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협력플레이
희연의 능력, 쪼렙 학살은 ‘약자를 깔보는’ 강자의 시선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철저한 약자에 대한 무시,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이능을 일깨우는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된 전쟁을 경험해 본 에인페리아들이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능력이었다.
전쟁은 ‘수’가 ‘물량’이 절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약자라도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으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반면, 스포츠로서의 무도, 게임으로서의 무도에 있어서 약자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했다. 적에 약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기기는 쉬워지고, 시시해지는 것이다.
반면 전쟁에서는 아무리 약자라도 무기를 든 아군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만큼 강해지는 법이다. 사기도 올라가고, 적어도 적의 힘을 빼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약자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기에, 자신의 강함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기에, 그저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긍지가 있기에 그녀는 쪼렙을 가볍게 학살할 수 있는 특수 이능을 얻은 것이었다.
반면 전쟁터에서 일개 소년, 소녀 병사부터 시작해서, 전쟁 속에서 단련되어 에인페리아로 발탁되온 미드가르드의 에인페리아들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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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들리나?”
“예. 다수의 인간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굉음을 울리며 이동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군요.”
“거리는?”
“약 오 분 거리 정도 남았습니다.”
밀레니아는 부하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다크엘프들의 무리야 말로 그녀가 노리던 목표였다. 이미 본전 찾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그녀는 물론이고 토르 신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에게 농락만 당하고 끝날 수는 없었다. 적에게 쓴 맛을 보여주지 않고는 돌아설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충분히 쓴 맛을 보여줄 수 있을 터였다.
‘슬슬 마지막 발악이 나올 때가 되었군.’
과연 그녀의 기대대로, 엘프들의 무리들이 등장했다.
“여, 그렌 아닌가. 오랜만이군. 미라엣도 있었네.”
그렌과 미라엣, 그리고 밀레니아는 같은 아스신족의 군대로서 서로 안면이 있었다.
“적으로 만나게 되어서 유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반갑지 않아? 우리가 너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기억나지 않나?”
밀레니아의 말에 그렌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반갑군그래. 정말로. 너희들과 붙게 되서 정말 기쁘군.”
그렌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토르의 군세, 특히 거인 에인페리어들은 전쟁에서 말 그대로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렌이 거인과 맞먹는 강한 힘으로 적들을 해치운다고 해도, 덩치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전쟁에서 다수의 적을 해치우는, 아니 학살하는 능력은 따를 수가 없었다.
미라엣의 바람의 거인도 적을 제압하는데는 쓸모가 있지만, 다수의 적을 학살하는데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다크엘프의 군세는 인간들의 군세에 비하면 소수의 게릴라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프레이는 많은 것을 굴욕적으로 양보하며 살아야했고, 다크엘프의 군대는 토르의 군세 같은 강력한 세력들에게 차별받고 무시당했으며, 위험한 정찰임무를 주로 맡아야만 했다.
특히 병력을 던져버리듯이 다크엘프들을 돌아올 수 없는 정찰에 많이 써온 이들이기도 했다.
밀레니아는 나름 잘 대해줬다고 여기지만, 그렌과 미라엣은 원한에 가까운 복수심을 억누르며 지내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쓸모없는 다크엘프들을 영광스럽게 전사할 수 있게 해줬는데, 감사는 못할망정.”
“그랬지. 너희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했지. 야만적인 두발짐승들.”
반족의 신으로 부터 비롯되어 동료들을 잃는 것을 슬퍼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다크엘프들과,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영광이라고 가르치는 아스 휘하의 인간족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희연은 그렌의 곁에서 전장을 살펴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렌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밀레니아의 눈은 그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희연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그렌은 그것을 깨닫고 내심 고소했지만, 적이 두려워하는 카드가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 전투에는 엘프 총사대들 뿐만 아니라, 엘프와 다크엘프의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프레이야 여신과 조제성의 당부는 간단했다.
희연과 총사대는 죽어도 상관없다. 한명도 아끼지 말고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주고 시간을 끌어라. 그렌과 미라엣, 둘은 되도록이면 죽지 않도록 하라. 부활하는데 신성력이 소모되니까. 그리고 다크엘프와 엘프 병사들은 한번 잃으면 돌이킬 수 없으니, 최대한 잃지 않도록 노력하라.
‘쉬운 듯 하면서 까다롭군.’
그렌은 장수한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사령관보다 하급병사를 소중히 하는 황당한 지휘를 펼쳤고, 그 덕분에 사령부가 궤멸되어 하급 병사들의 피해가 커진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시간 벌기에 너무 어울려준 것 같군. 가라! 적들을 섬멸하라!”
밀레니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거인 기사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격했다. 엘프들과 다크 엘프들이 화살을 날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에인페리아는 기본적으로 신관,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체격에 비하면 화살이 작아서 설사 박힌다고 해도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렌은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그를 향해 거인 기사의 도리깨가 떨어졌지만, 청룡언월도를 이용해서 힘있게 쳐냈다. 5개 달린 봉 중 하나가 그렌의 몸통을 두들겼지만, 단단한 갑옷과 근육 덕분에 비틀거리면서도 상대 거인의 몸통에 청룡언월도의 일격을 먹였다. 체격에 맞게 두꺼운 갑옷 덕분에 청룡언월도는 갑옷을 베지 못했고, 우그러지게 만드는데 그쳤다.
서로가 한걸음씩 비틀거리며 물러났고, 다른 거인이 다시 뛰어들었다.
‘두 세명 상대하는게 고작이로군. 그나마 밀레니아가 아니라서 버틸만한데...’
그렌은 싸움 중에 살짝 눈을 돌려서 전황을 살폈다. 밀레니아의 관심사는 그렌이 아닌, 희연에게 있었다.
‘굉장하군. 약해진게 아니었나?’
그리고 희연의 곁에는 목이 날아간 거인 기사의 시체가 두 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하나가 날아갔다.
바로, 미라엣과의 컴비네이션 덕분이었다. 과거 전투에서 희연을 꼼짝 못하게 짓눌렀던 바람의 거인이, 희연의 발판이 되어 준 것이었다. 희연은 지면에서 싸우는게 아니라, 거인들의 목 높이에서 허공을 뛰어다니면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인간 크기의 적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거인들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다크엘프 계집을 죽여라! 그 계집이 없으면 검의 여왕도 쉽게 우릴 상대할 수는 없다!”
밀레니아는 그렇게 외치면서 먼저 미라엣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희연을 노리는 것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안면과 목만 보호하면서 미라엣을 노리고 거인들이 움직이자, 희연도 쉽게 거인기사들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실제로 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소환몹 불여우도 충성도가 바닥난데다가 레벨이 다운되서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라엣 역시 노련한 에인페리아였고, 거인 기사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이라면, 어느정도는 가능했다. 그녀는 부지런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거인 기사들을 몰아댔다.
“지금이다! 별동대는 진격하라!”
밀레니아의 명령과 함께, 거인 기사 다섯기가 무서운 속도로 프레이야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서 뛰어나갔다. 그것을 본 미라엣이 당황했고, 그 잠시의 망설임을 놓치지않고 밀레니아의 도리깨가 미라엣을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 희연 역시 지면에 떨어졌고, 거인 기사들의 무시무시한 도리깨 공세에 결국 박살이 나는 꼴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단신으로 거인 기사 세 명을 상대로 분전하며, 한명의 다리를 분지르는데 성공한 그렌도 밀레니아의 도리깨에 희생자가 되었다. 그렌의 강인한 체격과 두꺼운 갑옷 덕분에 밀레니아의 무시무시한 도리깨를 수십차례나 맞아서 깨져 죽어갔다는 점이 미라엣과 희연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키고 싶은게 있는 자들은 토르 근위 군단의 적이 될 수 없지.’
밀레니아는 그렇게 미소를 지었지만,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희연이 꽤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라엣과 함께 나선 것 만으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토르의 해머가 없었다면, 자그마치 일곱 번이나 쓰지 않았다면, 토르가 자랑하는 최강의 에인페리아 군단이 허무하게 사라질 뻔 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의 설욕을 풀 기회가 왔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서 돌격하라!”
밀레니아의 명령에 거인기사들이 광기까지 엿보이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 앞에 거북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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