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사면초가
“공성전은 내게 모두 맡겨라.”
장수한은 원기를 보면서 힘있게 말했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 듯 했다.
“사령관은 선생님이니, 마음대로 하세요. 그건 그렇고, 아주 의욕적이시네요.”
“아, 나도 형님에게 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이기고 지는 문제는 아닐텐데요.”
원기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다. 장수한이 조제성에게 라이벌 의식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불태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역사 지식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현대와 미드가르드를 연결해나가는 장수한의 역할은 작지 않았고, 충실하게 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돈이 얽힌 속에서 뺏고 빼앗기고, 배신이나 배임행위 등을 셀 수 없을 만큼 경험해 온 조제성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방통 같기도 하고...’
원기는 조금 망설였지만, 장수한을 믿고 맡기기로 했다. 적의 전력 가운데 절반 이상이 궤멸된 만큼, 지나치게 무리하지 않으면 그다지 큰 데미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좋아. 그럼 계획을 실행해 볼까.”
장수한이 팔을 휘두르며, 의욕을 보였다.
“잠깐만요. 전 계획이 뭔지 모르는데요?”
“나한테도 널 놀라게 만들 기회를 줘. 그러니 넌 알면 안돼. 넌 맡겨진 일이나 하고 있어. 나중에 재밌는 걸 보여줄테니.”
그렇게 말하고는 장수한은 부지런히 엘프들이 모인 막사를 향해 뛰어갔다.
“맡겨진 일이라.”
원기는 한숨을 쉰 다음, 목책을 쌓는 공사판으로 향했다. 희연을 비롯한 엘프들은 낮시간에는 숲에서 벌목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가 도착해보니, 벌목장은 다수의 인간이 우글대고 있었다. 덕분에 작업이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되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지휘관들이 없어져서그래. 엘프들 휘하에 배속된 애들이 전부 몰려왔어.”
못마땅한 기색으로 한쪽 구석에서 보고 있던 한희연이 답했다. 사실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긴 했다.
엘프들은 인간을 부리는데 익숙하기는 커녕, 오물처럼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어했다. 한희연 역시 인간들을 부려본 경험도 없고, 재능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원기 역시 인간 병사들의 면면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젊은 병사들만 있는게 아니라, 나이든 병사들부터 어린 병사들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위생상태들이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불결했다. 지구의 노숙자들은 이들에 비하면 참으로 청결했다.
기사나 귀족들도 불결하고 촌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쪽은 나름대로 상대할 만한 수준은 되었다.
벌목 작업에 동원된 엘프는 300명, 그들로 충분히 작업해 왔는데 갈곳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인간 6000명이 포진한 것이었다. 하급 지휘관들이라고 해봐야 기사들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을 전달하는 역할만 해온 터라,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별 수 없지.”
원기는 조제성이 알려준 노하우를 떠올렸다. 인간은 감투에 약하고, 감투를 쓰면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었다.
완장차면 잘난척 하는게 인간이지만, 동시에 완장을 차면 그만큼 책임감도 생기고 나름 생각도 하고 처신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원기는 엘프 총사대와 함께 인간들의 분별 작업에 들어갔다. 엘프 총사대는 엘프들 가운데에는 인간에 대해 익숙해져 있었다.
연령별과 건강 상태별로 나눈 다음, 10명당 한 명꼴로 분대장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강가로 가서 씻기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모두 체포된 만큼, 그들에게 귀속되어 있던 병사들의 관리가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원기는 3만명을 입힐 군복과 속옷, 칫솔과 비누 등을 보내줄 것을 조제성에게 요청했다.
지르 요새에서 데지스 성을 지원하기 위한 병력이 출발했지만, 곧 펜릴 왕국측의 공격에 격퇴되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요새 공략군 사령관은 지원 병력을 방치해서 데지스 성 공략군과 싸우게 둘 생각이었지만, 왕명에 따라서 총기의 테스트겸 전투를 벌이게 된 듯 했다.
리디아의 약발이 여전히 잘 먹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펜릴측은 총기의 가치를 꽤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총기의 개량을 요구했다. 요구한 내용은 바로 ‘탄피’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의 총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드가르드에는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커녕 르네상스 비슷한 것도 경험해 보지 못한 터였다.
생산력 자체가 바닥이다 보니, 복잡한 무기를 생산할 여력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탄피를 재생해서 쓰는 것은 물론이지만, 탄피 없이 쓸 수 있는 총의 개발을 의뢰한 것이었다.
그래서 종이 카트리지를 사용한 드라이제식 소총을 개발해 넘겼다. 종이는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종이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니들건 자체는 펜릴 왕국측에서 환영하며 받아들였다.
총 자체의 성능이 떨어지는데다가, 기술적으로 퇴보한 것이지만 탄창을 대량 생산할 생산력이 없는 미드가르드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원기일행이 가진 진정한 무기는 ‘산업혁명’을 거친 사회제도일지도 몰랐다.
설사 총기 기술이 적의 손에 들어가 AK-47을 생산할 수 있게된다고 해도, 생산성이 너무 떨어져서 총알을 충분히 공급하는게 불가능할 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병사들을 씻기고 위생교육을 하는데만 한나절을 꼬박 소모한 원기가 돌아왔을때, 목책 안에서 본 것은 거대한 무대였다.
“우정의 무대를 시작합니다!”
장수한은 그렇게 외치고, 엘프 아이돌들을 투입해서 병사들 앞에서 공연을 개시했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병사들의 대다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물론 엘프 아이돌의 공연을 경험한 극히 일부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올리기도 했다.
원기는 무대옆에 서있는 장수한에게 다가갔다.
“전쟁터에서 이래도 되는거에요? 설마 오늘 하루종일 이것만 준비한 것은 아니겠지요?”
“걱정하지 마. 이게 바로 공성 작전의 일단계 ‘사면초가’다.”
“‘고성방가’를 잘못 말한 거 아냐?”
한희연 역시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어허, 내 심오한 공성작전은 마지막까지 가보지 않고는 몰라.”
장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날에도 낮에는 목책 건설과 공성장비를 제작하고 저녁식사 후에는 ‘우정의 무대’라며 엘프 아이돌들의 공연이 계속 되었다. 처음에는 익숙치 않아서 난감해하던 병사들이 날이 갈수록 호응이 좋아지면서 낮시간에 작업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웃긴 것은 데지스 성의 병사들 조차, 공연시간이 되면 성벽에 모여들 정도였다. 성 내부의 백성들도 아마 노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을지 몰랐다.
제작되는 공성 병기들은 나름 평범한 것들이었다. 성벽을 부수는 당차나 캐터펄트는 효용성이 없어서 만들지 않았다. 신전의 성역을 중화시키는 것은 보통 성벽까지가 한계였다. 성벽 자체는 신전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신관들의 광역 보호 마법의 영향 내에 들어갔다.
성벽보다 높이 만들어져서 궁병이나 총병이 사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동 망루(소차)를 비롯해서 공성탑과 유사한 충차, 사다리를 성에 거는 운제(밸프리) 등을 만들었다.
사정거리 밖에서 온종일 뚝딱거리면서 공성 무기를 만드는 것은 적들에게 심한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면초가라는 말처럼, 적병들이 여유를 부리며 노래를 즐기는 모습도 나름 효과적일지 몰랐다.
실제로 데지스 성 내의 분위기는 꽤 좋지 못했다. 지르 요새가 동시에 공격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꽤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보급품과 조제성, 그리고 리디아가 도착했다.
본래라면 처형당해야 할 귀족들과 기사들이지만, 리디아를 통해서 풀어주도록 했다. 물론 리디아는 반대했지만, 원기와 제성의 권유(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강요)를 받아들여서 그녀가 손수 그들을 여신에게 청해서 풀어줄 것을 부탁한 것으로 되어 그들을 풀어 주었다.
당연히 귀족들과 기사들은 프레이야 여신에게 약간의 감사, 그리고 리디아에 대한 강렬한 충성심을 품게 되었다. 리디아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은 물론이고, 가족의 목숨까지 바칠 정도의 마음가짐을 그들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을 모두 국가에 바치고, 일생 군인으로서 복무하는 충군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미드가르드의 교육 수준과 사회 문화를 생각하면, 쓸만한 인재 확보는 대단히 어려웠다. 전투 능력은 몰라도, 사람들을 부리고 판단하는 능력과 경험은 귀족과 기사가 아니면 갖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재를 양성하려면 적어도 십수년은 필요했다. 조제성이 귀족들과 기사들의 위험요소를 알고 그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트리아 황제의 약속된 임기는 10년, 그리고 그 후에 리디아를 황제로 옹립한다면 그녀가 퇴위할 때까지 적어도 20년간, 목숨빚을 갖게 된 귀족과 기사들은 충직한 일꾼이 되어줄 터였다.
“확실히 사람 부리는 데에는 자본가를 따를수가 없네. 골수까지 쏙 빼먹을 기세인데.”
장수한이 투덜거렸다.
“칭찬으로 듣지. 그건 그렇고 네 공성 작전도 멋지던데.”
조제성의 말에 장수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희연도 그렇고 박원기도 그렇고 조제성이 장수한의 작전을 칭찬하자 안심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아마 여신님도 놀라서 널 다시보게 될거다.”
“그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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