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패러다임 시프트
패러다임, 세상을 지배하는 경향, 법칙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자면, 현세의 패러다임은 공부 잘해서 좋은 학벌 얻어 대기업에 취업하든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대세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블러드 라인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인공지능 도입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다.
고성능 인공지능 도입 전에는 평범한 온라인 RP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벨을 올려서 스탯을 높이고, 스킬을 배우면서 스킬과 레벨로 강력한 몹을 잡아나가는 흔하고 평범한 이른바 정도를 걷는 평범한 온라인 게임이었다.
하지만, 고성능 인공지능 도입 후에는 그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레벨과 스킬로는 해결이 안되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레벨을 올리거나 스킬을 배우는 것은 뒷전이 되어버렸고, 동료들과 힘을 합쳐서 격투 센스로 승부를 보는 상당히 독특하고 하드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실전 격투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비록 단련된 육체는 못가져오지만, 살벌하고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몹들을 상대로 재미있게 전투를 즐길 수 있었다.
오크는 고사하고, 마을 앞에 뛰어노는 닭과 양, 개들을 상대로 피튀기는 혈전을 벌이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독특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닭이나 양은 괜찮은 편이었다. 고양이도 쉽지 않은 상대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할만하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개들만해도 미친듯이 물려고 달려들면서 틈을 노리고 치고 들어오면 무섭기 짝이 없었다.
격투 센스가 있는 이들은 뒷골목 양아치들과 싸우면서 스트리트 파이터 놀이를 즐겼다. 동영상 형식으로 자신이 양아치들과 싸우는 것을 넷에 올려놓고 과시하는 이들도 생겼다.
사람들은 마치 이종격투기를 관전하듯이 블러드 라인을 즐기기 시작했다.
“야, 시작했다. 찍어! 오크 스탬피드라니, 이게 왠 떡이야!”
마을 경비병은 제법 고렙이다. 오크들의 평균 레벨은 50이고, 마을 경비병의 레벨은 70이다. 레벨 20차이는 결코 녹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십 배의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 경비병은 입구에 단 둘, 몰려오는 오크는 최소한 수백이었기 때문에 마을 경비병의 패배는 확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 입구가 조금 좁은 덕분에, 경비병들은 잠시나마 분전하다가 죽고는 했다.
온갖 이종 격투기를 분석해서 조합해 사용하는 슈퍼 컴퓨터가 경비병들의 AI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몬스터들과 경비병들의 싸움은 매니아들이 즐기는 볼거리이기도 했다.
게다가 인간형 몬스터의 대명사 오크들이라면, 정말 액션영화 뺨치는 액션들을 보여주는게 바로 경비병들과 오크들의 사투였다.
“오늘은 몇분이나 버텨줄려나. 5분만 넘기면 대박인데.”
경비병들은 레벨은 높지만, 단순 전사라서 스킬 종류는 일체 사용하지 못한다. 반면 레벨 50대 몬스터라면 스킬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부분의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와오! 죽인다!”
경비병들의 화려한 칼놀림에 구경하는 갤러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검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손등으로 오크의 턱을 쳐서 박살내는 등, 정말 화려하고 장렬하게 전투를 벌이는 경비병의 모습은 액션 스타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오크들도 만만치 않았다. 허리를 숙여서 태클을 하다가 무릎에 찍혀서 머리가 터지는 놈들도 나왔지만, 팔이고 다리고 붙들고 늘어져서 물어뜯는 놈도 나왔다.
16세 미만에서는 빛으로 대체되지만, 16세 이상에서는 정말 피튀기는 장렬한 유혈극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경비병들은 오크들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다.
“에이. 삼분 밖에 못갔어.”
“그래도 이정도면 대박이야. 빨리 올려야겠다.”
유저들은 자신들을 향해 밀려드는 오크들을 보면서 태연하게 잡담을 나누다가 곤봉에 맞아서 죽어갔다.
경비병들이 싸우는걸 촬영하는 사이에 마을이 포위당한 터라,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기 때문에 의례히 죽는게 일반적이었다.
마을이 쓸리면, NPC들은 약 1시간 정도면 리젠이 되지만 수리한다는 핑계로 3일간 가게들이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을 특산물을 사재기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리하는 가게 앞에서 좌판깔고 특산물파는 영업도 제법 많은 편이었다. 돈이나 아이템들이 중요하게 여겨지진 않지만, 나름 수요는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 공격하는거 정말 무서워.”
“포기하면 덜무서우니 그냥 맞아 죽어야지, 어쩌겠냐.”
유저들은 오크들의 곤봉에 순순히 머리를 들이밀었다. 괜히 저항하고 피하려고 들면, 충혈된 눈의 오크들이 죽이려고 달려드는터라, 꿈자리까지 사나워진다는 이유였다.
일반 게임에서는 평범하게 치고 받다보니,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박치기, 물어뜯기, 할퀴기를 시전하는 살벌한 인공지능 덕택에 등골이 오싹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집 한구석, 특히 옷장같은데 숨어서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엘프 전사가 오크들 한 가운데 뛰어든 것은.
“파이어 볼!”
엘프는 가까이 있는 지휘관 오크의 머리를 손아귀에 쥐면서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손 안에서 불꽃이 튀면서 지휘관 오크의 머리가 폭발했다.
“파이어 챠지!”
엘프가 외친 순간, 엘프의 몸이 불꽃으로 휩싸이면서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오크들의 몸뚱이가 불꽃과 함께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캔슬! 라이징 스톰!”
오크들을 직선으로 뚫고 나가던 그의 몸이 딱 멈추면서 역섬머솔트상태에서 양 다리가 역선풍각처럼 돌면서 하늘로 떠올랐다.
“프레이형! 받아요!”
한쪽에서 동료로 보이는 고블린 청년이 등에 매고있던 가방에서 거대한 낫을 던졌다. 그리고 프레이형이라 불리운 엘프가 하늘에서 그것을 받고는 그대로 땅에 떨어지기 전에 뒤집힌 상태에서 주위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오크들의 목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거꾸로 떨어지던 엘프가 지휘관급 오크의 머리를 짚고는 다시 파이어 볼을 사용했다. 오크의 머리가 폭발하면서 그 반동으로 하늘로 떠 올랐다.
경비병의 싸움들을 녹화하고 오크에게 순순히 죽어주려던 갤러리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번 블러드 라인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스킬은 무지 멋있다.’
건가타가 총으로 싸우는 것이 멋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처럼, 프레이형의 전투는 스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칠듯한 오크들의 러시속에서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들을 유린하면서, 스킬을 사용했다.
후에 사람들이 ‘캐디’라 부른 고블린 캐릭이 던져주는 무기로 그때그때 교체하면서 일기당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스킬을 캔슬하면서 다른 스킬과 조합해서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던 난무계 스킬로 적들을 공중에서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인간 마법소녀 캐릭이 사용하는 마법 공격으로 적들을 적당히 몰거나, 공중에 띄우면 화려한 공중 콤보로 가볍게 작살을 내버렸다.
“이, 이건 대박이야.”
“프레이 횽이라고 했나. 정말 죽여준다.”
“횽아! 횽아!”
10분가량 지났을까,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유저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유저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프레이의 화려한 무술과 스킬의 향연은 워낙 적들이 많은 터라, 아직도 끝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블러드 라인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완전 초능력 배틀이야! 진짜 지리겄네. 이거.”
“스킬이라는게 이렇게 멋진 거였어? 빨리 렙업해서 스킬 좀 써보고 싶다.”
“저렇게 쓰는게 가능하기나 한걸까?”
단순히 강해지는게 목적이 아니라, 멋지고 폼나기 위해서, 유저들은 레벨업과 스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연 오크 스탬피드의 한복판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유저 프레이는 그 ‘신의 솜씨’를 통해서 엄청난 유명인이 되었다.
덤으로 따라다니던 마법소녀 찬균과 고블린 캐디 호철도 역시 덤으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온 프레이의 화려한 배틀은, 순식간에 엄청난 히트를 올리면서 해외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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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와 고성능 스마트폰 카메라의 등장은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자동차의 블랙박스처럼, 어느날 부터인가 사람들은 스마트폰 카메라를 늘 켜놓고 다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소위 유명인들은 완전히 몸살을 앓다가, 자포자기한지 오래였다. 술집에서 술먹고 실수하는 장면 같은 것은 일상 다반사였고, 사소한 장소에서 던진 한마디 농담 때문에 매장당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런 것들이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식상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청순 가련을 내세우는 스타들이 파탄나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왠만한 것은 뉴스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희연이 뉴스가 된 것도, 전혀 그럴 이미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화제가 된 정도였다.
에이전시 사장이 희연과 원기가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공표하자, 사장의 의도대로 연하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보기 드물게 스캔들이 없었던, 삼인조였다. 그리고 혹시 연하와 원기가 스캔들을 터치는게 아는가하는 의혹이나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것이 이번 연인 선언으로 해소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의외였던 것은 희연의 인기까지도 되려 올라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가 평소에 지어온 표정의 흔적이 남았다. 그리고 연기 감독도 그런 그녀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서 날카롭고 쿨한 이미지를 살렸다. 잘 웃고 밝은 연하에겐 천진난만함을 연출시켰고, 희연에게는 차갑지만 아름다운, 아름답기에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그리고 원기에게는 따듯함과 자상함을 연출시켰다.
그런 분위기 탓일까, 원기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가게 만들었고, 바늘 하나 들어갈 만한 틈도 없어보이던 얼음여왕 희연의 이미지를 조금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윌리 스타트를 하는 동영상이 올라오면서, 우연히 벌어진 사고라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실제로 그 동영상에서 원기는 출발할 때 거의 떨어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순조롭군. 정말 다행이야.”
“사장님. 속단하기는 이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계약 취소나 제안 철회를 요청하는 업체가 늘어났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명분은 희연양의 이미지 다운이라고 합니다.”
사장은 얼굴을 구겼다. 믿기지 않을 만큼 사건이 잘풀렸고, 적어도 연하에 대해서는 플러스 효과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쇄도하던 계약 오퍼가 철회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배싱’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에이전시?”
“아니요. 아마도 모기업에 대한 배싱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성은 급격히 기업을 키워왔다. 미드가르드에서 영향력을 늘이기 위한 것이었고, 위장하기 위한 사업도 많았다. 유원지 사업이나 모델 에이전시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동차 회사의 지분, 첨단 기업이나 기술 연구소를 사들인 것도 그러했다. 명품 브랜드 사업 역시 그러했다.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엘프들과 드워프들의 인간을 초월한 감각으로 만들어낸 정교한 수제품들 덕분에 명품 브랜드를 성공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츰 기존 기득권을 장악하던 대기업들의 집중 견제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단순 물류 유통 업체가 기업의 얼굴이 될 독자적 브랜드를 갖춘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흠, 그렇다면 상관 없다. 어차피 이미지가 모든 걸 말해주는 업계야. 지금 상태라면 곧 상대가 굴복하게 될거다. 그리고 모기업의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우리 회장님이 인간으로 안보이니까.”
사장은 제성에 대한 신뢰를 보이며, 연하를 어떻게 하면 더 가치있는 상품으로 만들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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