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적과 아군
“대승을 축하하네.”
조제성이 그렇게 치하하며 장수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장수한의 표정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기나 한희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란에 빠진 마지막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적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엘프 사랑의 특성을 가진 장수한은 특히 심한 편이었지만, 원기나 희연에게도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낯을 익힌 엘프 총병대의 죽음은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장수한과 원기, 희연을 보면서 조제성은 웃는 얼굴로 질책했다.
“이봐, 정신들 차려! 너희는 지금 자신만만하게 웃어야 해!”
조제성이 나직하게 그리고 힘있게 말하자, 장수한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대승이 맞았다. 그걸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세 사람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전쟁이고, 타인의 목숨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각오가 없었던 것은 세 사람 뿐이었다. 죽을 염려 없이 전투에 참여한 총사대의 엘프들도 동료를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보장되어 있다는 상황을 무거운 십자가로서 느끼고 그것을 온전히 짊어진 이들이었다.
“너희는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무시하고 초를 치고 있는거야. 수한, 네 그릇은 이정도인거냐?”
조제성이 장수한의 귀에 속삭였다.
용감히 싸워서 승리를 안겨준 희생자들, 그들의 공이 있었기에 승리가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감상주의에 휘말려서,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은 그들이 목숨을 바쳐 얻어낸 승리를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수한 역시 조제성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고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들었다. 슬플 때, 슬퍼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차라리 더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수한을 비롯해 원기와 희연은 절실하게 느꼈다.
조제성과 함께 온 트리아 여제가 사람들의 선전을 치하하고 승리를 선언하자, 데지스 성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목재 요새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멋진 전투야. 네가 저지른 멍청한 실수는 딱 하나 뿐이지.”
연회석에서 조제성이 장수한의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뭡니까?”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거. 그리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야. 장수는 병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게 미덕이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는게 의무야. 무식한 놈들은 비겁자라고 욕할지 몰라도, 그걸 제대로 관철할 줄 아는게 장수인거다. 목숨걸고 싸우는건 때론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아. 이번 전투가 그걸 잘 보여주고 있지.”
그렇게 말하면서 조제성은 자신 앞에 놓인 금속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장수한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선 생각해 보자. 장수한 네가 제일 먼저 죽지않고 끝까지 살아있었다면 전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전사자는 적어도 500은 줄었을거다. 네가 그리 좋아하는 엘프도 꽤많이 살아남았겠지. 넌 죽지 않으니까 죽을거라면 네가 죽는게 좋았다고 생각하나? 너 대신 엘프가 열명이 죽었다면, 네가 지휘한 덕택에 적어도 200명은 살렸을 거다.”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수한의 어깨를 따뜻하게 두들겨주었다. 장수한은 말없이 자신의 술잔을 들이켰다. 어차피 게임 캐릭터라 술에 취하진 않지만, 혓바닥에 느껴지는 씁쓸한 자극이 그의 기분을 정리해 주었다.
사실 조제성이 말한 그대로였다. 총 지휘부가 사라짐과 동시에 중간 지휘관들이 지휘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그 사이의 혼란이 피해를 키웠다고 볼 수 있었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에인페리아들의 발목을 잡아? 총사대와 너희 둘이 앞장서서 격돌하는 대신에 병사들과 총병대의 엘프들을 배치해서 전투를 벌였으면 어땠을까? 물론, 폭발할 때까지야 희생이 크겠지. 하지만 너희와 총사대가 폭발 후에도 살아있었다면, 저 수많은 주검들의 대부분은 지금 파티를 즐기고 있을거다. 아니, 모르지. 그들도 지금 우리와 함께 승리를 기뻐하고 있을지도.”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말꼬리를 살짝 흐렸다.
“어찌되었건 대 승리야. 반성점이나 미련이 남지 않는 전투 같은건 존재할 수가 없지. 덕분에 당분간은 전투에 신경쓰지 않아도 될거다.”
조제성은 그렇게 단언했다. 사실 다크엘프의 마지막 일제 돌격은 프레이야군의 피해를 불러오기는 했지만, 결과는 상당히 흡족한 것이었다.
사실 총사대나 총병대의 엘프들은 주로 젊은 엘프들이었다. 반면 죽어간 삼천의 다크엘프들은 거의 모두가 성기사, 성전사로 이루어진 초 엘리트 부대였다.
그들 모두가 신관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피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프레이의 진영을 송두리째 흔들만한 충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프레이가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아스 신족의 지원을 받아왔다고 하지만, 다크 엘프역시 엘프인지라 그리 빠른 번식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인공 자궁 개발은 어떻게 되었지요?”
원기는 조제성에게 물었다.
고수준의 성역에서는 지속적인 생명력의 향상이 있었다. 그것은 간단히 표현하면, 지속적으로 치료 마법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조건 자체가, 현대 의학으로 넘기 힘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면역력이나 회복력을 높여서 수술에 도움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엘프를 급격히 증식 시키기 위해서 추진되는 것이 바로 시험관 아기였다. 난자와 정자를 통해서, 대리모를 이용해 아이를 얻는 방식은 의미가 별로 없었다.
인간의 대리모에서 엘프의 자식이 태어나는 일은 없었다. 어떤 과학자가 호랑이를 복제해서 고양이를 대리모로 태어나게 한다는 소리를 했지만, 그 이상으로 불가능했다.
여성 엘프를 대리모로 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완전한 인공 태아를 얻기 위해서 수조에서 시험관 아이를 자라게 만드는 연구가 필요했다.
“현재 동물 실험까지는 성공했지. 몇몇 비싼 품종의 애완견이나 애완묘를 뽑아서 돈도 좀 아낄 수 있었지.”
임신 기간 내내 수조를 관리하고 내부의 인공 양수와 태아의 몸속에 돌 혈액을 투석하고 양분을 제공하는 비용이 꽤 들어갔다.
그런면에서 희귀, 고가 품종의 애완견과 애완묘는 실험에 들어간 비용을 보전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세간의 관심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팬더나 롤랜드 고릴라 같은 동물을 사용하면 돈은 벌겠지만, 세간의 관심을 벗어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의 양육은 공동체적 양육방식이었다. 젖을 땐 아이들은 마을 공동으로 양육하며, 얌전하고 가정적인 수컷(?)들이 돌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엘프와 인공적으로 증식된 엘프의 수를 합쳐서 엘프 사회가 엘프답게 양육할 수 있는 한도는 약 일만이었다. 그것도 매년 일만이 아니고, 1-10세 사이의 엘프가 일만이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매년 700정도의 수를 생산(?)할 수 있었다.
현 상황이라면, 발등에 떨어진 불은 완전히 껐다고 볼 수 있었다. 펜릴 왕국에 총기를 보급하는 것은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받은 만큼 치열하게 싸워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넌 프레이와 펜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조제성이 원기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원기는 그가 묻는 의도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글쎄요. 일단은 적과 아군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분류는 잘못되었어. 세상은 딱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
“뭔가요?”
“현재 써먹는 놈과 곧 써먹을 놈. 이 세상에 지혜와 노력, 끈기만 있으면 써먹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 적이건 아군이건 신이건 악마건 말이다. 위대한 프레이야님은 날 이용하시고, 나도 여신님을 이용하는거지. 상호이용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의 섭리인거야. 적이니 아군이니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놈들은 머리좋은 놈들에게 이용당할 뿐이지.”
‘음. 조금 치사해보이지만 멋진데.’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성을 다시 보았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었다. 그리고 적이라고 해서 못써먹을 이유도 없다.
‘이제 오랜만에 문명 생활로 복귀하게 되는건가.’
조제성과 트리아는 논공행상과 데지스 성 복구를 위해서 남기로 했다. 논공행상은 단순히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마련이었다.
장수한의 작전 때문에 대부분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지만, 다크엘프들과 격돌하면서 장수한이 제일 먼저 나서서 죽은 다음에 벌어진 수라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은 제법 많았다.
특히 인간 측에서 냉정함을 잃지않고 용맹히 다크엘프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이들은 충분한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논공행상의 중요성은 바로 이점에 있었다.
단순히 공을 세운 자에게 포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발견하고 중용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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