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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111화 (111/497)

111화 조우

귀환하는 길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 다크 엘프 피난민들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해 보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다보니 피난길 도중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더러 나왔지만, 정령화라는 것이 그들에게 미소를 안겨 주었다.

장례절차는 극히 간단했고, 시신을 처리할 필요도 없었다. 정령이 된 이가 자신의 유품을 어떻게 처리할 지 알려주고는 자신의 혈육이나 친한 이들과 계약을 맺고 정령이 되었다.

“정령의 활용에 대해서 연구 중이긴 한데, 좀 어렵긴 어렵네.”

장수한이 다가와서 말하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이번 일이 있은 다음, 조제성의 심경에 변화가 온 듯 장수한이 평소 원기에게 하듯이 프레이야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물론 프레이야가 편하게 말하자고 한만큼, 장수한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압박을 줬기 때문이었다.

정령의 창조에 이르는 과정 그 자체가, 조제성의 마음 속에 충성심을 신앙심으로 변화시킨 부분도 없지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원기에게 그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신 행세하면 그저 즐겁기만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게임속 백성들이 신을 찾고 환호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마치 반에서 꼴등하던 학생이, 멋대로 찍은 시험에서 만점을 맞아 전교, 아니 전국 일등을 하게 된 것과 비슷할 터였다.

성적이 좋게 나오면 칭찬받고, 자랑도 하고 신날 줄 알았는데, 주위에서 밀려오는 기대감에 짓눌려 버리고, 기대에 응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과 한심함에 눌려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의 눈빛은 때로, 예리한 칼날보다도 더 날카롭게 가슴에 박힐 수도 있는 것이었다.

태생 엘프인 트리아 여제나 리디아는 프레이야의 존재 자체가 뇌리에 깊이 박혀 있어서, 결코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반면 조제성이나 장수한은 좀 달랐다. 그들은 프레이야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원기의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공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제성과 장수한에게 정체가 밝혀 졌을 때, 원기는 내심 잘되었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극소수였던 이해자 중 하나가 열성적 추종자로 변했고 그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변했다.

한가지 다행한 점이라면, 장수한은 판타지 매니아라 프레이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 점이고, 여전히 어느정도는 객관적인 입장을 지켜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역시 덕이 부족해.’

장수한과는 나이 차이도 있고, 관심사도 어느정도는 차이가 있었다. 연하와 희연은 마음 편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라고 말하기엔 역시 어려움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조제성에게 조금 무리해서라도 찬균과 호철을 포섭해 달라고 부탁해 둔 상태였다.

사고 난 이후로 처음 생긴 친구들이었다. 사고 전의 원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사고 후에 컴퓨터만 쓸 수 있게 된 다음에는 게임과 애니 등에 빠져서 살았다. 현실 도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희망도 미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보고 들은게 같으니 이야기 나눌 거리도 많았다. 게임을 하는 것도 재밌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재밌었다.

‘조제성 사장님이라면 잘 처리 할 수 잇겠지.’

“그런데, 정령을 이용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하아. 그게 말이지. 의지력이라는걸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거야. 타고난 의지력은 조금씩 다르긴 한데, 그걸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를 모르니. 의지가 없으면 정령이 힘을 발휘할 수 없더군.”

이를테면 불꽃의 정령인데, 의지가 담기지 않으면 뜨겁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상대를 태우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마른 종이 한장도 태울 수 없었다.

“다만, 감정하고는 좀 연결이 되는 것 같더라. 분노와 불의 정령이, 슬픔과 물의 정령이 이어지는 것 같아. 유쾌하달지 변덕스러우면 바람의 정령과 상성이 좋고, 완고하거나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이 땅의 정령력과 이어지는 듯 한데, 힘을 쓰면 각종 감정이 줄어들어서 다 시시해지는 모양이야.”

‘시시해. 아무래도 좋아. 내가 알게 뭐냐.’라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상태가 의지력을 전부 소모한 상태였다. 화살이 날아와도 내가 죽든 살든 별로 다를게 뭐냐는 것처럼 달관한 상태가 되어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회복은 의외로 간단해서, 세네시간 자고 일어나면 어느정도 의욕을 되찾는 듯했다. 문제는 위력인데 그다지 높지 않았다. 무기력증에 빠질 때까지 불덩어리를 다섯 발 정도 날리는게 보통인데, 한발 한발의 파괴력은 상대가 뜨겁다고 여기면서 가벼운 화상을 입는 정도였다.

“간단히 말하면 뜨거운 커피 다섯 잔 정도 날리는 거지. 라면이라도 끓이려면 한 열 명 모아놔야 할거야.”

“그럼 거의 쓸모가 없는거 아닌가요?”

“그런데, 부작용이 꽤 쓸모있다고 하더라. 조제성 그양반 정말 그런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

“부작용?”

“그래. 열 잘받는 놈이 열받을 때, 불의 정령으로 커피 한 석잔 끼얹고 나면 화가 풀려.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지. 물의 정령하고 계약하면 시원한 음료수 한잔 만들면서 슬픔을 극복할 수 있지. 우울증 문제는 해결될거야.”

“그럼 전투에는 도움이 안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 일단 커피 한잔 끼얹는 정도라고 하지만, 검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얼굴에 한방 맞으면 상대방은 꼼짝 못하고 죽게 되겠지. 그리고 추울 때 커피 한잔은 데워 먹을 수 있을거야.”

정령은 의지가 없지만,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알아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두 방에서 세 방 정도를 누구나 전투중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전투력 상승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계약자와 의지를 공유하기 때문에, 정령은 계약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읽고 그에 맞춰서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물론 생전의 전투 기술이나 센스가 영향을 미치는 만큼 처음부터 완벽한 공격을 해주진 못하지만, 전투 경험이 누적되고 여러 기술을 학습해 나갈 수 있다는 면에선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

보통 다섯 번 정도 사용이 가능하지만, 전투 중에 세 번 정도만 사용해도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전투 의욕이 떨어지면 쉽게 피곤해지고, 삶을 달관해 버리기 쉬웠다.

“뭐, 가장 큰 도움이 된다면 정찰 능력이겠지.”

지뢰를 완전 무력화 시켜버린 발키리의 정찰 능력처럼, 계약자의 의지를 나눠받은 정령은 주위의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수십미터에서 수백미터 가량을 정찰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 경우에는 의지력의 소모가 통상의 두배 정도이지만, 전쟁터에선 몸이 피곤해지는 경우가 더 많아서, 활동시간이 조금 줄어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두 명이 번갈아가면서 정령으로 정찰을 시키면 별 어려움없이 풀타임으로 정찰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으므로 도청이나 감시 같은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같은 정령이나 발키리에게는 즉시 들키게 되는 문제가 있어서 사용 범위는 살짝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외에도 조제성 사장도 나름대로 정령을 활용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발키리 칩의 대용품으로 정령 칩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다만 발키리는 프로그램에 가까운 존재라면, 정령은 속성을 가진 유령에 가까운 존재이며, 계약자에게서 멀어지면 그만큼 의지도 약해져서 효율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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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이 가진 이능은 여신님의 은총으로 얻어진 힘이지.”

“이능? 초능력 비슷한 걸 말하는 건가요?”

“저한텐 그런 거 없는데요?”

조제성은 찬균과 호철을 보면서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자신에게 특수한,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찬균은 눈치챈 듯 했지만, 호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정말 내가 이해하기 힘들군.’

돈이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많으면 좋지만 딱히 그걸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분위기였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거나 구하고 싶다는 의욕도 없었다.

바라는게 없으니, 줄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여신님께 충성한다면, 엘프들과 다크 엘프들과 사귈 수 있을거다. 여신님의 계약자들은 엘프들이나 다크 엘프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지. 엘프들은 너희도 본 적이 있을거다.”

조제성이 그렇게 말하며, 인터폰으로 호출하자 엘프하나가 본 모습으로 나타나서 커피와 과자를 놓고는 물러났다.

“헤에. 진짜 엘프다.”

“그러네.”

찬균과 호철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장수한처럼 열광적인 반응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좀 난감했다.

“여신님은 너희가 원하면, 너희 이상형의 여성을 만들어 주실 수도 있지. 거기에 너희에게 배속된 발키리가 깃들면 너희에게 순종적이고 무슨 짓이든 가능한 이상적인 여성이 주어질 거다.”

조제성은 내심 달갑지는 않았지만, 최후의 카드라고 생각한 카드를 내밀었다. 발키리는 감시자로 설정해두지만, 원기가 특별히 채용하고자 하는 두 사람인 만큼 그정도 편의는 가능했다.

“아,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대단하네요.”

‘뭐지. 이 놈들은. 고자인거야? 아니면 게이?’

“흠흠. 꼭 여성이 아니라도 괜찮아. 남성의 육체에도 들어갈 수 있지. 마초에서 미소년도 가능하지. 취향은 어느쪽이지?”

그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확실하게 냉랭하게 바뀌었다.

‘이쪽은 아닌가?’

“성별이 자유롭다는 이야기를 한 것 뿐일세. 그래. 연령도 자유롭지. 육체 연령 설정이 자유로우니까 범죄의 영역에 가까운 것도 가능해.”

그와 함께 방안의 공기가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잠시 적막속에 침묵이 흘렀다. 마침 그때 정적을 깨듯이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지?”

“남미 쪽에서 리디아님의 연락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다. 연결해.”

어차피 찬균과 호철에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반 강제적인 동의는 얻은 상태였다. 발키리들도 이미 곁에 배치된 상태인 만큼 큰 문제는 없을터였다.

“무기의 건인데요. 저격용 라이플이 부족한 편이에요. AK-47은 남아돌고 있으니, 무기고에 보관하시고 저격용 라이플을 좀 보내 주세요.”

“에? AK-47? 저격용 라이플?!”

심봉사가 눈을 뜨듯이 호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반응은 조제성이 미처 생각치 못한 것이었다.

“판타지 세상 이야기 아니었어요? 왠 총이 나와요?”

조제성은 그 순간 호철이 밀리터리 매니아라는 사실과, 묘하게 침착했던 태도가 납득이 갔다. 차원이동 판타지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게임에 익숙했던 호철은 현실감각 없이 그냥 반쯤 흘려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의례히 검과 마법의 세계로 갈거라고 막연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의 역할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엘프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맞게 될걸세. 계약자 가운데는 SAS출신도 있지. 원한다면 자네도 총을 들고 싸울 수 있을거야. 물론 여신님의 가호가 있으니 죽어도 죽지 않네. 무한 컨티뉴가 가능하지.”

“우와! 게임의 세계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 상황에서 꿈이 아니라 게임을 이야기하는 호철의 모습을 보면서 제성은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긴 그는 찬균을 설득할 간단한 방법을 깨달았다.

“자네. 이게 뭔지 알겠나?”

조제성이 최찬균에게 넘긴 것은 여신상이었다. 드워프가 정교하게 조각하고 채색한 아름다운 여신상이었다.

“오옷! 이 피규어 어디서 났어요? 질감을 보니까, 나무네? 원형사가 누구지?”

“드워프일세. 자네를 위해서 자네만의 피규어를 만들어 주는 건 일도 아니지. 자네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주문대로 만들어 줄걸세.”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제성 자신이 유혜서에게 병적으로 집착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들도 심각하게 병적이었다.

“그런데, 여신님의 이름이 뭐지요?”

“이런, 자네들이라면 알 줄 알았네. 여신님의 이름은 프레이야님이시지. 북구 신화의 여신이시네.”

“프레이야 여신님인가요? 프레이 형님이랑 비슷한 이름이네.”

“아, 그러고보니 프레이 형님이 맨날 하던 이야기랑 비슷한데. 프레이 형님 설정 쩐다.”

“프레이? 프레이라고 했나? 어디서 그를 만났지?”

조제성은 찬균과 호철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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