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첫키스
희연은 닭장에서 분투하는 원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3초간 쇼크로 경직된 닭들 덕분에 동시에 삼분의 일 정도만 상대하면 되었다. 그게 지금은 한계라서, 조금만 실수하면 닭들에 파묻히겠지만, 그 아슬아슬한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희연은 그런 원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로그 아웃을 하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동영상 사이트에 올려놓은 만큼, 그걸 확인하면서 폼이 잘못된 곳을 없는지 점검해 볼 생각이었다. 레벨은 이미 만렙으로 채워놨기 때문에 프레이와의 대결에 대한 최종 준비라고도 할 수 있었다.
“흠, 블레이드 엔젤이라. 마음에 드는데.”
희연은 자신이 나이트 엔젤로 활약하는 모습이 실린 동영상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비록 한 번의 출격으로 끝나버렸지만, 블레이드 엔젤이라는 애칭까지 붙어 있었다.
아직도 동영상 사이트 제일 앞쪽에 나이트 엔젤에 관련된 동영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촬영된 나이트 엔젤들을 나름대로 분류 분석해서 올려놓은 동영상들이 인기였다.
희연의 쪼렙학살 능력은 동영상을 통해선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저 적들이 당황해서 겁을 먹은 것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쪼렙학살 능력의 혜택은 그녀만 본 것이 아니라, 다른 나이트 엔젤들도 보았기 때문에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무기 상성이 영향을 주는 능력이라.’
쪼렙학살은 재미있게도 무기가 아닌 방어구에 영향을 받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희연이 방어구를 잘 걸치면 걸칠수록 능력이 닿는 범위가 커졌다.
나이트 엔젤이 되었을 때는 중화기를 가진 적들까지도 쪼렙학살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전투 헬기에 통용되지는 않았다. 기본으로 장착된 총기외에도 미사일까지 장착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자신이 기관총의 난사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무기 사랑이라는게 정말 굉장한 능력이야.’
그녀는 동영상을 보면서 자신이 받은 여신의 축복이 엄청나다는 것을 재삼 실감했다. 팔의 장갑과 가슴, 그리고 투구에 의식을 집중한 덕분에, 전투 헬기의 기관포를 몇십, 몇백발이나 버텨내고 있었다. 빛나지 않은 부분들이 의외로 쉽게 부서져나가서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면 그 점은 명확했다.
핀포인트 바리어라고 불리우는 옛 애니메이션의 기술과도 비슷했다.
‘집중만 잘 하면 되겠지.’
그녀는 동영상 사이트의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쳐 넣었다. 최근에 찍혔다는 게임상의 자신의 연무 모습을 검색하기 위해서였다.
‘에? 한희연 키스신이라고?’
검색을 누른 순간, 화면이 바뀌었지만 그전에 잠깐 스쳐지나간 자동완성 키워드가 그녀의 뇌리에 남았다. 하지만 굳이 다시 검색할 필요는 없었다.
첫번째 올라온 동영상들은 그녀가 닭장에서 닭들을 상대로 연습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었지만, 오른쪽에 나열된 동영상들 가운데 하나에 그녀와 원기가 키스하는 모습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몸을 일으켜서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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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회의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용건을 남겨 주시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죄송합니다만, 기다렸다가 만나뵐 수 없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는데로 시간을 주선해보겠습니다.”
기품있는 모습의 노년 사내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를 제외하고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면회 대기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제성과의 만남을 예약한 사람들이었다.
순식간에 크게 성장한 조제성의 사업 수완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다. 처음에는 사기가 아닌가 의심하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곧 의심의 여지가 사라졌다.
그는 자금을 외부에서 끌어들이는 짓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금을 시장에 풀어놓고 투자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손만 대면 금으로 변한다는 마이다스의 손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조제성의 경우 지나치게 바빠진 탓에 시간이 정해진 미팅의 약속을 일체 받지 않았다. 그저 틈이 나면, 기다리던 사람들 가운데 우선순위에 입각해서 만나주는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제성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워낙 많은 분야에 효과적으로 투자해서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 십 분이라도 자신의 사업을 피력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으로 라이딩 슈트 차림에 헬멧을 쓴 여자가 나타나서 비서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조사장 있어요?”
화가 난 듯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였지만, 젊은 여성의 미성이었다.
“예.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비서는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안내했고, 젊은 여성은 회장실로 향하는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곧 회장 전용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황급히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된거지?”
조제성 회장과의 접견을 위해 기다리던 사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내심 부러움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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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거지요?”
한희연은 조제성의 테이블을 힘껏 두들기며 말했다. 그녀는 에이전시 사장에게 따져볼까 하다가, 그가 멋대로 일을 벌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제성에게 따지러 온 것이었다.
그녀의 몸을 조종하는 발키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 무슨 이야기일려나. 아, 그렇군. 드라마 출연 때문인가?”
“뭔가 다른 것도 있는건가요?”
“그럴리가. 그저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인가 해서 말이지.”
“멋대로 키스신에 출연시키고 할 말인가요?”
“요새 탤런트들 가운데 그 정도도 안해주는 탤런트가 어디있나. 베드신은 물론이고 사소한 노출신도 없는데 말이지. 그 정도는 넘어가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전 그런게 싫어서 모델도 사진 모델에만 국한 짓는다고 말씀드렸을텐데요.”
“자네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고루한 것은 알고 있긴 했지만 말이지. 그정도인가?”
조제성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사실 조제성은 한희연의 이런 반응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조제성이 하는 회의도 수천만불이 오가는 중요한 회의였지만, 프레이야의 주변 문제에 비하면 별 가치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희연의 경우엔 조제성이 잘 요리해야 하는 중요한 소재였다. 희연의 융통성없는 원칙주의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뢰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네가 키스한 게 아닌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자네한테 기억도 없는 문제아닌가. 자네 정말로 어렸을 때 남하고 입맞춤 한 번 안했을 거라고 생각하나?”
제성의 생각대로 희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을 뿐 답변은 없었다.
“누군가가 자네 앞에서 숨을 못쉬고 죽어간다. 그러면 자넨 인공호흡도 안해줄 생각인가?”
“그런건 키스가 아니지요.”
희연의 반박은 살짝 힘이 없었다. 조제성은 살짝 미소지었다. 설득 가능한 원칙주의자라는건 때론 이렇게 사랑스러운 법이었다.
“그래. 자네도 잘 알고 있군. 의도가 다른 행위니까 말이지. 자넨 남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 신념이 있는 여성이야. 그런데 자네가 기억하지도 않고, 의도도 없는 행위에 왜 구애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물론, 자네를 생각해서, 원기를 제외한 다른 누구와의 신체 접촉도 없고, 드라마 출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애정신 이외에는 하지 않도록 잘 지시를 내려 두었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왜 드라마에 출연할 필요가 있었던 거지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연인 선언한 자네들이 광고 시장에서 얼마나 먹힐 것 같은가. 차라리 연인 선언한 것을 이용해서 드라마에 출연시키는 쪽을 골랐네. 원망할 거라면 사건을 일으킨 원기군을 탓하게.”
조제성의 말에 희연은 입을 다물었다. 스캔들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제성의 말대로 스캔들이 걸린 이상은 사진모델만으로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상 뭔가 있을 경우엔, 적어도 먼저 통보해 주세요. 제 몸은 어디까지나 제가 책임질테니까요.”
“물론이지. 자네가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희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제성이 희연에게 작은 디지털 사진틀을 주었다.
“자네들을 암중 경호하던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인데, 잘 나온 사진들을 골라 넣은 거라네. 작은 기념품이지.”
희연은 사진틀을 받아서 사진들을 넘겼다. 발키리가 들어간 상태의 사진은 없었고, 희연과 원기가 함께 있을 때 찍힌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절묘하게 희연이 원기와 함께 있으면서 미소짓는 순간들을 노려서 찍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지었었나.’
희연은 자신이 생각한만큼 표정관리가 안되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그녀가 피씨방에서 원기 품에 안겨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에서 원기가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디지털 사진틀을 챙기고는 헬멧을 뒤집어쓰고 회장실을 빠져 나갔다. 헬멧을 쓴 상태에서도 빨갛게 달아오른 목 부분이 보이는 것을 보면서 조제성은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어요?]
“그럼. 옛날의 나도 저랬을까 싶어서.”
팔불출 능력으로 조제성의 상황을 살피며 걸어온 유혜서의 말에, 조제성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빨갛게 변하는 모습은 닮긴했는데, 당신의 경우엔 보고있기 민망할 정도였어요.]
“그래? 그럼 내 승리로군.”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요?]
“추해질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다는 뜻이니까. 많이 좋아할수록 많이 행복해지는거 아니겠어?”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유혜서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의 그런 태도가 좀 마음에 안들어. 나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거 아니었어요? 스토커씨? 그리고 당신이 검토해야할 서류를 모아 놨어요. 이쪽 서류들도 좀 검토해 줘요.]
조제성의 팔불출 능력은 최고 랭크의 이능 중 하나여서, 두사람간에만 성립된다는 한정 조건이 붙지만, 차원을 넘겨서도 서로가 이어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오딘의 지배력이 차원을 넘긴 순간 끊어져서 프레이를 해방시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굉장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가 보는 장면과 생각까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제성은 유혜서를 자신의 대리이자 분신처럼 이용할 수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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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4미터는 족히 되는 괴물이 프레이의 난무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땅이 바닥을 울리는 순간, 멋지게 폼을 잡고 있던 프레이가 묵직한 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겜신난무”
그와 함께 거대한 괴물의 모습이 사라자며 승리의 빵빠레와 보물 상자가 나왔다. 그리고 보물상자에서 ‘투신검’이라는 유니크 템이 튀어 나왔다.
프레이는 검을 높게 들고 외쳤다.
“득템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생방송으로 게임 방송을 통해서 방송되었다.
“프레이가 투신의 마지막 분신을 꺾고 투신검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서 프레이는 완벽하게 투신 셋을 완성했습니다.”
“굉장하군요. 패치 이후로 투신의 분신들을 꺾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투신의 분신들은 만렙이라고 도전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요. 공격대를 꾸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달랑 세 명의 파티, 실질적으로는 단신으로 싸워서 이기다니 엄청납니다. 투신셋의 세트 효과도 상당히 뛰어나니,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입니다.”
“프레이와 불여우의 대결이 내일로 예정되어 있지요? 최근 드라마에서 열연을 보여줌으로써,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실력파 여배우 한희연양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겜신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프레이와 세기의 대결을 벌인다는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불여우 한희연과 겜신 프레이의 대결은 조제성의 협찬으로 지상파까지 타게 된 상태였다. 드라마 출연으로 한희연의 인기를 끌어올리고, 프레이와의 대결로 블러드 라인의 인기까지 견인한다는 조제성의 계획이 낳은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희연이 스턴 스틱을 검처럼 휘두르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수백마리의 닭들을 아름답게 제압하는 장면과, 프레이가 스킬 캔슬을 시전하면서 이리저리 튕기듯 허공을 날아다니며 각종 스킬 효과로 거대한 적을 감싸면서 해치우는 장면이 내일의 대결을 광고하면서 TV를 장식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원기는 닭에게 파묻혀 죽어가고 있었다.
“제발 누가 나 좀 꺼내줘요.”
만렙의 캐릭터 짬타이거는 피통이 큰데다가 회복속도가 빨라서, 죽지도 않았다. 그래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꺼내주지 않을거라면, 제발 죽여라도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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