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새로운 신화, 막을 열다.
“으...도착한거야?”
원기는 희연의 오토바이에서 비틀거리면서 내렸다. 토할 정도는 아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연하가 왜 미쳤다는 소리를 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가 미쳤지.’
처음 희연의 뒷좌석에 앉을 때는 차마 허리를 안지 못하고 뒷쪽 짐받이 부분을 잡았다. 하지만 그게 만용이라는걸 깨달을 틈도 없었다. 희연은 시동을 걸고 몇번 엔진을 회전시킨다음, 바로 윌리를 시전해서 출발한 것이었다. 다짜고짜 앞바퀴를 들면서 출발하는 통에 허겁지겁 희연을 끌어안고 차마 비명은 못지르고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타고왔다.
“나 앞으로 그냥 겁쟁이 하는게 좋겠어.”
객기는 부려선 안된다는 것을 원기는 절실하게 느꼈다. 희연은 그런 원기를 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검을 휘두르면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녀는 승패에 집착하는 병이 있었다. 그리고 희연이 짓고있는 승리의 미소를 보면서 원기는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내심 희연에게 ‘강한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만큼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게 아쉬웠지만, 희연이 모는 오토바이는 어떤 롤러코스터보다도 공포였다.
‘또 약한 모습만 보여주는군.’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낙심했지만, 희연에게 있어 자신이 ‘꼭 이기고 싶은 상대’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희연에게 있어서 ‘승부욕’은 삶의 의미라고 할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승부욕을 충족시켜줄 상대가 그다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검을 가르쳐 준 그녀의 아버지조차 이제는 안중에 없었다. 타고난 검의 재능과 수많은 실전 경험, 그리고 죽음의 경험까지 거치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원기는 알게 모르게 그녀가 인정받고 싶은 상대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원기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연하지만 단단한 몸이야.’
원기는 희연의 허리 감촉을 떠올렸다. 군살이 전혀 없는 허리와 꼭 맞는 레이싱 슈트 덕분에 그녀의 허리는 유연하지만 단단하기만 했다.
‘그런데 왜 자꾸 부드러웠던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워낙 유연해서 그런걸까?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원기가 겨우 한숨을 돌리고 기운을 차릴 즈음, 연하를 태운 승희의 차가 도착했다. 핏기가 채 안돌아온 원기의 얼굴을 보면서 연하가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하자 원기는 다시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승희의 새로운 집은 작지만 깔끔한 집이었고, 그리 크지 않지만 원기의 방도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크지는 않지만 너무 작지도 않은 그런 아담한 집.
원기는 크지 않은 자신의 방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꿈꾸던 집,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위해 만들어진 황량한 공간이 아니라, 평범한 고등학생이 편안히 느낄만한 그런 방이었다.
연하와 희연도 하루 자고 가기로 하고, 밤 늦게 통닭과 콜라를 시키고 보드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희연과 연하가 원기의 방에서, 원기는 거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자게 되었다.
승희의 집 전체가 기숙사에 있는 원기 방보다 작았다. 그리고 기숙사의 방에는 원기가 사모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했다. 가구들은 제성이 사들인 최고급 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기는 사람으로 가득찬 이 작은 공간이 ‘집’이라고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은 특별함을 꿈꾸고 특별한 사람은 평범함을 꿈꾼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희연이와 연하가 있다는 점에서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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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성이 희연과 연하, 원기의 생활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제성 에이전시였다.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될 세 사람을 위해서 급조한 모델 에이전시였다. 사장에게 주어진 최우선 명령은 세 사람이 하고 싶은데로 하도록 둘 것이었다. 돈은 못벌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사장으로 발탁될만한 유능한 인재가 돈벌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연하와 희연은 그냥 세워놓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썩히기 아까운 인재였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무기인 발키리가 있었다.
물론 발키리의 존재는 사장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 특수성을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발키리는 인간의 영혼이 빙의되는 것과는 달랐다. 자폐증에 걸린 사람이 때로 컴퓨터와 유사한 특수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발키리는 영혼보다는 컴퓨터와 비슷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움직이듯이 움직이는게 아니라, 심장의 근육까지도 전부 의도적으로 컨트롤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특성이 있기 때문에, 발키리 칩을 사용하면 어떤 기계든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발키리들의 특성이 미세 근육의 미세 조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지도만 해주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표정 연기가 가능했다. 아니, 표정만이 아니라 목소리, 몸짓까지 가능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가 뛰어난 연기 선생을 고용해서 미세한 얼굴 연기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뛰어난 얼굴 연기는 차츰차츰 그 주가를 올려서, 최근 원기에게는 ‘살인미소’라는 별명이 붙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원기가 알 수는 없었다. 희연과 연하는 워낙 미모가 뛰어나서 뛰어난 표정 연기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살인 미소’같은 별명이 붙지는 않았다.
연기만이 아니라, 노래, 춤, 모든 것이 가능한 재원을 가지고 돈 안벌어도 되니까 적당히 구색이나 맞추라는 제성의 명령은 그에게는 너무나 안타깝게 다가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 화면 좀 보세요!”
“무슨 일이야?”
“희연양과 원기군이 사고를 쳤습니다.”
사장이 화면을 보자, SNS를 통해서 승희를 비롯해 원기와 희연, 연하가 식사를 하는 사진이 올라와 있는게 보였다. 사람들이 폰카로 찍어서 올린 거였다. 스마트폰의 카메라 질이 좋아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파파라치화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었다.
“흠, 문제가 된다는게 뭔가.”
“이 사진입니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손의 위치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쯧.”
사장은 혀를 찼다. 사진에는 바이크 자켓을 걸친 원기의 손히 희연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헬멧을 쓰고 있어서 머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식당에서 나오는 사진과 헬멧을 쓰는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어서, 두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요?”
직원의 질문에, 사장의 미간이 찌푸려들었다. 그는 고용된 몸이고, 회사의 실적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사장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그는 희연과 원기, 연하가 특수하게 양성된 다중인격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게 있다면, 어떤 인격이든 그리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들이 어디있는지 알고 있나?”
“예. 원기군의 집입니다. 박승희씨 명의로 되어 있군요.”
박승희의 이름이 나오자, 사장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모기업의 최고 실력자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녀가 콧바람만 한번 불면, 그는 훅하고 날아갈 그런 처지였다.
‘그렇다고 저 보물들을 놓칠 수는 없지.’
지금까지의 삼인조는 꿈에 그리던 인재들이다. 시키는데로 말 잘듣고, 사고 안치는 이상적인 탤런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가끔들어 보이는 ‘인간적인 인격’도 그다지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차 준비해 주게. 지금 곧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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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게 저라고요? 그러고보니...”
윌리를 할 때, 오토바이에서 떨어질 듯 싶어서 당황해서 그녀를 끌어안은 기억이 났지만 어딜 잡았는지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근 이십분 정도를 그녀 등 뒤에 매달려 있었지만, 자신의 상태가 어땠는지 확인할 사치는 주어지지 않았다. 주마등만 실컷 본 느낌이었다.
“어쩌지요? 이거?”
원기의 반응에 사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장상으로 본다면 원기 쪽이 슈퍼 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이런 걸 가지고 따지느냐고 들면 그거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순종적이지는 않았지만 뻔뻔하지도 않았다.
연하는 꺄꺄 거리며 재미있어했고, 희연은 남의 일처럼 무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같이 걱정해주는 원기가 고맙게 느껴질 판이었다.
“방법은 하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 선언을 하는 겁니다.”
“예? 그건 곤란한거 아닌가요?”
“연인도 아닌데, 이런 사건이 터지면 그게 더 파렴치한게 됩니다. 요즘은 사생활을 감추기가 불가능에 가까운터라, 연인이 있는 것만으로 치명타는 되지 않습니다.”
‘인기는 왕창 떨어지지만...’
그는 쓸데없는 말을 삼켰다. 그리고 그의 본심은 ‘연하를 건지자’였다. 희연과 연하는 막상막하의 인재지만, 연하가 한살이 더 어렸다. 연예계는 어릴수록 더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일년 어리면 일년만큼 더 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연하와 막상막하의 미모에 모든 면에서 대등한 희연의 존재는 연하가 단독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셋트로 묶어야 팔리는 애들도 있지만, 희연과 연하는 단독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발군의 존재였다. 특히 발키리 상태의 연기력은 최고의 여우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삼인조로 껴있는 원기의 존재도 연하에겐 마이너스 요소였다. 초반엔 미모가 딸려서 병풍이었는데, 연기 지도를 하다보니 뛰어난 미소덕분에 부각이 되면서 은근한 스캔들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면 잘된 것일지도 몰라.’
희연과 원기를 붙여 버리면, 연하가 단독으로 뜰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연인이라니, 곤란한 거 아닌가 모르겠군요.”
“저는 상관없어요. 연인 ‘흉내’라면. 스캔들 일으킨 책임이 있으니.”
무심히 듣고있던 희연이 말했다.
“그럼 잘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걸로 발표할테니, 적어도 일 년 이상은 연인 흉내를 유지해 주세요.”
사장은 재빨리 희연의 선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스캔들이 터져서 그러는데, 연하양이 좀 더 일해줘야 할 것 같네요. 일을 좀 늘려야 하는데, 괜찮겠지요? 두 사람 몫까지 좀 더 해줘야 할 것 같군요.”
사장의 말에 연하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승낙했다. 어차피 그녀가 일하는 것도 아니고, 발키리가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게임캐릭터로 열심히 활을 쏘고 있는 동안 발키리가 무슨 짓을 하든 그녀는 별로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사장은 심각한 얼굴로 승희의 집을 나선후 만면에 미소를 가득 채우고 회사로 신이 나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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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게임 속에서 기차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일부 게임에서는 오토 캐릭을 줄줄이 끌고다니는 플레이를 기차라고도 불었다.
그리고 완성도가 낮았던 일부 초창기 게임에서는 몹몰이를 기차라고 불었다. 보통 몬스터들은 일정 거리이상 도망치면 쫓아가는 것을 멈추게 되어 있는데, 그게 제대로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인스턴트 던젼처럼 몬스터가 유저를 죽을 때까지 쫓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유저가 죽으면 다행인데 안죽고 필드 안의 몹을 수십에서 수백마리 몰고 도망치면서 눈사람처럼 불려나가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재앙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졌다.
블러드 라인의 초기 개발자는 이것이 재밌다고 생각해서, 스탬피드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5일에서 7일에 한번 정도씩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서 폭주를 하는 것이다.
전멸할 때까지 사방을 쓸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비 전투지역인 마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이런 이벤트는 렙을 올리는데 최적의 찬스로 호평이었다. 몹이 많아서 아이템은 안떨어지고 나중에 보상 형식으로 아이템이 주어지지만 경험치나 스킬렙을 올리는데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향상되면서 이건 재앙으로 변화되어 버렸다. 닭한마리 잡는데도 여러명이 한참 몰매를 쳐야 되는데, 30렙 이상되는 몬스터들 수천마리가 안전지역까지 몰아쳐서 싹쓸이를 하고 가는 것이다.
유저는 물론이고 마을 경비병, 마을 상인들, 가축들까지 모조리 전멸당하는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죽자고 뛰어서 도망치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유저들은 죽자고 도망쳐서 로그아웃 한다음에 스탬피드가 끝날때까지 기다리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원래 다양한데다가, 인공지능이 향상 때문에 정상적으로 RPG를 즐기는 사람들보다는 좀 변태적인 방식으로 즐기는 사람이 늘어난 블러드 라인답게, 스탬피드가 일어나면 아슬아슬하게 도망다니다가 밟혀죽는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마을에서 전멸당하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일명 ‘알라모 매니악’이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을 건물 한구석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문을 덜컥 열고 들어온 몬스터에게 목덜미를 붙들려서 맞아죽는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의외로 여성 플레이어들이 많이 즐기는 플레이로 ‘호러 매니악’이라고 불렀다.
그런 스탬피드가 초보 마을을 덥친 날, 블러드 라인에 새로운 신화가 쓰여졌다. 그 신화의 주인공은 동료들에게 '프레이 횽아'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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