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여신강림
프레이야, 아니 프레이야의 인격을 이루는 원기라는 캐릭터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뿌리깊은 이중성의 원인은 끔찍한 사고였다. 화상으로 인해서 손가락이 오그라붙고, 각막이 상해서 장님에 가까운 약시가 되었고, 전신의 피부가 깊은 화상을 입어서 진통제로도 가라앉히기 힘든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원기라는 소년의 성격은 크게 어긋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 결코 그들이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그저 살아있는 고기덩어리가 되어 고통속에서, 그저 죽기만을 바라는 끔찍한 지옥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여길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범인이 갖기 힘든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터였다.
동시에, 그는 세상을 저주했다. 자신은 병실에서 끔찍한 고통과 절망과 싸우며 소외되어 죽어가고 있는데, 밝은 태양 아래서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 모두를 질투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자신들의 건강과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큰 축복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증오스러웠다.
그는 진심으로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고통받는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하는 고통받는 이들의 이해자이자, 고통없이 밝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통을 안겨 주고 싶은, 질투에 휩싸인 증오자이자 복수자가 바로 원기라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가 눈뜬 이능이 적에게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능력인 것은 한편으로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뿌리깊은, 병적인 뒤틀림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 대한 헌신과 적대자에 대한 광기어린 증오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전대 프레이야를 감동시킨 게임속 세상을 만들도록 한 것이기도 했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갈등없는 멋지지만 일그러진 세상, 게임으로서 그보다 더 시시한 것은 없을터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최대한 몰아라! 몰아서 효율적으로 죽이는 거다!”
밀레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연시 도리깨로 바닥을 후려쳤다. 다크엘프의 아이들과 노인들이 몇명씩 박살이 났다. 하지만 겁에 질려서 기어가듯이 뛰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인 기사들의 특기라고 할 수 있었다. 거대한 거북 괴물을 보는 순간, 밀레니아는 토르의 해머를 청할까 생각했으나, 주위에 있는 피난민들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인들은 싸우면서 아군이 밟히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거대한 거북 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패죽이면서, 패닉에 빠진 적들을 몰아서 도망치지 못하게 일망타진하는 학살 수법은 토르의 거인 기사들에겐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거북 괴물은 허우적대면서 거인 기사들에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피난민들을 어쩌지 못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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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정하지 못한 사태입니다. 적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화염 방사기로 지져버려!”
[피난민들의 피해가 예상 됩니다.]
“상관 없다! 당장 화염방사기를 사용해!”
조제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거북 전차를 맡고있는 발키리는 그 명령을 받아들였으나, 거북 전차가 불을 뿜는 일은 없었다.
“왜지?”
[프레이야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치잇.”
조제성은 이를 악물었다.
“별 수 없다. 2호차를 분리해서 이탈시켜라.”
[역시 피난민의 피해가 예상됩니다.]
거인기사들은 마치 양떼를 모는 목양견들처럼 피난민들을 몰아서 거북 전차의 주위를 감싸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화학가스, 화염방사기, 클레이모어, 자폭장치 등 거의 모든 공격 시스템이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인 에인페리어들은 총탄 같은 무기에 대한 신성 방어까지 갖추고 있었다.
“상관 없어. 최우선 명령이다! 당장 2호차를 분리시켜서 탈출 시켜! 피난민들 따위 깔아뭉게도 상관없다.”
조제성에겐 프레이야의 안위 말고 중요한 것은 없다.
[안됩니다. 2호차의 문이 열리고 프레이야님이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프레이야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은 불가능합니다.]
조제성은 통신용 마이크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잠시 머리를 쥐어 뜯다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신이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여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여신의 본질이겠지.’
프레이야가 금고와도 같은 2호차의 문을 열고 밖을 나오는 순간, 피난민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거인 기사들의 시선도 모두 한 곳에 집중되었다. 끔찍한 참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일순간의 고요가 찾아왔다.
“프, 프레이야?”
프레이야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던 밀레니아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 사이즈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토르에게서 느껴지던 권위와 위엄이 몇배는 강하게 그녀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프레이야는 피난민들의 먼지와 피, 눈물로 얼룩진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하는 자들과 시신조차 산산조각난 피와 살점의 덩어리들을 보았다. 마치 놀이를 하듯 즐기며 피를 뒤집어 쓴 거인들의 모습도 눈에 담고 있었다.
‘공격 명령을 내려야 해.’
밀레니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감히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가진 여신이라는 존재가 생소함과 당혹감,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을 안겨 주었다.
‘토르, 토르님이 해머를 던져 주시면...’
그렇게 생각할 때, 하늘 위에서 폭음과 함께 붉은 빛이 번쩍이며 퍼져나갔다. 밀레니아는 그것이 토르의 해머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토르의 해머는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운석이었고,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영역을 지닌 신전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프레이야는 걸어다니는 신전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밀레니아 뿐만 아니라, 토르도 오딘도 깨달았다. 프레이야의 주위 50미터는 레벨 5 이상의 성역이고, 주위 1키로 이상이 3이상의 성역이었다. 1키로 상공에서 신성력을 상실한 토르의 해머는 마치 유성과도 같이 붉은 빛을 발하며 공중에서 분해되어 사라져 버렸다.
‘젠장. 궁그닐도 통하지 않겠군. 간단히 제거하는건 쉽지 않겠는걸.’
프레이야의 모습을 지켜보던 오딘은 혀를 찼다.
‘아니지. 멍청하게 거인 에인페리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찌되는지 두고 봐야겠지.’
오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때, 프레이야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주위에 검들이 솟아 올랐다. 발키리칩을 장착한 검들이었다. 발키리가 들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완전히 검 안에 빙의하는 형태가 위력도 높아질 뿐 아니라, 발키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방비가 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죽여 버려라! 전원 돌격!”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밀레니아가 명령을 내리며 앞으로 뛰어나섰다. 그때, 검 중 하나가 밀레니아를 향해 날아왔다. 밀레니아는 검이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도 외면하고 돌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거인들에게는 이쑤시개보다 조금 큰 장난감 같은 물건이었다. 설령 맞는다고 해도 별 타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검은 그녀의 겨드랑이 부근을 파고들어갔다. 조금 따끔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갑자기 밀어닥친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에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비명이 나오질 않았다. 숨이 넘어갈 듯 해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눈이 하얗게 돌아가고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그녀는 확실하게 죽어갔다.
“밀레니아님!”
거인 기사 하나가 당혹해서 외치고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보고 황급히 도리깨를 휘둘렀다. 하지만 검을 맞추는 것은 무리였다. 마치 목검을 들어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느리고 둔중한, 도리깨는 작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검을 당할 수 없었다. 뒷 목 부분에 따끔한 것을 느낀 그는 황급히 도리깨를 던지고 검을 잡으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검은 그의 피부 속으로 파고 들어갔고, 그도 역시 밀레니아처럼 비참하게 죽어갔다. 차이가 있다면,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갔다는 것 뿐이었다.
거인 병사들은 당황했다. 작은 검인데, 꽂히기만해도 죽어버리는 상상도 못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의 공격은 왠만하면 몸으로 받아 내고 적을 섬멸하던 그들이었기에 마땅한 대처 방법이 없었다. 블러드 라인에서 닭들과 싸우며, 3차원 입체 기동에 대해 심도있게 배운 유저들이라면 모를까,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거인들에게는 막아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차례차례 거인 기사들은 고통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에인페리아이기에 다시 부활해서 전장에 투입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라는게 무엇인지 맛본 만큼 어느정도는 망가졌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스, 스스로 거인을 죽이는 검이다!”
다크엘프 중 하나가 감격해서 외쳤다. 프레이의 상징이었던 스스로 거인을 죽이는 검, 이미 라그나로크로부터 천년 이상 보거나 들은 이가 없었기에 프레이야의 발키리 판넬 소드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환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야가 눈물을 흘리면서 쓰러진 다크엘프 소년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도리깨에 스쳐서 얼굴 가죽 일부가 날아간 소년이 울면서 누나를 찾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죽어가는 흉측한 몰골의 소년을 안은 프레이야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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