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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86화 (86/497)

86화 희연의 각성

희연은 벌목작업이 끝난 다음, 장교로 변한 기사들의 훈련을 담당했다. 그녀의 무도에 대한 지식은 꽤 깊이있고 폭이 넓은 편이었다. 무공 같은 것이 없는 세상이었다. 신의 힘으로 인한 육체 능력 상승은 있지만, 경천동지할 검술이나 무기술은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는 미남자들이 많았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었다.

“나 요즘 이상하게 인기가 많네.”

“그래? 그거 부러운데.”

원기의 반응은 희연이 기대하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어느정도는 질투를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원기는 아무리 장교이고 엘리트라지만 이 시대의 인간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생각했다. 엘프들만해도 꽤 문화적이 되기는 했지만, 현대를 배우는 총사대의 엘프와 일반 엘프들과의 격차는 상당히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점진적으로 바뀌기는 하겠지만,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아니, 새로운 문화나 시대에 영원히 적응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었다.

그나마 엘프들은 현대인들과 온도차가 크지 않다는 장점이 있기는 했지만, 마초적이고 야만적인 태를 못벗은 그들과 희연이 잘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원기가 보기에도 턱없이 약해 보였다. 약한 놈이 싫다는 희연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희연은 살짝 신경질을 낸 다음 기사들의 훈련장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에게 헨릭 대령의 아들, 헨릭 대위가 다가갔다.

“의장 각하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것 같군요. 의장 각하님의 보는 눈이 없는 듯 합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분이 곁에 있다면, 조바심이 날만도 할텐데 말이지요.”

그녀를 유혹하는 몇몇 미남자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가 바로 헨릭 대위였다. 금발에 지성적이고 살짝 차가운 느낌의 미남이었다. 지구에 데려가서 모델을 시킨다면 당장이라도 통용될 만한 미모였다.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겼어. 북유럽에 미녀도 많지만 미남도 많다고 하더니. 그건 그렇고, 날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전부 미남이네. 원기는 태생 미남이 아니라서 날 안좋아하나? 아니, 잠깐만.’

희연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미남들이 많다고 하지만, 무식한 체격의 사내들이 더 많았다. 땀내나고 도적처럼 생긴 인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희연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뭔가 의도적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희연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진실을 깨달았다.

희연을 유혹하려고 다가온 미남자들은 바로 폭탄처리반이었다.

리디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잡것들은 그녀가 원기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원기는 실질적으로 4인회의의 의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원기를 뺀 나머지 3인이 회의를 해봐야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를 의장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실세 중의 실세인 원기를 리디아가 좋아한다고 판단한 그들은 장애물이 될 소지가 커보인 희연을 폭탄으로 간주, 처리하기 위해서 미남 부대를 투입한 거였다.

‘아, 이거 장난 아니게 열받네.’

원래 사랑이라는게 한눈에 반하는 것도 있지만, 남주기 아까워서 불타오르는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장애물이 있으면 더 불타오르는 법이기도 했다.

그녀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매타작을 선택했다. 그녀는 목검이 아닌 죽도를 골라 들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목검이라도 충분히 상대를 살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죽도를 강화하면 잘 부러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있는 힘껏 패도 급소가 아니라면 사망사고를 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더럽게 아플 터였다.

“이봐. 다들 모여. 에인페리아와의 대결을 상정하고 일대 다의 전투를 벌인다. 실전이라는 생각으로 덤비도록 해.”

“검을 든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군요. 비록 죽도에 맞고 쓰러진다고 해도 아름다운 검놀림을 감상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헨릭 대위의 달콤한 말이 그녀의 분노를 격발시켰다. 헨릭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려움에 몸이 경직되는 듯 했다. 뱀 앞에서 쥐나 개구리가 꼼짝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 되었다.

그렇게 경직되어 있는데, 희연이 움직였다. 경직된 탓인지 그녀의 움직임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녀의 강렬한 기합소리와 함께 어디를 맞았는지도 모르고 극심한 통증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뭐야? 제대로 안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희연은 연신 상대를 죽도로 두들겨 패서 쓰러뜨리면서 화를 냈다. 아무도 맞서서 공격하기는 커녕 막으려거나 피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화가났다.

어려서부터 스포츠를 해온 여자들에게 흔한 것 하나가 남성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분명히 자신보다 실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않던 상대가 그저 남자라는 이유로 크고 단단한 육체를 갖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에는 우월감을 보이면서, 약자취급을 하고 보호하면서 상대로 간주해 주지도 않는 것이다.

희연의 경우도 여자들 가운데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강호지만, 남자들의 대회에 나간다면 16강에 턱걸이를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이미 원기도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희연이 얕잡아 볼 수 없는 실력이 되어버렸다.

물론 원기는 기본 재능 자체가 부족하고, 경력도 짧은 만큼 희연을 넘어설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대등할만큼 성장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마음에 드는 점이면서도, 동시에 불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실력도 되지 않는 것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 듯하자 그녀의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수양은 그럴 때일수록 빛을 발했다.

분노와 짜증이 극에 달하자, 냉정함을 되찾도록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숨을 고르면서 남아있는 녀석들을 보자,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다리를 떨면서 위축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이건 연기가 아닌데?’

자신을 얕잡아 보는게 아니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전사 캐릭터에 사기나 공포를 불러오는 스킬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가 저항도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당하는 스킬이 있다면, 그 게임은 유저들에게 욕만 엄청 먹고 서비스 접어야 할 터였다.

‘이능이다.’

그녀는 깨달았다. 게임 캐릭터와 별도로 존재하는 능력이었다. 손에 든 무기의 내구력이 강화되는 것과 빛을 발하는 능력은 게임 캐릭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발휘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머지 녀석들도 두들겨서 눕혀 놓고는 그녀가 가진 능력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발동은 눈이 마주칠 때로군. 눈이 떨어져도 수초간 유지되는 것 같고. 대상은 상대하는 적 전부인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나가는 보초병이나 엘프들과 눈이 마주쳐도 별 문제는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적’이나 ‘훈련상대’라고 간주할 때만 발동하는 능력으로 보였다.

그녀는 엘프 총사대의 몇명을 불러서 상대를 해 보았다. 역시 그들도 그녀의 눈빛에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기를 상대해 보았다.

“이번엔 쉽게 안질거야. 그건 그렇고 나한테 화난거야?”

원기는 그녀의 눈빛에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같은 게임 캐릭터인 총사대가 그녀의 눈빛에 꼼짝을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희연은 원기에게 다가가서,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흠, 여신 캐릭터라면 희연이 눈뜬 능력이 무언지 알 수 있었을텐데. 내가 여신이라서 능력이 통용되지 않은걸까?’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희연의 빛나는 몽둥이에 수십, 아니 수백, 아니 수천 번을 두들겨 맞은 바가 있었다. 특별히 이능이 원기에게 통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리디아의 능력은 게임 캐릭터시에는 통용되지 않지만(엘프라서), 평상시에는 물한잔도 안받아 먹고 있었다. 뒤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희연은 막연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능력이 각성하고 나서 지금까지 상대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강한 이는 원기 뿐이었다. 총사대의 멤버 중 단 한사람도 일대 일에서 그녀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물론 원기도 호각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2할에서 3할 정도의 승산은 있었다. 그녀로서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대.

‘아마도 나와 동급이거나 더 강한 자를 상대로는 발동하지 않는 능력인가?’

희연은 자신의 능력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이런 능력으로 거저 승리하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무도가였기 때문이었다.

“쓸모 없는 능력 아닌가?”

“아니. 엄청 쓸모있지. 전쟁터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만 걸리적 거리는건 아니니까. 드래곤 볼같은 상황이라면 쓸모가 없겠지만.”

희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공성 작전을 실시한다.”

“그래요? 잘되었네요. 마침 희연이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되었어요. 적을 포로로 잡는 것도 어렵지 않은 능력인 것 같은데요.”

리디아의 능력을 떠올린 원기가 기분좋게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 포로로 잡을 필요는 없어. 그냥 다 죽이는게 나을거다. 아마, 항복도 없을거야. 미드가르드에서 항복 따윌 하는건 반신족과 그 신자들 뿐이야. 이들은 전쟁터에서 죽는게 영광이고 목적이다. 항복도 없고, 포로도 없어. 포로로 잡는건 저들에게 큰 굴욕이고 자살 외에는 선택하지 않을거야.”

퇴각은 있지만, 항복은 없었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결정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리스도가 신인 세상을 살아가고, 불교 신자는 해탈이 존재하는 윤회의 세상을 살아간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아스 신족의 신자들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 만이 희망인 삭막한 세상을 살아간다. 적어도 전쟁에 나서는 전사들을 상대로는 회유는 불가능했다.

다크엘프들이라면 모를까, 인간들을 상대로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야. 문화의 힘이라면, 인간들을 바꿀 수 있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라는 소설이 흑인 노예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노예 해방에 기여했다. 그와 같은 예는 참으로 많았다. 때로는 소설이, 때로는 영화가, 때로는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왔다.

장수한의 문화 전략은 헛된 것만은 아닐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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