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87화 (87/497)

87화 예리고 작전

폴크방 평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데지스 성은 사실 티르 입장에서 지키기 쉬운 곳은 아니었다.

지르 요새를 통하지 않고서는 폴크방 평원으로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쪽을 횡단하고 있는 거대한 산맥이 대군의 진입이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가 만든 거울과 비슷한 아티팩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워낙 귀한데다가 대규모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차원 게이트가 열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열리면 공간게이트보다 더 대량으로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SF에 흔히 등장하는 아공간 항행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었다. 통상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공간을 거침으로써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호주로 직접 이동하는 것은 어림없지만, 미드가르드로 갔다가 호주로 가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차원 게이트는 말 그대로 구멍이라서, 거리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차원을 넘을 수 있는 반지, 차원을 넘어서 게이트를 이어주는 거울은 프레이야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준비해 온 것이었다.

미드가르드에서 엘프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보고, 일찌감치 어딘가로 도망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준비해 온 것이었다.

결국 프레이야를 제외한 다른 세력들은 공간을 이어주는 게이트 정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라그나로크는 흔히 신들의 최종전쟁으로 알려져있지만, 본래 의미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차원을 뚫는 일회성의 거대한 능력을 가진 아티팩트였다. 오딘이나 로키라면 제 2의 라그나로크를 만들어내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프레이야처럼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눈에 띄지않게 차원간의 게이트를 연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터였다.

공간 이동을 사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소수의 에인페리아뿐, 그리고 데지스 성에는 그런 공간게이트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원기는 물론이고, 조제성과 장수한 역시 원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의식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 삼천에 달하는 원군이 가까운 곳에서 프레이야 군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프레이의 다크엘프 군단이었다. 엘프와 동등한 운동능력, 엘프를 압도하는 공격성, 뛰어난 전투기술을 지닌 은신의 달인들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간장에게 설욕할 수 있겠군. 맹수로 변해서 목줄기를 물어뜯기다니. 치욕적이었어.”

성기사 그렌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전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에인페리아를 노리기 보다는 휘하의 엘프들을 노리는게 나을거야. 그건 그렇고, 그 저격수 계집은 보이지 않는군. 내 상대는 여보인가?”

성전사 미라엣도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렌. 돌입 타이밍은 잊지 마. 성벽이 부서지거나 성문이 열린 다음이야.”

“물론이지. 그걸 놓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공성전은 흔히 성벽을 점령당하거나, 성문이 열리면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진짜 전투는 그 직후라고 할 수 있었다.

적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생기니 사기가 높아지며 적극적으로 쳐들어가지만, 공격 루트가 한정되는데다가 극히 좁기 때문에 병목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안쪽에서 적절히 진형을 갖추고 적을 공격하면 큰 타격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호차(虎車)라는 수성용 병기는 수레에 호랑이 모양의 장식을 싣고 그 앞에 창을 박아놓은 것이었다. 성문이 열렸을 때, 호차를 내부에 배치하면 적은 성문 안으로 돌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호차를 치우려고 들면, 내부에서 창으로 찌르고 활로 공격해서 적을 손쉽게 해치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진짜 피튀기는 전투는 성문 혹은 성벽의 일부가 파괴 되면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렌과 미라엣이 노리는 타이밍도 바로 그 때였다. 선두가 데지스 성 내부로 쳐들어가고, 후속병력이 줄지어 따라 들어가려고 할때, 다크 엘프들의 대부대가 쳐들어가면, 말 그대로 빼도박도 못하고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삼천의 정예 다크엘프들이라면, 삼만의 인간병사들과 일천의 엘프들은 손쉽게 요리할 수 있었다. 정예 다크엘프와 대적할 수 있을만한 전투 경험과 기술을 가진 엘프 레인저는 얼마 전까지 백여명 뿐이었다. 성을 공격하는 순간에 공격하면, 적은 앞뒤에서 적을 맞아 괴멸적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고 그들이 자신하는 이유였다.

미드가르드에서 기병은 기마병과 기랑병으로 나뉜다. 늑대, 혹은 이리를 타고 움직이는 기병의 존재는 미드가르드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은 편이다.

북구 신화에서 발키리들이 타고 다니는 것도 말보다는 늑대였다.

발키리의 어원은 시체를 의미하는 발과 수집하다, 고르다는 의미의 키리가 합체된 것으로, 천사보다는 전장에서 시체를 뒤지는 늑대나 대머리 독수리, 하이에나 같은 이미지가 큰 편이었다.

훗날 꽤 미화되어 갑옷을 입은 천사로 변했지만, 본래는 늑대를 타고 다니며, 시체를 골라내는 마녀에 가까운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스 신족도 그렇지만 거인족의 경우 상당수의 종족들이 말보다는 늑대를 탔다. 늑대들 역시 다양한 품종이 있어서 체격이나 성격이 꽤 달랐다.

다크 엘프들이 타는 늑대는 그린 울프라고 불리우는 품종이다. 녹색이라고해서 양순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특기는 숲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며,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사냥감을 위에서 기습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엘프들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개과 동물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유연한 움직임이 장점이었다.

삼천의 다크엘프 기병은 프레이가 티르의 부탁을 받아서 특별히 파견한 고속 정예 기동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라엣의 말에 그렌은 긴장하며 병사들의 움직임을 지켜 보았다.

“공성병기들이 움직이지 않는군.”

“그러게. 이상한걸.”

대형 공성 망루가 적 성에서 공격받지 않을만한 위치까지 움직여서 배치된 상태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만의 대군은 갑자기 적 성문 앞쪽에서 좌회전을 한다음 성 주위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가 있는 걸 눈치채고 우리를 칠 생각인건가?”

그렌은 긴장했다. 아무리 3천의 다크엘프 기병이 강하다고 해도, 적과 정면으로 부딛친다면 승산은 크지 않을 뿐 아니라, 희생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지?”

병사들은 일제히 성을 돌면서 나팔을 불고, 악기를 연주하며 쿵짝거렸다. 저녁에만 하던 가무대회를 적 성의 주위를 돌면서 낮에도 벌이는 듯 했다.

대형 공성 망루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총병도 궁병도 아닌 엘프 아이돌 부대였다. 그들이 망루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자 병사들은 환호하면서 율동하면서 성 주위를 돌았다.

“말도 안되는 짓거리야.”

그렌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습을 걸기 위해서 방심을 유도하는 걸까?”

“설마. 저런 작전이 통하리라고 생각한다면, 미친 놈이지.”

그리고 한참을 쿵짝거리며 성 주위를 돌던 병사들이 갑자기 함성을 질렀다.

“프레이야님 만세! 리디아님 만세!”

프레이야를 환호하는 소리와 함께, 리디아를 환호하는 소리가 섞여서 나왔다. 리디아를 환호하는 순간은 일부의 병력이 약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리디아? 그게 대체 누구지? 새로운 여신인가?”

“글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네.”

그렇게 환호성을 울린 병사들은 다시 본진으로 털레털레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우정의 무대라는 이름으로 또 음주가무를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거지?”

“뭘가 주술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의식 같은게 아닐까?”

미라엣 역시 당혹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마찬가지 해괴한 짓거리를 벌였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반복해서 적진을 돌기만 했다. 다섯째 날부터는 병사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 손을 잡고는 성 주위를 돌면서, 강강수월래를 노래하기까지 했다.

“전쟁을 하자는 건지 축제를 벌이는 건지 모를 지경이로군. 대체 무슨 수작인거야. 강강수월래는 대체 무슨 주문인거지? 리디아라는 건 또 뭐야?”

“이해하려고 드는게 무리일지도 몰라. 이건 정말로 괴행이야.”

“대체 이게 몇번째지?”

“음. 오늘로 딱 칠일째네.”

“방심시키는 거라면,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며칠째 긴장해서 산 아래의 상황을 지켜보던 그렌이었지만, 이제는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엘프들이 부르는 노래가 처음엔 꽤 낯설었지만 익숙해지니 꽤 듣기 좋았다는 사실이었다. 군가와 찬송가 말고는 없는 세상에 사랑노래라는 것이 낯설긴 했지만 왠지 나쁘진 않다는 느낌이었다.

‘놈들이 노린건 이런 음악을 이용한 세뇌인걸까? 왠지 중독될 것 같기도 하고.’

다크엘프들 가운데에도 틈틈이 엘프들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들이 나왔다.

“프레이야님 만세! 리디아님 만세!”

“오늘 일과도 이걸로 끝인가?”

그렌은 양손에 무기를 들고 환호성을 지르는 프레이야 군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 순간이었다.

“지, 지진인가?”

땅 속에서 다발적인 굉음이 들리면서 지면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데지스 성이 폭삭 주저앉았다. 외부의 성벽이 순식간에 무너져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내성의 성곽과 신전까지도 폭삭 주저앉았다.

“보았느냐! 이게 바로 예리고 작전이다!”

장수한이 호기있게 외쳤다. 공성장비를 뚝딱거리며 만들고, 우정의 무대랍시고 밤에도 요란하게 놀았던 것은 예리고 작전의 선준비였다. 그가 투입한 비밀 무기는 드워프들이었다.

공성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작전 중 하나가 바로 땅굴파기인 만큼, 적도 땅굴 파기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공성전에서 땅굴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선 그 크기가 중요했다.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든, 병력을 성안으로 보내기 위해서든 땅굴은 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런 큰 땅굴은 파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적들도 땅굴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지만, 아직 경계를 크게 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장수한은 달랐다. 적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현대 문물을 쓰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플라스틱 폭탄이었다.

드워프들이 광산일에 적합한 것은 그 작은 체격 때문이었다. 체격이 작으면 땅굴을 작게 팔 수 있고, 작은 땅굴은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빠르게 팔수 있고 처리해야 할 부산물도 적게 나온다. 그래서 중세나 근세에 광산일은 대부분 어린이들을 이용해서 이뤄진 것이기도 했다.

이미 현대 문물을 접한 드워프들에게 굴착기를 맡기니 적성 가까이까지 땅굴을 파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예리고 프로젝트 발동, 요란한 음악소리와 성가까이에서 벌이는 적군의 움직임에 정신이 팔린 틈에 성벽 밑에 골고루 플라스틱 폭탄을 묻은 다음, 내성까지 파고들어가서 내성 지하에도 고르게 플라스틱 폭탄을 묻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프레이야 여신을 환호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일거에 폭발시킨 것이었다.

“멋지네요. 이건 정말 효과적이에요.”

원기는 장수한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꽤 극적이고 재미있는 작전이라고 인정한 것이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지. 아니, 이건 신화라고 해야 하나.”

장수한은 그렇게 말한다음 학우선을 휘둘러 돌격 신호를 내렸다. 원기와 희연을 선두로 총사대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엘프들은 대형 망루에 자리잡고 정신 못차리는 적들을 향해서 사격을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요?”

그렌이 넋이 나간 듯 싶자, 부관이 물었다. 그렌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미라엣을 보았다. 미라엣 역시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사태가 너무 예상 밖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다.

데지스 성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제대로 저항을 해볼 여지도 없을 터였다. 대부분의 병력이 성벽위에 있었고, 사령부는 성내에 머무르고 있다가 매몰되었다.

저항하고 싶어도 저항할 여지가 없었다.

‘시간이 없어.’

미라엣은 그렌을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도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격하라! 적의 뒤를 칠 기회는 지금 뿐이다!”

그렌의 명령에 다크엘프 기병들이 황급히 태세를 갖추고 산 위에서 데지스 성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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