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원기에게 신탁이 내리다.
“선물을 준다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리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희연은 아쉬운게 없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누구한테 뭔가를 받는 것이 결코 거저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남에게 쉬이 베푸는 사람은 아니지만, 남에게 받는 것을 달갑게 여지기도 않았다. 물론 사소한 선물이라면 리디아로서도 가능하겠지만, 사소한 선물은 사소한 효과 밖에는 끌어낼 수 없었다.
만원짜리 선물주고 오만원짜리 답례를 받아봐야 그리 유리할 것도 없었다.
“그러실 겁니다. 바라는게 없는 사람을 상대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능력이지요. 그건 그렇고, 리디아전하께서는 프레이야님을 독점하고 싶으신 겁니까?”
제성의 질문에 리디아는 펄쩍 뛰었다. 신을 독점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금기에 가까운 생각인 것이다. 미드가르드의 인간들에게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프레이야 여신을 섬기는 문화속에서 어려서부터 살아온 리디아에게는 감히 상상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아니요. 그런 불경한 일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전 그저 프레이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을 뿐입니다. 프레이야님께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성은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가 리디아를 밀고자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문제를 일으킬 염려도 없고, 도움이 되는 능력을 풍부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디아 전하께 도움이 될 만 한 아이디어는 좀 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희연양이 곁에 붙어있는 것은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더군요. 특히 경호에 말입니다.”
리디아는 제성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프레이야의 본체일지, 가면일지 모르는 ‘원기’라는 존재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후유증으로 사람구실을 못하다보니, ‘평범해 지고 싶다’는 욕구가 굉장히 컸다.
그렇다고 해서, 여신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신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을 지키는데 대한 집념은 리디아로서는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전대의 프레이야 여신도 엘프들을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엘프들을 숫자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전략 게임에서 일꾼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 하수요, 일꾼이든 병력이든 정찰병으로 툭툭 던지면서 게임을 하면 고수인 것과 같았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프레이야는 ‘하수’일지 모르지만, 설사 멸망의 길을 간다해도 함께 가고 싶어지는 그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최대한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는 사고방식 때문에(이미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희연이 늘 붙어있는 현 상황은 리디아로서는 복잡 미묘한 상황이었다. 감정적으로는 달갑지 않지만, 이성적으로는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못했다.
“희연양이 가까이 계신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제가 다가가기 어려워요. 제 불만은 그것 뿐이군요.”
미드가르드는 오랜 전쟁과 폭력의 윤리로 이어져온 세상이라, 성적인 면에서는 좀 더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일부일처제도 없고 근친 문제 등에 대해서 꽤 관대한 편이었다.
신근호가 귀족 과부들이나 노처녀들과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엘프들은 공동 양육이 기본이라서, 결혼이라는 개념 조차 희미한 상태였다.
미소녀와 같은 외모를 한 작고 약한 남성 엘프들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제일 먼저 희생되는 존재였다. 인구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잔혹하지만 ‘자궁’의 숫자였기 때문에, 남성 엘프들은 기근이 닥치거나 전란이 닥치면 제일 먼저 희생되었다.
전사나 기사야 몸이 약해서 못한다지만 신관도 없는 것은 여차할 때 버리고 가기 위한 것이었다.
“선물을 주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녀는 효녀거든요. 장수, 그러니까 기사를 노릴 때는 말을 먼저 노리는 법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를 위한 선물을 주세요.”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키를 넘겼다. 특별 제작된 리무진 버스였다. 검도 도장은 제성의 지원으로 경제적 걱정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력은 있지만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는 의욕은 좀 부족한 편이었다. 무도가로서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데만 관심이 있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지금도 도장에 등록된 생도 수는 적은 편이었다. 한희연이 유명해지면서 그녀를 노리고 들어온 사람들은 며칠 못가서 다 욕하면서 떠나갈 정도였다.
“그렇게 번성하는건 아니지만, 슬슬 차량이 필요할 때가 되었지요.”
제성은 그렇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회장님이 가장 무서운 분이세요.”
“별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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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와 제성이 그렇게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굴베이그 여신은 단상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녀신, 혹은 후계신을 만들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넘겨줘서 복제형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자신이 또 하나 있으면,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인격을 이루는 가치관의 기본을 만들어주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최대한 부모신에게 붙어다니면서 가치관과 지식들을 넘겨받으며 독립된 존재로 성장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유아기가 필요없는 존재이지만, 유아기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본체가 사라질 때는 자신의 가치관을 비롯한 지식과 경험 모두를 이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모신으로 프레이야를 가진 굴베이그는 원기의 인격을 바탕으로 인격이 만들어져있으며, 늘 함께 하면서 닮고자 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성향을 갖게 되어있었다.
부모신에게 상당히 유리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나만 혼자두고 저곳에서 뭘 하시는거지.’
굴베이그는 신근호의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프레이야를 보면서 외로움과 고립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런 점은 원기에게서 받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향, 물론 참을성이 많은 것도 원기와 굴베이그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곁에서 함께 있어주셨으면...’
억지를 부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게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굴베이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약간의 의지로 새어 나와서 원기의 마음속에 와 닿았다.
프레이야는 갑자기 다가온 느낌에 잠시 눈을 감았다. 미묘하고 은은한 느낌이 머리속에서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굴베이그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구나.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건 텔레파시 비슷한 걸까?’
프레이야는 그 살짝 마음에 와닿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을 둘러보자, 희연과 연하가 식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들은 고기 냄새가 싫다고 카레만 줄창 만들어먹었던 탓에 미드가르드의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새롭게 프레이야 제국의 일부이면서 자치 왕국화된 굴베이그령에는 귀족 문화와 미식 문화가 있어서, 독특하고 멋진 요리들이 많이 나왔다.
희연과 연하는 기본적으론 체육계 소녀들이라 먹성들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연하는 아주 기분 좋게 뱃속에 쑤셔넣고 있었다.
‘뭐, 급할 것도 없고 나중에 올라가자.’
“신탁이다! 신탁이 내렸다!”
갑작스런 사람들의 반응에, 프레이야는 놀랐다. 신탁이 내리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굴베이그 출신 신관들의 몸에서 빛이 발해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 가장 눈에 띄는 자라면 대신관이었다.
그는 에인페리아 출신으로 에인페리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외견은 60대에서 70대 정도의 고풍스러운 정정한 노인이었다.
실제로 에인페리아들의 경우 연령 설정이 자유롭지만, 젊은 육체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회 생활을 하면, 나이는 일종의 ‘신뢰’‘품격’등과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젊어보이면 왠지 상대가 얕잡아 보기 쉬웠다. 그래서 에인페리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보통 죽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10대는 거의 없고, 40대에서 50대가 일반적이었다. 20대보다는 70대 외모의 에인페리아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었다.
‘굴베이그의 신탁? 설마 진짜 굴베이그의 신탁인걸까?’
원기는 당황하며 테이블에서 일어나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물론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 역시 대신관을 향해서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대신관은 지긋이 감고있던 눈을 뜨고 프레이야를 향해서 고개를 돌린다음,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프레이야 여신님.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만, 자리에 돌아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냥 이 자리에서 듣지요. 신탁 내용이 무엇입니까?”
원기는 최대한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서 있었다.
“자리에 돌아와 주십사 하는게 그 내용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관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 순간 프레이야는 깨달았다. 굴베이그가 미숙해서 사념이 사방으로 누출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그렇지? 프레이야도 굴베이그도 이미 세상엔 없지? 나한테 신탁을 내릴 만한게 누가 있을리가 없지?’
걱정해서 손해봤다는 소리를 떠올리며 프레이야는 자리로 돌아갔다.
“위니스양, 함께 윗쪽 자리로 옮기도록 하지요. 재상이 시그노 남작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말이지요.”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신근호의 안색은 파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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