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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88화 (88/497)

88화 예리고 작전 플랜 B

공성전은 보통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전투라고 봐야했다. 보통 공성전은 몇달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지루하고 많은 희생을 전제로하는 전투였다.

성벽, 혹은 성문이 깨지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해도,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성벽의 일부가 뚫리거나 성문이 열린다고 해도, 성 내로 몰려들 수 있는 병력은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문 안쪽으로 적을 끌어들여서 격퇴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놈들이 묘하게 움직인다! 차폐물 부대는 빠르게 움직여라!”

지휘관의 명을 받은 차폐물 부대의 마일즈는 빠르게 움직여서 스파이크를 실은 수레를 향해서 움직였다. 적이 성내로 침입할 경우에 적들의 침입루트에 강철 스파이크를 배치해서, 적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부대였다.

보통의 수성전과 달리, 수성 병력 대부분을 전초전에서 잃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성벽 위에 배치되어 있었다.

적의 침입을 막는 병사들은 급조된 목창을 든 민간인들이었다. 노인과 아이들까지 있어서 과연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성벽이 뚫리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걸.’

마일즈는 입맛이 쓰다고 느껴졌다. 외성과 내성 사이에 병력이 우글대야 할텐데, 성벽에 배치하기도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7일간 쿵짝거리면서 성 주위를 돌며, 이해안가는 행동을 벌인 적들을 비웃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일즈 외에도 가슴 한구석에 불안감을 갖지 않는 이들은 없었다.

뭔가 의도가 있기 때문에 벌어진 행동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악몽이 찾아왔다.

적들의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그의 정신을 빼놓았다. 동시에 마구 지축이 흔들렸다. 스파이크 카트가 요동을 치면서 땅위에서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레에 붙어있던 병사가 넘어지면서 수레에 깔려서 비명을 질렀다. 성 내의 건물들이 마구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동시에 흙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흙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모두가 미친듯이 비명과 함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마일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풍경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높디 높던 성벽은 어디로 사라지고, 멀리 있는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이 눈을 찌르듯이 들어왔고, 지면의 울렁거림 탓인지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기침을 해대는 자들도 있었고,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병사들이 사방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들어오고 있었다.

마일즈는 당황해서 뒷쪽을 바라보았지만, 영광스러운 신의 전사 에인페리어와 기사들이 머무르던 내성역시 흔적도 없었다. 성벽과 내성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정예 병력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었다.

“이게 무슨 저주란 말인가.”

“프레이야 여신의 힘인가?”

마일즈는 병사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신 티르의 용자들은 결코 항복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미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굴베이그와 프레이야 때문에,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동경하는 이들이 적지않게 존재하고 있었다. 아스 신족이 거인족과 싸우는 와중에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굴베이그와 프레이야의 씨를 말리려고 든 이유 중 하나였다.

성벽이 사라지고, 정규 병력 대부분이 사라졌다. 민심을 수습할 기사들과 지휘관들도 사라졌다. 목창을 든 민간인들은 목창을 놓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일부 남은 병사들 역시,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때, 산맥에서 다크엘프의 대군이 밀려왔다.

“플랜 B로 이행한다.”

장수한의 지시가 떨어지자, 성을 향해 공격을 퍼붓던 병력들은 일제히 꽁무니를 빼고 요새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성벽이 붕괴하면 공성전이 끝나는건 게임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보통은 그때부터 진짜 참혹한 전투가 벌어지는 법이었다. 물론 성벽 전체가 날아간 시점에선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지만, 전투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법이었다.

그래서, 장수한은 작전 계획을 두개로 나눠 작성했다. 성벽이 파괴되어 적들이 혼란에 빠져있고, 저항할 힘이 없을때 성을 쳐서 점령하는 것이 기본 작전, 곧 플랜 A였다.

그리고 적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치고 나올 때, 그때를 대비한 작전이 보완작전인 플랜 B였다.

프레이야군이 다 이긴 공성전을 포기하고, 미련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그렌과 미라엣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들이 이끌고 온 3천의 다크엘프는 확실히 강력하지만, 공성전을 벌일 병력은 아니었다. 낮은 목책 만으로도 적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적은 현재 다크엘프와 그린 울프들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교전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적이 더 유리해 질 수도 있었다.

전쟁은 결코 단순한 승패 세기가 아니었다. 삼판양승제 같이 전투에서 승리한 숫자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병력을 얼마나 아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경우도 많았다. 승리를 하건 패배를 하건 전력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작은 승리를 위해 병력을 퍼붓고는 결국 최종적으로는 패자가 되어버리는 예가 많았다.

3천의 다크엘프는 그런 면에서 쉽게 소모해서는 안되는 병력이었다.

“진격! 지금 적을 치지 않으면 기회는 없다!”

“적의 꽁무니에 달라붙어라!”

그렌과 미라엣의 생각이 일치했고, 그들은 공격적인 선택을 내렸다.

“이쯤인가?”

“그럴거야.”

원기는 혀를 차며 몰려오는 적들을 보았다. 늑대와 다크엘프들의 조합은 무시무시했다. 다행히 엘프들은 목책으로 재빨리 피했지만 인간 병사들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원기와 희연은 적들을 노려보면서, 퇴각하는 병사들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곁에는 총사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다크엘프들이 무서운 기세로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발 놈들아!”

원기는 감정을 담아서 한국말로 외쳤다. 아무래도 미드가르드어보다는 감정을 담기가 좋았다. 욕설은 만국 공용어, 말투만으로도 충분히 메시지는 전달되었다.

적들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원기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것이 작전상 퇴각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병사들에게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와 함께 희연이 온 몸에서 빛을 발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녀는 투구 외에도 얇은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전신이 빛으로 이루어 진 듯 아름답고 장렬했다.

그리고 원기도 그녀의 뒤를 이어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역시 멋지군.”

그렌은 원기의 모습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전투는 운에 가까웠지만, 그다지 억울하다거나 아쉽게 여기지 않았다.

희연의 싸움은 미라엣과 그렌이 보기에도 뛰어났다. 아름답고 강했다. 완벽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적의 공격에 스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단 일검에 적의 숨통을 끊었다. 뛰어난 다크엘프 전사들이 그녀의 검 앞에 마치 굳은 것처럼 목을 내놓고 죽어갔다.

반면 원기의 공격에는 많은 다크엘프 전사들이 몸을 피했다. 그리고 반격을 가했다. 원기는 그 대부분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강자와 용자의 싸움이군.”

그렌의 말에 미라엣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의 싸움은 아름답고 뛰어나지만, 건조했다. 용자의 싸움은 때론 추하고 비참하지만 동시에 장엄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렌은 원기가 흘렸던 청룡언월도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늑대의 옆구리를 차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미라엣 역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연하가 있었어야 했는데...’

원기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라엣이 부리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거인은 희연에게는 물론이고 원기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다.

연하라면, 멀리서 바람의 거인을 보고 미라엣을 저격해서 숨통을 끊을 수 있겠지만, 여기있는 이들로는 무리였다. 총사대들이 카본 궁을 이용해서 미라엣을 저격했지만 보이지않는 바람의 거인에 이해서 다른 방향으로 휘어나갔다.

바람의 거인에게 밟히면, 희연은 물론이고 원기의 움직임도 현저히 느려졌다. 그리고 그 틈에 그렌의 청룡언월도가 날아와서 그들을 공격했다. 희연의 눈빛은 그렌에겐 통하지 않았다. 미라엣에게도 써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아니 의미가 없었다. 미라엣은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지만, 바람의 거인을 움직이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렌의 청룡언월도에 원기의 왼팔이 날아갔다. 희연이 뛰어들다가, 다시 한번 바람의 거인에게 밟혔고, 그렌의 청룡언월도에 맞아서 나가떨어졌다. 갑옷의 내구력을 올린 탓에 어딜 잘리진 않았지만, 뼈는 여러 곳에 금이 가거나 박살이 났을 터였다. 희연은 의식을 잃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군.’

“더이상은 못버텨요!”

원기가 마지막 힘을 모아 외치자, 장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과 원기가 두 에인페리아의 상대를 하고 있는 사이에 총사대는 적의 다크 엘프들에게 거의 전멸을 당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몇배나 넘는 다크 엘프들을 죽이고 발목을 잡기는 했다.

장수한은 자신의 펫인 불새를 불렀다. 그리고 불새에게 최대한 화려한 모습으로 원기를 향해 날아가도록 지시를 내렸다.

“불새다!”

“불의 정령인가?”

사실 장수한이 사용한 것은 불새의 메신저 기능이었다. 그 안에 든 메시지는 ‘ㅋㅋ’였다. 아무 의미없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화려한 모습의 불새가 원기를 향해, 곧 그렌과 미라엣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모두에게 공격마법으로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았다. 그리고 불새가 원기에게 도착하는 순간 장수한은 리모콘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번엔 얕게 파묻힌 폭탄들이 화려하게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장수한의 파티창에는 우르르 사망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크 엘프의 피해는 약 일천, 그 안에는 그렌과 미라엣 두 에인페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엘프 총사대와 희연, 원기도 전멸했다.

적들이 역습할 때를 대비해서 묻어둔 폭약이 성공적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성공이다.”

장수한은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남아있던 다크엘프들이 미친 듯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고작 10분만에 다크엘프 2000이 완전히 전멸당했다.

하지만, 엘프 총병대가 300, 인간 병사들이 5000이 넘게 피해를 보았고, 장수한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다크 엘프들이 미친듯이 뛰어든 이유는 간단했다. 장수한의 마법이 너무도 강력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망쳐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차라리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는다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목책에 의지하며 총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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