠나서, 아스신족 중에서도 상위신인 티르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은 매파 귀족들이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었다.

“호오, 정말 놀랍군. 군의 장악이 끝난 셈이나 다름없어 보이는군.”

데지스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연판장에는 굴베이그측 지휘관들의 이름이 거의 대부분 올라있었다.

“3만 군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아군으로 돌아서는건가? 그리고 인간들 외에는 엘프가 약 일 천에 에인페리아가 서른명 가량 있다고 하지만, 끝난 것이나 다름없겠어.”

편지에는 공격해 올 타이밍까지 지정되어 있었다. 4일쯤 후에는 목책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될 듯 하니, 그 전에 새벽녘에 쳐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야행성이 아니지만, 어둠속에서도 환히 보이는 능력 때문에 야간 보초는 엘프들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 5시경, 인간들에게 경계를 맡기고 수면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었다.

“엘프들을 상대로 야습은 별로 좋지 않겠지. 알겠다고 전해라.”

그는 혀가 잘린 사내에게 편지를 넘겼다. 그러자 사내는 병사들 사이를 헤치고 조용히 물러났다.

“제법 쓸만한 전령이야. 굴베이그 놈들도 제법이야. 전령에게 혀를 잘라두다니.”

데지스 후작은 완벽한 승리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인간 귀족들과 엘프들의 사이가 안좋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호응해 주리라고는 생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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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책 공사는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입구를 제외한 모든 벽이 완성되었다. 입구는 제법 크게 만들어져서, 문짝을 다는 것만을 남겨 두었다.

물론, 목책이 완성되는 일은 없을거라고 굴베이그 출신 귀족들은 내심 단정짓고 있었다.

모든 상급 지휘관들이 티르의 편을 들기로 약조를 한만큼, 굴베이그군은 칼날을 엘프에게 향하게 될 터였다.

상명하복의 원칙이 완벽하게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이 인간들을 배신했다고 외치며 공격 명령을 내리면 병사들은 지휘에 따라서 엘프들을 공격할 것이다.

조금은 혼란이 있을지 모르지만, 충분히 수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편제상 엘프들이 지휘하는 인간 부대들이 제법 있었다. 다만 데지스 성의 병력 일만이 공격하고 내응하는 형식으로 뒤통수를 치게 된다면, 별 피해없이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게 그 카레라는 음식인가? 엘프들 치고는 특이한 음식을 즐기는군. 군용 식량으로는 훌륭한 듯해. 나중에 제조법을 좀 알아봐야겠군.”

헨릭 공작은 귀족들과 기사들을 위해서 마련된 특별 천막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오우거 같은 덩치의 엘프를 탐탁치 않은 눈으로 바라 보았다.

그는 4인회의의 멤버이면서도 보통 엘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알량한 이상주의, 혹은 위선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코웃음을 치고 귀족들을 위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데지스 자작은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섰다. 병력은 기마병 3천에 보병 7천이었다.

“자작님. 적이 제 때 배신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땐 정면으로 부딛쳐서 힘으로 제압하면 된다.”

데지스 자작은 자신있게 말했다. 티르의 성역에서 발휘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광폭화였다. 모든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수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었다. 두려움도 고통도 모두 잊어버리고, 분노의 화신이 되어 적의 숨통을 끊는다. 일시적인 근력, 순발력의 증가와 더불어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은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티르가 괜히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강점은 번식능력과 사회성에 있었다. 거인족들이 전투 종족이랍시고 만들어낸 오크들은 사회성이 약하다. 번식 능력은 강하지만 사회성이 약해서 숫자가 좀처럼 불어나기도 쉽지않고 관리하기도 힘든 편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권위에 약하고 겁이 많은 종족이라, 평상시에는 적은 식량으로 좁은 공간에서 숫자를 늘이기 쉬웠다.

그리고 전쟁에는 광전사화 시키면 오크 수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아스 신족이 인간들의 신인 것은 그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발키리로 다 확인한 상태다. 이건 거저 먹는 승리나 다름없어.”

적의 진심은 연판장으로 확인을 끝마쳤지만, 작업의 최후 단계까지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 용도로 사용하기에 발키리는 훌륭한 정보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신전이 완성되지 않은 이상, 적의 에인페리아들의 주변을 제외하면 발키리로 정찰하지 못할 곳은 없었다.

엘프 에인페리아들이 한곳에 모여서 잠을 자는 덕분에 그 지역을 제외한 곳들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이 모반의 준비를 마치고 잠드는 순간까지 다 확인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런 변동사항이 없었다. 너무 잘 풀려서 부담스러울 정도의 느낌이었다.

활보다 더 뛰어나다는 총이라는 병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사정거리가 짧고, 연사가 느리다는 점을 생각하면 뒤에서 공격받고, 기마병이 돌입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될 것이 틀림없었다.

“돌격하라!”

그의 명령에 맞춰서 기마병들이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보병들 역시 기병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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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습이다!”

“대장님! 적이 쳐들어 왔습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병사들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나타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찌된 거지?”

“기사님이 못일어나고 계십니다.”

“적들의 장난인가?”

병사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때였다.

“모두 정신차려라! 당장 적의 공격을 막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이들은 가까이 있는 신관들의 지시대로 움직여라!”

오우거같은 체격의 엘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병사들은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군의 사기를 북돋는 전사의 스킬이 포함된 목소리 탓에 병사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다.

그리고 곧 병사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적들의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데지스 자작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느꼈지만, 이미 내친 기세라 돌격을 명했다. 적들의 대비가 충분치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뻥뚤린 입구였다. 목책 위에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지만,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돌격이다! 적들이 진형을 갖추기 전에 유린한다!”

그의 명령에 별 어려움 없이 기병대가 목책의 입구 부분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데지스 자작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기병들의 목이 잘려서 하늘로 날아가고, 연신 낙마하는 모습이었다.

데지스 자작은 당황해서 말을 멈췄다. 다른 기병들도 당황해서 말을 멈췄지만, 상당수가 기세를 못이기고 목이 잘려나갔다.

“대체 뭐지? 보이지 않는 줄?”

기마병들이 쓰러진 자리에 핏자국이 남아서 흐르는 줄들이 보였다. 끈긴 줄들도 여럿 보였지만 일정 간격으로 몇 겹의 줄들이 쳐진 듯 싶었다.

“줄이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줄을 쳐놨다! 검으로 자르면서 전진한다!”

그가 그렇게 외치자, 기마병들은 천천히 전진하면서 검으로 목 높이에 쳐진 줄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엘프들의 총이 불을 뿜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의 화살들이 기사들의 가슴을 관통해서 등으로 빠져 나갔다.

엘프 총사대들이 이름에 맞지않게 총을 버리고 활을 든 것이었다. 한발씩 장진하는 총보다는 게임 캐릭의 무식한 파워를 살린 활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카본으로 만들어진 궁은 약 200파운드 이상의 장력을 가지고 있어서, 게임 캐릭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일반 엘프들에게는 전원 장총을 장비시켜서 그들을 총병대로 편성했다. 엘프들의 활솜씨를 생각하면 미묘한 것이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총기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기사들은 티르의 가호를 빌려서 총알을 튕겨내기 시작했지만, 무서운 기세의 화살은 가호를 뚫고 가슴에 박혔다.

데지스 자작은 상황이 안좋은 것을 보고, 최후의 수단인 광폭화를 사용했다. 일반병들의 눈이 붉게 변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철조망을 작동 시켜라!”

장수한의 명령에, 엘프들이 좌우의 도르래를 감기 시작하자, 땅속에서 기둥이 서면서 철조망이 올라왔다. 둥글게 말리고 가시가 달린 전형적인 철조망이었다. 한겹이 아니라, 몇겹으로 만들어진 장애물이었다.

보병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철조망에 걸려서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고 쏟아지는 화살과 총알에 차례차례 목숨을 잃었다.

“마치, 좀비 같아.”

희연은 육탄 돌격으로 철조망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병사 하나를 해치우며 말했다. 충혈되고 제대로 말도 못하면서 미치듯이 무기만 휘두르는 존재, 광전사라기보단 정말로 좀비 같이 보였다.

“물러나! 모두 물러나라!”

데지스 자작은 황급히 기사들과 병사들을 물리려고 했지만, 이성을 잃은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미친듯이 장애물을 향해 돌진할 뿐이었다.

데지스 자작은 거의 완벽한 패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육책에 반간계인가. 이기긴 했지만, 완전히 뒤통수 한방 맞은 느낌이네.”

장수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말 못해서 아주 고생이 많았습니다. 마취는 했다지만 혓바닥 자르는거 아주 끔찍하더라고요.”

“아직도 미드가르드어가 서투니까 그렇지. 엘프가 되어 배우는 건 어떠냐? 엘프들은 귀가 좋아서인지 발음이 더 분명하게 들리는 것 같더라.”

장수한은 신근호를 보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설픈 미드가르드어 발음을 감추기 위해서, 혀를 자르고 벙어리인척 한 것이 적의 신뢰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었다.

특히 신근호의 능력 중 하나인 지피지기 능력은 침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경비병들 가운데서도 알짜배기 경비병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윗선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가는게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은 조제성이 배려해 둔 것이었다. 물론 낚싯줄과 철조망을 이용해서 적의 돌격을 막는다는 것은 장수한이 준비해 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효과적일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 언제쯤 깨어나지?”

“아마 꼬박 하루는 혼수상태일 겁니다. 밥에다 섞은 거라 투여량을 조절할 수가 없었거든요. 많이 먹은 놈은 사흘 이상 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골로 갈 수도 있고요.”

“수면제도 아니고 동물용 마취제를 쓰다니 말이야.”

“수면제라면, 병사들이 흔들어 깨우면 깰지도 모른다고, 조제성 사장님이 챙겨주셨군요.”

장수한은 입맛이 썼다. 자유와 평등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반신족 휘하에서 아스신족 휘하로 넘어가려는 움직임은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전이 완성되면 귀족들 뒷처리를 위해서 들리신다고 하셨군요. 그때까지는 일단 잡아만 두라고 하셨군요. 이건 저들이 모반한다는 증거 동영상과 연판장 복사본입니다. 저는 다시 어학공부하러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귀족들이 절 보면 안좋을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신근호는 병사들 틈으로 사라졌다. 성을 지키는 병력의 상당수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성벽은 건재했다.

“이제 공성전이나 준비해 볼까.”

장수한은 씁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서 양뺨을 힘껏 때리고 팔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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