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쪼렙학살자.
희연은 검을 들고, 눈 앞의 거대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키가 3미터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좀 큰 상대를 생각했지만 이건 완전히 집채만한 괴물이었다.
2층 건물만한 크기로 내려다보는 상대는 인간이 맨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를 당혹시킨 것은, 상대가 말 그대로 크고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미스유니버스를 확대 복사로 뻥 튀겨놓은 그런 미녀가 전신에 푸른 빛이 감도는 금속 갑옷을 두르고 서 있었다.
토르의 에인페리아 중 하나인 밀레니아였다. 남자 거인들도 기본은 초미남이었지만, 무지막지한 근육질에 스킨헤드, 그리고 덮수룩한 장비 수염을 갖춘 덕분에, 그들을 미남이라고 봐주기엔 많이 어려웠다. 하지만 허리까지 오는 아름다운 백금발에 순백의 피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크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가 든 무기는 더할나위없이 무식하고 그 이상으로 효과적인 무기였다. 만병지왕이라는 검 따위가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무기가 창과 칼이라면 인간이 파리를 상대할 때 효과적인 무기는 파리채였다. 파리를 상대로 신검 엑스칼리버라 한들 효과적일 수는 없었다.
잡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불필요한 힘을 쓰게 마련이었다.
쥐를 잡는다면 어떤 무기가 효과적이겠는가.
창이나 검으로 쥐를 잡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효율적이지도 못했다. 쥐를 잡는데 최고의 무기는 빗자루인 법이다. 그리고 거인이 인간을 잡는데 효과적인 무기가 있었다. 바로 도리깨였다.
엄밀히 말하면 도리깨와 비슷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쌍절곤과 비슷하게 쇠사슬로 봉과 봉을 연결한 것인데, 자루가 되는 약 3미터에 달하는 봉의 끝에 약 2미터 정도되는 봉을 다섯개 횡으로 연결해 놓은 것이었다.
‘저 무기가 정말로 효과적인걸까?’
그녀가 상상해온 범주를 벗어난 상대의 존재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희연은 거대한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녀가 거인 기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기습의 효과는 커질 터였다.
거인 에인페리아 밀레니아는 갑자기 튀어나온 엘프와 다크엘프들의 공세에 당황했지만, 곧 도리깨를 들고 희연을 향해 후려쳤다.
희연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듯 내려오는 5개의 기둥을 보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봇대만한 굵기의 기둥들은 뭉툭한 돌기가 튀어나온 철판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희연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기둥들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튕겨나오는 와중에 기둥끼리 부딪치면서 굉음과 불꽃을 튀겼다.
이런 식이라면, 기둥과 기둥 사이의 틈을 노려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공격 범위는 발을 기준으로 약 7미터에서 10미터 가량이었다. 그리고 좌우로 최소 4미터 정도의 범위가 초토화가 된다고 봐야했다.
‘이건 승산이 없어.’
희연이 자신이 걸친 갑옷을 이능으로 강화한다고 해도, 칼이나 화살은 막아볼 수 있겠지만 저 날아다니는 전봇대에 깔리는 것까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가장 사기적 이능인 쪼렙학살도 저런 강한 상대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서슴치않고 돌아서서 거인 여기사를 등지고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도망쳤다기 보다는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한 거인들을 상대하기 보다는 최대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식량을 노려! 다크엘프들은 가진 화살들만 빨리 소모하고 퇴각해!”
희연은 적병사들을 노려봄으로써 경직시킨 다음, 그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그들 곁을 빠져나갔다. 적병들 가운데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고 무장이 충실한 자들만 골라서 죽이며 병사들 사이를 누볐다. 거인 여기사 밀레니아는 그런 희연의 뒤를 쫓았지만 도리깨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너무나 뛰어난 무기지만, 파리채로 아군 파리, 적군 파리 골라죽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나무 위에서 활을 쏘던 다크 엘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무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크 엘프들은 가진 화살들을 퍼붓듯이 쏘아대고는 모조리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밀레니아는 다시 자군 진영을 돌아보았다. 곳곳에서 전투가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아군 병사들의 주검과 엘프들의 주검이 눈에 띄었다.
사제들이 분노의 제어라는 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일반 병사들이 광전사화됨과 동시에 사제의 지시에 움직이는 일종의 반 꼭두각시가 되는 수법이었다.
광전사의 탁월한 육체 능력의 상승을 이끌어내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그런 광전사들의 저항에 부딛쳐서 차례차례 죽어갔다. 다만 죽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사방에 불을 지르고 식량과 보급품 곁에서 자폭하는 짓을 벌였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광전사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다니는 희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광전사들이라고 해서 목에 칼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작 광전사화만으로 그녀에게 쪼렙을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에인페리아의 육체 능력을 가지고도 그렌과 미라엣조차 쪼렙 판정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광전사의 육체능력을 가진 사제의 꼭두각시는 희연의 쪼렙학살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저 무력하게 목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희연은 마치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목을 쳤다.
‘저게 퀸 오브 블레이드인가.’
거인 에인페리아들이 황급히 뛰어들어서 상대하려고 했지만, 도리깨를 휘두르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사이에 그녀는 발 뒤꿈치와 무릎 뒷쪽, 그리고 사타구니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고, 거인 에인페리아들 역시 무력하고 참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당황한 거인 기사들이 도리깨를 휘두르기 시작했지만, 그 범위를 민첩하게 빠져나간 덕택에 아군 병사들의 피해만 커져가고 있었다.
에인페리아라고 해도 체력적 한계는 있으니, 언젠가 움직임이 느려지고 잡히겠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토르시여! 적에게 분노의 철퇴를 내리소서!”
밀레니아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섬광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일어난 폭발로 반경 십미터 가량의 분화구와도 같은 것이 생겨났다.
“해치웠군.”
밀레니아는 이를 악물었다. 오딘의 궁그닐, 토르의 묘르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천벌과도 같은 공격이었다. 당연히 희연 역시 시신을 찾아볼 수 없게 박살이 나버렸다.
이미 뛰어든 엘프 에인페리아들은 전멸해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희연 역시 토르의 해머에 맞아서 사라졌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은 밀레니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미치겠군. 저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전장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토르가 가장 아끼는 여기사가 희연의 활약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다. 대처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맹한 토르의 병사들이 희연의 앞에서는 순진하고 무력하기 짝이없는 불쌍한 양떼처럼 보였다.
천공의 성좌가 없는 토르는 에인페리아들을 통해서 전장을 살펴본다. 토르의 해머는 보통, 에인페리아가 요청하는 즉시 발동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렇게 사용하기에는 사용되는 신성력의 양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토르의 해머의 정체는 일종의 미티어 스트라이크였다. 위성 궤도에 올려둔 돌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소환해서 신성력을 이용해 표적에게 적중시키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술이 발동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밀레니아는 자신이 요청하기 전에, 이미 토르가 묘르닐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가 토르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이미 전장을 살펴보고 있다가, 토르의 해머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었다.
밀레니아는 쑥대밭으로 변한 전장을 살펴보면서 혀를 찼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보급물자가 줄기는 했지만, 병력도 줄었다. 진군을 포기할 시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분명했다.
‘몇번이고 다시 쳐들어 오겠지.’
그녀는 희연과 쌍벽으로 불리우는 원기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자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들을 압도해 온것으로 알려진 에인페리아들의 기량까지도 의심스러웠다.
‘지금까지 저 괴물같은 계집을 어떻게 상대해 온거지? 그렌과 미라엣, 내가 알기론 그렇게 탁월한 기량을 가진 자들은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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