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
“무섭군. 무서워.”
조제성은 할 말을 잃었다. 미드가르드에 현대 기술을 되도록 가져오지 않고 최대한 숨길 생각이었지만, 부득이한 경우라고 생각해서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다.
그리고 첫 희생자가 나오는데까지는 멋지게 성공했다. 대전차 지뢰를 밟고 폭발해 버린 거인 기사가 등장했다. 되도록이면 리더로 보이는 밀레니아가 밟기를 바랐지만, 지뢰라는게 그렇게 바라는데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들 곁에는 비록 근접거리만 가능하다지만 만능 정찰병인 발키리가 있었던 것이다. 발키리를 이용한 탓에, 지뢰의 위치가 모조리 발각나버렸다. 땅속이라고 해서 발키리의 탐색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감시 수단은 오히려 현대보다 더 무시무시하군. 혹시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 같은 걸 훔쳐들을 수 있는 수단 같은게 있는 건 아닐까? 조심해 둘 필요가 있군.’
조제성은 미드가르드의 두려움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현대 사회를 바꾼 가장 큰 발명이라면, 조제성은 단연 컴퓨터, 곧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발키리가 존재했다. 전자 두뇌는 아니지만, 능히 현대 세계의 컴퓨터를 능가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처음엔 도리깨로 내리쳐서 지뢰를 폭발시켰지만, 잠시 후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발키리를 통해서 알아내고는 모두 캐내서 따로 보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조제성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지뢰처럼 생긴 원격 폭탄을 이용해서, 그들이 모아놓은 지뢰를 모두 유폭시켜서 거인 두명을 추가로 해치우고 지뢰가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에서 사용된 모든 병기의 정보가 적에게 들어가게 되는 거로군. 더 조심할 필요가 있어.’
죽여서 입을 막는 것은 에인페리아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죽자마자 바로 그 정보를 적의 본진에서 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뢰가 안되니, 클레이모어도 무리로군. 그렇다고 대물 저격총이나 대포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가 나서도록 하지요. 곤란하신 듯 하니.”
“시간 정도라면 벌 수 있습니다.”
그렌과 미라엣이 나섰다. 사람들이 모두 피난에 나선 만큼, 피난민을 규합하는 그들의 역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전투 경험도 많고, 능력도 뛰어났다. 그리고 이제 프레이아의 에인페리아가 된만큼 죽어도 되살아 날 수 있었다. 부활에 들어갈 신성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더 중요했다.
“그렇군. 희연양. 그렌과 미라엣과 함께 싸워주기 바라네. 지휘는...”
“여보, 아니 히엔양으로 충분합니다.”
그렌이 여보라고 말을 꺼냈다가, 희연의 눈살이 찌푸려지자 히엔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불렀다. 그나마 여보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희연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렌님 쪽이 좋다고 생각되는군요.”
희연의 답에 조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이 말을 꺼낼 거라고 보고 살짝 기다린 것은 조제성의 노련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크엘프 병사들을 지휘해서 거인들의 진격을 맡는 것은 역시 지휘 경험이 중요할 듯 싶군. 그렌과 미라엣, 자네들 중 누군가가 맡아주게.”
엄청난 연상일 것이 분명한 둘을 상대로 조제성은 거리낌없이 하대했다. 그는 권위와 서열이 인간이 조직으로서 협력해 나가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렌과 미라엣도 그것을 알기에, 조제성의 태도와 명령을 받아들였다.
미라엣도 그렇지만, 그렌은 프레이야 진영에 참가하기로 결정내린 다음부터 프레이야 진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틈틈이 관찰과 분석을 해왔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프레이야 진영을 하나의 생명체라고 볼 때, 그 대뇌에 해당되는 것이 조제성이라는 인물이었다.
물론 심장은 프레이야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소뇌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장수한이고,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 나머지 인물들이었다. 트리아 여제 역시 손발에 해당되는 존재로 볼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카드는 바로 이 히엔이라는 아가씨로군.’
그렌은 희연을 신기한 무언가를 보는 눈빛으로 새삼스럽게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미라엣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눈빛이 희연에게는 살짝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이미 레벨이 많이 떨어져서 약해진 탓이었다.
죽은 후, 레벨이 추락하는 증상을 블러드 라인에서 삭제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블러드 라인의 개발진이 십수차례 바뀌면서, 누구도 해독할 수 없은 암호보다 더 고약한 물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 개발자들을 다시 모아들여서, 어떻게든 복원하려고 해봤지만 실패로 끝났다. 개발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성이 강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많아서, 모아놓으면 답이 안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유명한 게임 엔진 같은 것은 천재 한사람이 이끄는 소수 정예의 개발팀이나, 천재보다 드물다고 일컬어지는 협조성 뛰어난 개발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극히 레어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블러드 라인은 그런 레어한 물건이 아니라, 적당히 개발하면서 만들어진 땜빵의 집합체 같은 물건이었다.
결국, 조제성 역시 두손 들었고, 현재는 접속하고 있으면 조금씩이지만 자동으로 경험치가 부가되는 시스템을 추가하려고 작업 중이었다.
차원을 연결하는 거울은 본래 신전의 핵인 세계수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러드 라인에서 차원을 연결하는 거울이 작동하는 것은 굉장히 기이한 일이었다. 조제성과 장수한을 비롯해서 원기 역시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동접자의 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서버를 점검하는 동안, 거울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엘프 총사대가 60명에서 멈추게 된 것도 실은 그 이상의 숫자가 되면 거울을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게임 캐릭터가 미드가르드나 현실에서 육체를 얻는 것 자체가, 게임에 접속한 인간들의 정신 에너지를 빌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예측이 있었다.
인공지능의 업글을 통해서 많은 유저들을 유치하고 덕분에 상황이 좋아진 만큼, 어떻게든 동접자들을 다수 확보하고 유치할 필요성이 있었다.
인기가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들을 고용해서 게임을 시키는 백업 플랜까지 조제성이 짜고 있기는 하지만, 수십만 단위의 유저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문에 블러드 라인을 어떻게든 인기 게임으로 만들어나가고 유지하는데에도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요? 일시적으로 약해졌다지만, 얕잡아 보는건 사양하고 싶네요.”
미라엣에겐 몇 번이나 궁지에 몰렸던 만큼, 희연은 지고싶지 않은 기분에 뻣뻣한 태도를 취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검의 여왕을 얕잡아 볼 수 있는자가 누가 있을까.”
“틀림없어요. 그건 그렇고 정말 믿지 못할 일이군요. 토르의 해머를 일곱번이나 얻어맞은 에인페리아가 존재할 수 있다니.”
미라엣이 감탄하며 말했다.
“비웃는 건가요? 그건 누구라도 피할 수 없어요. 당신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텐데요.”
희연은 발끈하며 말했지만, 그렌과 미라엣은 감탄을 금치 않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오해하지 말게. 비웃으려는 건 아니야.”
“우리가 토르의 해머에 얻어맞는다니, 상상할 수도 없군요. 원래는 ‘에인페리아따위’를 노리고 토르의 해머를 날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상대를 눈빛으로 제압하는 이능이라니, 정말 엄청난 일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그런 이능을 얻을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군.”
이능은, 간절한 염원만으로 개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장기와 자신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적당한 수준의 염원이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투명인간이 되고싶다’는 염원은 아무리 강렬해도 이뤄질 수 없었다. 이능의 차원에서 얻어질 수 있는 힘을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날 찾는 저 사람이 날 못보고 지나쳤으면...’이 정도 수준의 염원이 이능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추가로 자신이 눈에 띄지 않는 존재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지 않으면 얻기 힘든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 원하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능력, 아무리 사소한 이능이라도 막상 얻어진다면, 그 활용가치는 어마어마한 경우가 많았다.
원치 않는 듯 하면서도, 간절히 본능적으로 원하며, 자신의 재능과 맞아줘야 얻어지는 이능이었다.
희연의 경우 쪼렙 학살이 얻어진 이유는 ‘약자를 상대하는 것이 귀찮아 죽겠어. 강한 자, 승부가 되는 자와 싸우고 싶어’라는 염원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원하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기 힘든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희연이 전쟁을 안해봤기 때문에 얻은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자각할 수 없었을 능력이기도 했다. 그녀는 상대가 안되는 이와 검을 겨룰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고, 설령 겨루게 되었다고 해도 실력 차이 때문에 상대가 맥을 못췄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희연은 그렌과 미라엣이 진심으로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토르의 거인 기사들을 생각하면, 그들로 대처할 수 없는 에인페리아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렌의 괴력이나 미라엣의 바람의 거인은 거인기사들로 대처할 수 없는 능력은 아니었다. 작고 날렵한 몸매로, 적군들 사이를 누비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토르의 해머를 사용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토르의 해머를 한번도 아니고, 일곱번이나, 그것도 망설임없이 등장하는 족족 사용하게 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실제로 미라엣님에게는 여러차례 곤경에 빠졌었고 말이지요. 상성 문제라고 생각해요.”
“일단 히엔양의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서로 유감은 있겠지만, 힘을 빌려줬으면 좋겠네. 프레이야님을 위한 일이니 말일세.”
그렇게 말하며 그렌은 손을 뻗어왔고, 희연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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